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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7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그리고 질투는 계속된다
문화저널(2004-02-19 14:07:25)
괜찮은 찻집에 놓인 화병의 꽃이 가짠 줄 알고 덥썩 만졌는데 여린 꽃잎이었을 때, 꽃에게는 미안한 일이고 자신을 들킨 것이 무렴해 어색하게 웃어야 한다. <질투는 나의 힘>은 그런 찰라의 질감을 포착하는 영화다. 신예 박찬옥 감독은 바로 그 어색한 순간을 렌즈에 담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는데 절개하고 꿰매는 솜씨가 외과의사처럼 침착하다. 인물의 성격과 그 관계를 통해 지식인의 째째와 비루를 날카로운 메스로 새긴 그를 '여자 홍상수'(죄송한 말이지만)란다. 유학을 가고 싶어하는 온후한 청년 박해일. 돈은 없지만 학문적 열정도 성실성도 있다. 잡지사의 객원(비정규직 앞에 붙는 이 수사라니)기자라지만 이리저리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초등학교 방과후 특기적성교사 자리라도 기웃거린다. 그래, 좋게 말해 프리랜서라 해두자. 모난 돌도 아니고 분수를 알기에 정 맞는 일도 없는 그다. 마스터에게 애인을 두 번이나 잃는 기구한 도제 처지지만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문성근 주위를 맴돈다. 인생의 수업료려니 하는 것일까. 그가 옥탑방의 방바닥을 걸레로 닦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생의 누추함을 닦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관용적인 그지만 하숙집 딸에게만은 모질다. 먹이사슬에도 천적이란 게 있지 않은가. 유학을 다녀온 프로페셔널 문성근. 개방적이면서도 이기적이고 서둘지 않으면서도 할 말 다하는 다층적 인물. 작가는 아니지만(?) 문학잡지의 편집장이다. 쓸 줄은 몰라도 볼 줄은 아는 그의 취미와 특기 그리고 비즈니스는 로맨스. 연애로는 한 소식 깨친 사람이다. 문전처리가 능숙한 그는 소리개 까치집 뺏듯 두 번이나 박해일을 울린다. 그는 방을 닦지 않는다. 컴퓨터 세팅, 운전 심지어는 편지도 대필을 시킨다. 모두 마이너리거 박해일의 몫이다. 권력자가 아랫것의 시간과 관례를 쉽게 무시하듯 이 덜 큰 어른 편집장은 아무 때나 약한 청년을 부르고 세워놓는다. 이 선수는 금방 화를 내고 또 금방 부드러워져 응석을 부리는데. 맞다. 메이저들은 유연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방하다. 그는 잡지사에 새로운 씨이오가 부임하자 아버지와 협의 한 끝에 아예 새로운 잡지사를 차리기로 한다. 허상이긴 해도 양과 질을 다 가진 이 남자는 회식 때, 같이 잤던 여자의 등을 남모르게 쓰다듬는다. 그걸 잡아내는 감독의 카메라 …… 여인들. 수의사이자 사진사인 배종옥은 조용한 성품이되 베일로 자신을 가두지 않는 30대 독신 여성. 상한 짐승을 친절하게 치료해 주는 것처럼 오는 남자도 가는 남자도 막지 않는다. 함부로 열정에 들뜨지 않는 그녀는 취미로 배운 사진으로 잡지사에 취직하여 20대와 40대의 남성을 섭렵하며 '지금 여기'를 즐기는 캐릭터. 자그마한 수예점을 하는 하숙집 딸은 집요하게 박해일을 좇는다. 가난한 사람의 요리에는 독이 없듯 가장 솔직한 인물. 전희도 없는 인터코스의 섹스 끝에 그를 차지했다고 믿고 결혼하자고 덤비는 그녀는 박해일이 내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기타. 실루엣만 나오는 첫 애인은 범상하지만 문성근의 중학생 딸이 박해일을 바라보는 눈은 한국판 로리타적 시선이어서 미스터리로 남는다. 이들이 추는 윤무(輪舞)를 연하게 보면, 섬세한 영혼을 가진 한 청년의 아픈 성장영화로 보겠지만 나로서는 자꾸 계급영화로 읽힌다. 계명만 누르면 화음이 되 나오는 악기를 장난감으로 쓰는 문성근은 길드의 장이고 싸구려 캡틴큐를 마시는 박해일은 직공으로 해석된다. 수의사와 편집장이 포장마차에서 먹는 오뎅은 여유로 보이지만 비정규직과 하숙집 딸이 먹는 오뎅은 궁상스럽다. 고흐처럼 돈대주는 동생도 없고 금홍이 같은 애인도 없는 그가 두 번의 실연을 학습으로 이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떫다. 인디는 주류를 꿈꾸고 야생화는 정원을 꿈꾸는 오늘, 그들의 질투는 힘이고 양식이며 적이고 용기이자 성장일 것이다. 이제는 주류가 된 작가 홍상수 영화 속의 지식인들이 위선으로 가득 차 냉소적 시선인데 반해 여자 홍상수가 그려내는 첫작품의 시선은 좀 떫기도 하지만 깊고 웅숭해서 따뜻한 질투를 자아낸다. "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기형도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를 질투하게 하더니 젊은 감독마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옛날 박해일이 당한 설움을 다시 또 당하는 오늘, 아흐, 천국이 아닌데 어딘들 질투가 없으랴.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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