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 [문화와사람]
잊혀진 시간을 복원하며, 사회와 역사에 묻는다
기록영화 만드는 조성봉 감독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
(2004-02-19 14:03:34)
남원 실상사 입구, 시끄러운 포크레인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작년 여름 이곳에 큰물이 져, 여태 복구작업이 진행중이었다. 일군의 지프차가 흙먼지를 날리며 들어선다.
실상사에 들어 운 좋게 도법스님과 일면하고 연못을 노니는 튼실한 잉어를 들여다보고, 또 신라시대 천년의 숨결이 잠든 3층 석탑을 기웃거려가면서 두 시간 가까이를 기다린 뒤였다.
그를 만난 건 실상사 입구에 자리한 지리산 생명연대 사무실에서였다. 촬영이 길어진 모양인데, 모자를 푹 눌러쓴 그가 보는 듯 마는 듯 딴청을 부린다. 사무실에 마주 앉아서도 막걸리 한 잔, 그리고 몇 개피의 담배를 피우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뗀다. 티셔츠 앞가슴에 박힌 베레모의 체 게바라가 그보다 표정이 밝다.
경계심 많고 무언가 마땅찮은 표정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이 제주 4·3 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 나선 <레드 헌트>(1997년)의 조성봉(43) 감독이다. 1997년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레드헌트>는 당시 이적표현물로 규정돼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인권운동가 서준석 씨가 구속되는 등 적지 않은 파장과 논란을 일으켰던 작품. 전문가들 사이에선 기록성에 충실한 객관적인 작품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의 금기였던 4·3항쟁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이적 시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레드헌트>와 맥을 같이 하는 또 다른 작품을 구상하며 그는 올해 1월부터 지리산에 들어와 '빨치산'의 흔적을 좇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사상과 이념의 대치, 그로 인한 광기 어린 살육과 전쟁. 한국 근현대사를 불행과 반목으로 이끌었던 비이성적 피아(彼我)의 구분과 이데올로기의 음험한 그림자는 분단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아직 걷히지 않았다.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낙인처럼 끌어안고 살아온 이들에게 역사가 충분한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까닭이다.
부산 사투리가 진하게 배어있는 그가 '빨치산'과 그 후손들을 찾아 지리산으로 흘러온 것도 이 '시대 유감'의 증표일 터였다.
"사회 변화는 있지만, 어느 시대에도 모순은 늘 존재합니다. 빨치산을 단순히 영웅주의적인 시각에서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뒤흔들었던 시대의 무게, 개인과 역사의 관계를 다각적인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 싶었습니다. 책도 읽고 주민들과 접촉해 가면서 나름의 관점을 가다듬어가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의 장기수들과 구례와 뱀사골 주변에 흩어져 있는 열 두명의 빨치산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이번 작품의 등장인물들이다. 조 감독은 가능하면 네레이션을 최소화하고 이들의 증언과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고 말한다. 되도록 담백하고 솔직하게, 기록성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터무니없이 무조건적 축출 대상으로 내몰렸던 참혹한 기억을 그저 개인과 가족의 숙명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사람들, 쉽게 마음을 열어줄 리 만무하다.
"뭔가를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우선 이곳 주민들과 친해지려고 조금씩 다가서는 노력부터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그 상처를 잊고 덮으려고만 했지 상기해 보려고 하지 않았을테니까요. 이 분들을 만나면 내가 겪은 일들이 이제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여러 번 만나 얼굴을 익히고 이야기하면서 본인과 역사의 관계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들 삶의 증언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필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빨치산 가운데에서도 여성 빨치산은 더더욱 수면 아래 묻혀 있다고 지적하는 조 감독. 여성 빨치산들에게 더해진 '이중적 억압'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고 조명해내는 작업을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지리산에 들어와 6개월 가까이를 이곳에서 생활한 조 감독은 지리산의 사계를 영상으로 담아내기 위해 적어도 1년 동안은 지리산과 빨치산 활동가들과 함께 호흡할 계획이다. '동가식 서가숙'의 생활이 고달플 만도 하련만, 그는 그저 "신나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자기 안에 내재된 에너지가 없다면 결코 쉽지 않을 일이다.
그렇다면 조성봉이라는 개인의 삶과 '잊혀진 시간'을 복원하려는 한 기록영화 감독의 사회의식 사이엔 어떤 관계성이 있는 것일까. 부산대 81학번 중퇴, 역사교육전공. 조 감독은 거기에서부터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군 제대 후 84년 학원자율화 조치가 내려지고, 89년엔 결혼을 하게 됐어요. 복학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복학에 대한 의지가 없어서였을텐데, 학생 신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야학에서 노동자들과 만나 그들의 치열한 삶과 대면하면서 대학이나 지식이 별 의미가 없어졌거든요. 한 마디로 부끄러웠습니다. 현장에 나가 운동을 하자,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고 공장에 들어가 학생운동보다 노동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죠."
그에게도 시대의 무게는 간단치 않았던 모양이다. 사회변혁과 저항의식이 영상으로 옮겨진 까닭이 궁금했다.
"야학 때 사람들과 김민기의 음악을 많이 불렀는데,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때부터 조금씩 문화에 대한 나름의 관심이 시작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러면서 1990년 부산 노동자문예창작단 친구들을 만나 영상작업에 참여하게 됐고, 94년엔 영상을 업으로 삼아보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생업을 찾아 나서거나 문화 운동 쪽으로 편입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고 여기로 온 건 그냥... 단순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모순이 있어서 운동을 하는 것이지, 특별히 철학이나 계기가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그는 '하늬영상'(www.hanee.pe.kr)이라는 기록영화집단 대표로 있다. '하늬'는 시인 신동엽의 장편 서사시 '금강'에 나오는 '신하늬'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하는데, '하늬'는 지배계급과 외세에 맞섰던 갑오농민혁명의 젊은 전사의 이름이다. '체 게바라' 티셔츠와 '하늬'. 사회 모순에 저항하며 그것을 운동의 자양분으로 삼아온 조 감독에게 혁명가의 삶은 깊은 동경의 대상인 듯 하다.
"하늬영상의 모든 장비는 세상에 개입하는 우리의 무기입니다." 하늬영상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이다.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사회의 모순이 풀리지 않는 한 그의 무기는 늘 장전된 상태다. 이번엔 숨죽여 지내야 했던 지리산 빨치산들의 피와 눈물이 사회와 역사의 양심 앞에 커다란 질문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