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3.7 | [정철성의 책꽂이]
체험의 시
문화저널(2004-02-19 14:05:44)
언어를 사용하여 체험을 묘사할 때 우리는 종종 재생의 어려움에 부딪힌다. 무엇인가를 겪었던 당시의 총체적인 그림과 소리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먼저 침작해야 한다. 체험자가 사건의 현장 속에 있었기 때문에 전체를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전체의 윤곽이라고 보관하는 것은 사건 이후 재구성된 것이며 이것을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모아진 불완전한 정보마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기억의 자갈밭에서 모가 죽으면 원형을 확인할 수 없게 된다. 실상의 전달을 요구받은 체험자는 자신의 미숙한 솜씨 또는 언어 자체의 한계를 빌미삼아 체험을 옹호한다. 그는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이 사건의 일부가 아니라 사건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고 항변한다. 비슷한 경험을 함께 나눈 청중의 우호적인 고갯짓을 그는 그리워한다. 유용주의 시집 『크나큰 침묵』을 펼쳐놓고 나는 체험과 문학작품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를 묻고 있었다. 체험이 언제 어떻게 작품이 되는가에 대한 대답은 어렵지 않다. 막연한 공포심을 떨쳐버리고 일정한 형식에 순응하여 글로 쓰면 그것이 작품이다.『작가세계 2003년 봄』호를 읽다가 나는 평론가 김수이가 경험적 주체와 미학적 주체를 구분하여 나희덕의 시를 설명하는 책장 앞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나희덕의 시가 주체의 분열을 바탕으로 출발했다는 진단이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경험과 미학이라는 사고의 틀이 내가 생각하던 주제와 흡사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유용주의 시에서 나는 체험이 좋은 작품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체험의 강렬함이나 독특함이 작품의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작품용 체험이 따로 있다고 믿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작품의 기교가 체험의 내용과 상관없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유용주의 시는 체험과 미학을 따로 놓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그는 세상을 일부러 아름답게 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청중의 공감을 끌어내려고 사건을 재구성하는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 할 말을 다 한다.『가장 가벼운 짐』에서도 그는 '무서운 손님'에게 제 몸을 제물로 내놓을 만큼 우악스러웠다.『크나큰 침묵』에서는 후레자식 소리를 들어도 모자랄「구멍?1」과 같은 시를 태연히 선보인다. "콧구멍을 생각하면" 능히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위인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 꼴을 보면 천길 낭떠러지에 스스로를 세워두고 손가락을 들어 한 번 더 미는 것 같아 보는 사람은 가슴이 졸아든다. 그러나 그는 "생활정보지를 가지런히 깔고 앉아/지하철 계단 밑에서 참선을"하는 중이다. 한 소식 들으면 "시, 시아버지 도폿자락, 시다앗"하고 오도송을 읊기도 한다. 유용주는 "『가장 가벼운 짐』에 혼신의 기력을 다 쏟아 부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중에 나왔다고 더 좋을 리도 없고 고생스러움도 좀 덜한 편인데,『크나큰 침묵』의 시들이 더 감동적이다. 물건을 보며 예기를 계속하자. 여기「소」가 있다. 1톤 와이드 봉고 짐칸게/소가 탔다/실로 오랜만에 바깥 나들이다/낯선 거리에서 방향을 바꿀 때마다/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발은 원래 흙에 알맞게 만들어졌음)/실컷 부려먹더니 대가가 겨우 요거야./두 눈 크게 뜨고 머리 휘둘러보지만/너무 바짝 죄어진 코뚜레 때문에/생똥을 철푸덕 싸고 말았다/난폭 운전으로 고발할 수도 없고/거친 숨 허옇게 내뿜으며/분노보다 그만 눕고 싶은 마음 간절한데/칼날 겨울바람 뚫고 씽씽 잘도 달린다/얼마 지난 뒤 그를 기다리는 건/푹신한 짚북데기 갈린 외양간이 아니라/피냄새 가득한 시멘트 바닥,/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나운 나들이 길에/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 생각을 하며/길게 웃고 말았다/붉은, 따뜻한 피가 응어리지면서/한동안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이 시를 소의 신세에 자신을 빗대어 묘사한 것 운운하면 우스운 독서가 된다. 소는 그냥 소다. 죽으러 간 한 마리 소가 여기있다. 체험의 외영니 확장되어 짐승의 마음속에 들어가니 연민의 정이 애틋하다. 그러나 묘사의 붓끝은 한 치 벗어남 없이 냉정하게 사실을 따라 움직인다."너무 바짝 죄어진 코뚜레"와 "분노보다 그만 눕고 싶은 마음"이 그런 예이다. 소가 모르는 사실을 목격자인 시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가? 그렇다. 일톤 트럭의 용도를 시인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시치미를 떼다가 도살장에 이르러서야 살육의 현장을 소개한다. 소가 길게 웃는 동안 왜 "붉은, 따뜻한 피가 응어리지면서/한동안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는가? 답할 수 없는 이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논리가 아닌 가슴으로 소의 운명을 느끼도록 요구하는 것이 이 시의 교묘한 구성이다. 이 시는 광우병보다 더 확실하게 식욕을 떨어뜨린다. 「감옥」「풀」「거머리」등이 이런 유형에 속하는 시인데, 시인은 여기서 단순하고 정확한 묘사를 바탕으로 살아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질곡과 끝 모를 탐욕을 그리고 있다.「거머리」에 등장하는 노인과 "대응분식 바깥양반 김명수 씨"를 동시에 바라보면 인간에 대한 증오와 애정이 자연스럽게 대조된다. 지면이 좁지만 한 편 더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의 시는「구절리 가는 길」이다. 유용주 시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듯 하면서도 그의 시심을 엿볼 수 잇는 가락이 아리땁다. 구절리는 아우라지가 가까운 강원도 정선군 북면 구절리일 것이다. 산 속에 돌 들어앉았네 돌 속에 나무 자라고 돌 속에 물 흐르고 돌 속에 꽃 피고 돌 속에 단풍 지네 물 속에 하얀 돌 자라네 돌 그림자 속에 검은 물고기 자라네 돌 그림자 속에 구부러진 소리 한 자락 들리는 듯 하이 물 그림자 속에 마을 있고 물 그림자 속에 빈 배 있고 산의 몸 속에 사람 나고 물의 뼈 속에 사람 살고 돌의 혈관 속으로 사람 들어가네 이끼와 뿌리 되어 돌아간다네 이 크나큰 침묵, 누가 들여다 놓았나? "크나클 침묵"이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구절리는 말이 없다고 하면 신파조가 될까?(원고를 유월에 쓰고 있다)구절리의 산천만 그런 것이 아니지만, 천지는 본래 말이 없다. 하늘과 땅은 슬픔을 모르고 그 속에 우리가 산다. 유용주의 시가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데, 이 시 한편으로도 그 체험의 깊이가 이 시집에 와서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