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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7 | [문화저널]
◆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릴레이연재 암울한 시절, 빛나는 기억 속 문정현 신부
김인봉 전주효정중 교사 김인봉/진안여고에서 전교조 관련으로 해직됐으며, 복직 이후에는 전(2004-02-19 14:06:47)
누가 나에게 가장 빛나는 시절이 어느 때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할 것이다. 80년대 후반이었다고. 끝이 없는 터널처럼 암울했던 그 시절을 가장 빛나는 기억으로 남게 하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분이 문정현 신부님이시다. 내가 신부님을 처음 뵌 것은 1985년 장계성당이었다. 악명(?) 높은 신부님이 부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갔더니 거무튀튀하고 약간 울퉁불퉁한 얼굴에 곱슬머리는 쉽게 가까이할 수 있는 편안함과 자상함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뚝뚝함과 위엄이 엿보였으니 이 첫인상이 과히 틀리지 않음은 오래지 않아 알았으나 그 무뚝뚝함 속에 깊은 속정이 들어 있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았다. 신부님이 오시자, 절간처럼 조용하던 장계성당이 시끄러워졌고, 건강도 좋지 않고 학교도 재미가 없어 집에만 쳐 박혀 아무 짬도 모르는 내가 거치 없이 바빠지면서 시대의 소용돌이에 급속하게 휘말려 들어갔다. 그 때는 장계성당 관할 공소가 여러 군데 있었는데 신부님은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그곳에 가시어 미사를 집전하셨다. 그때 사목회 임원들이 공소에 번갈아 따라 갔는데 나는 다른 사목회 임원들에 비하여 비교적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자주 따라다녔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매주, 그것도 주말에 꾸준히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내 깜냥에는 열심히 따라다녔다. 그런데 신부님은 그렇게 열심인 나를 한 번도 칭찬하지 않았다. 오히려 따라 가거나 말거나 무관심한 편이었다. 한 번은 "오늘은 바빠서 못 가겠습니다"고 말씀드리자 "그런 건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라고 냉정하게 자르셨다. 말씀인즉 공소에 가고 안 가고는 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당신한테 허락 받거나 알려 줄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어찌 저렇게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에서 시국 관련 행사를 할 때마다 로마병정처럼 중무장한 전경들이 성당에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하도록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때마다 나는 가톨릭 신자임을 십분 활용하여 성당에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이런저런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다. 그때 불온한 유인물을 인쇄할 곳이 마땅치 않아 학교 기능직 아저씨의 도움을 여러 차례 받았었는데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그만 경찰에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협박이 들어왔다. 내가 활동을 그만 두지 않으면 그 아저씨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내 죄를 내가 받는 것은 마땅하나 나를 도와준 죄밖에 없는 그 분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신부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고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가타부타 아무 말씀이 없었다. 잘했다 잘못했다는 고사하고 그 동안 애썼다는 말씀 한 마디 없었다. 죄송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되게 무뚝뚝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 아니었다.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젊음이 봄꽃처럼 떨어지고, 최루탄에 쓰러지고, 물 고문에 죽어가고, 빚더미에 짓눌린 농민들이 농약으로 고달픈 삶과 빛을 청산하는 사태가 잇따르자, "농민도 사람이다", "농가부채 탕감하라", "군부독재 타도하자" 등 당시로서는 간담을 서늘케 하는 플래카드가 성당에 걸리면서 가톨릭농민회가 주도하는 시위와 농성이 수시로 벌어지고 그때마다 현직 교사인 나는 현장에 달려가 함께 하는 용기(?)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신부님은 그렇게 용감무쌍한(?) 나에게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때 면사무소에 다니던 작은형이, 가톨릭농민회가 마을 들머리에 매달은 "농가부채 탕감하라"는 플래카드를 밤마다 떼자 신부님은 플래카드의 원상 회복과 관계자 문책을 요구하였고, 사건이 커지는 걸 막기 위하여 나는 밤마다 그걸 도로 갖다 붙이느라 정신 없었던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그러나 신부님은 이런 나의 작은 고민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이처럼 때에 맞는 말씀을 듣지 못하니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어 나는 답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참으로 귀중한 침묵이었고 무뚝뚝함이었다. 만약 그때 신부님이 섣불리 나의 열심과 용기(?)를 칭찬하고 노고를 위로하였다면 혹은 뭔 겁이 그리 많으냐고 꾸중하셨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 매주 공소에 가는 열심과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 책무를 나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남을 도와주거나 칭찬 받기 위한 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면 교원노조를 건설하다 해직되기도 어려웠거니와 설령 어찌 어찌하여 해직에 성공(?)하였다 하드라도 중도에 온갖 핑계를 대어 하차하였을 것이니 신부님의 말없음과 무뚝뚝함은 평생 먹고 살 수 있도록 고기 잡는 법을 일러주신 훌륭한 가르치심이었다. 그때 신부님의 강론 내용이 민중신학이었는지 해방신학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무엇이었는지 아둔한 나는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에서 나오는 관념과 추상이 아니라, 약장수처럼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당신이 몸소 행함에서 뿜어 나오는 괴력은 이중섭의 소를 연상케 하여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잡아 흔들어 바꿔놓았다. 공소에 갈 때는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사목회 임원들이 함께 갔는데, 공소에서 신부님이 미사를 준비할 동안에 나는 마을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좁은 방에서 둘러앉아 미사를 보고 공소 신자들이 정성껏 마련해준 음식을 나누면서 시국의 어려움과 삶의 고달픔을 나누고, 어두운데 조심해 가시라는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초롱초롱한 별빛이 마구 쏟아지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부엉이 우는 고개를 넘고 개구리 우는 논두렁을 걸어 돌아오는 늦은 밤길의 기쁨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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