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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 | [문화칼럼]
풍물과 판소리에 빠져드는 까닭은
이재봉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2003-04-07 10:34:45)
원광대에 몸담은 지 겨우 한 학기 지난 1996년 가을 어느 날, 학생 두 명이 연구실로 찾아와 풍물패 지도 교수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풍물의 '풍'자도 모르던 나에게 말이다. 더구나 그들은 내 학과 소속도 아니고 내 수업을 받는 학생들도 아니었는데. 그 해 8월 서울 연세대에서 이른바 '한총련 사태'가 벌어졌다. 통일 운동에 앞장서던 대학생들이 광복절을 맞아 북한 학생들과 판문점에서 토론회를 갖기로 하고 연세대에 모였는데, 경찰이 이들을 봉쇄하는 바람에 학생들과 경찰 사이에 끔찍한 폭력이 빚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교육부에서는 전국의 각 대학에 지침을 내렸다. 모든 동아리들에게 지도 교수를 두도록 하되, 지도 교수를 구하지 못하는 동아리는 방을 폐쇄하라고. 학생들이 데모하지 못하도록 감독을 철저히 하라는 취지였다. 이런 사연으로 원광대 풍물패 학생들이 몇 몇 교수들에게 지도 교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는데 거절당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대학의 풍물패라면 데모하는데 분위기 잡아주며 부추기는 역할을 많이 했는데, 어느 교수가 선뜻 그들을 '지도'하겠다고 나서겠는가. 그러던 차에 내가 맡고 있는 북한 및 통일 문제에 관한 교양 강좌를 들어본 학생들이 나에게 부탁해보라고 귀띔해 주었단다. 학생들이 지도 교수를 구하지 못해 방을 뺏긴다면 동아리를 고이 해체하고 활동을 접게 될까? 그들을 학교 바깥으로 몰아 이른바 '지하 활동'을 하도록 이끄는 것보다는 방을 지키게 하면서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이끄는게 더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기꺼이 지도 교수가 되겠노라고 도장을 꾹 찍어주었다. 한 가지 조건을 내걸면서. 김영삼을 비난해도 좋고 김일성을 찬양해도 좋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폭력은 저지르지 말라고. 교문에서 경찰에게 돌멩이나 화염병을 던지고 학교 안으로 피하는 비겁함보다는, 최루탄에 눈물을 쏟고 진압봉에 피를 흘리더라도 철저하게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진정한 용기를 지니라면서 말이다. 다음 날엔 다른 풍물패 학생들이 찾아와 같은 부탁을 했다. 그 때까지 장구 한 번 만져보지도 않은 사람이 주야간 풍물패 지도교수가 된 사연이다. 첫 학기엔 개강 모임이나 종강 모임 또는 무슨 공연이 있다면 잠시나마 얼굴을 내밀고 술 한잔하라며 조그만 돈 봉투라도 건네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풍물패와 인연을 맺었으니 이 기회에 장구채라도 한 번 잡아봐야겠다 싶어 장구를 배우게 되었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 분야에 워낙 소질도 없고 취미도 없었지만 배울수록 재미가 있었다. 손놀림은 뻣뻣할지라도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려졌다. 장단이야 맞든 안맞든. 집에다가도 장구를 마련하여 아래윗집 사람들에게 피해를 덜 주기 위해 양편을 수건으로 감싸놓고 연습을 할 정도였으니, 잘하든 못하든 장구에 푹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어느 학회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서 잘 알고 지내는 교수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듣게 되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1993년 여름 서울의 한 극장에서 <서편제>를 보고 난 뒤의 감동 비슷한 것이랄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때는 해외에서 10년 가까이 공부하다 들어온 터여서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그리움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소리를 질러보고 싶은 충동까지 강하게 느꼈다. 올해 초부터 판소리를 배우게 된 사연이다. 익산 국악원에 등록을 해놓고 처음 배운 소리가 <서편제>에도 나오는 '사철가'.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공부하기 전에 흔히 맛보기로 배우게 되는 단가란다. 여기 저기서 자주 들어본 소리였지만 따라 부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전문 소리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취미 생활로 하는 것이라고 대충 배우는데도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어려워도 재미있어서 아무리 바빠도 수업을 빼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이나 학교에서는 물론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도 흥얼거리고, 기차나 버스 안에서까지 휴대용 녹음기를 통해 가락을 익히기도 했으니 시작부터 단단히 빠져든 셈이다. 자연 속에서 소리를 질러보고 싶어 눈 덮인 겨울산을 혼자 오르기도 했으니. 한편 '사철가'를 대충 익히고 '심청가' 한 대목을 배우면서 내 자신이 전혀 수양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판소리 배우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견디기 어려울 정도이니 말이다. 아이들이 태권도를 배우면서 흰 띠를 두를 때는 주위 사람들이 알까봐 감추다가, 어느 정도 배워 빨간 띠를 매게 되면 실력을 테스트해볼 겸 은근히 싸움을 걸고 싶은 생각이 들고, 유단자가 되어 검은 띠를 두르면 오히려 싸움을 피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태권도 배우는 아이들에 비하면, 빨간 띠의 경력이나 실력을 갖춘 게 아니라 이제 겨우 흰 띠의 왕초보 수준인데도, 어디에서든 누구 앞에서든 판소리 한 대목을 뽑고 싶어 목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을 느끼니 내가 생각해도 못 말리는 놈 아닌가. 더구나 어찌 어찌 기회를 마련하여 소리 배우는 것을 자랑했다가 무관심 내지는 야유를 받은 적이 있으면서도 말이다. 한 예로 지난 4월 1학년 학생들 100여명과 지리산에서 수련회를 가졌을 때다. 강연이 끝나고 마련된 뒤풀이 자리에서 학생 대표가 나에게 인사말을 부탁했다. 학부 행사에서 학부장인 내가 인사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인사말을 끝내자 무대에서 마이크 잡은 김에 노래도 한 곡 뽑아달라는 부탁이 곁들여졌다. 기대했던 바였으니 주저없이 '사철가'를 읊었다. 자랑스럽게 열창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는데 주위 교수들로부터나 학생들로부터 잘했다는 반응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판소리도 부를 줄 아는 멋쟁이 교수'라는 칭찬이나 환호가 뒤따를 줄 알았는데. 게다가 뒤풀이 자리를 끝내고 나오는데 조교가 나에게 들려준 얘기는 실망을 넘어 충격이었다. 내가 소리를 하는 동안 자기 주위에 있던 한 여학생이 옆 친구에게 이랬단다. "어머, 무슨 노래가 저렇게 길어? 언제 끝나는 거야?" 앞에서 말했듯이 '사철가'는 대충 5분 짜리 '단가 (短歌)'에 속하는데, 내가 얼마나 못 불렀으면 그 '짧은 노래'를 너무 길다고 느끼며 지겨워했을까. 난 전라도에서 태어났는데도 초등학교는 부산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은 서울에서, 대학원은 미국에서 마치는 바람에 전라도 말을 잘 쓰지 못한다. 고향은 아니지만 전라도에 자리를 잡고 가벼운 욕설이 악의 없이 곁들여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익히는 것도 판소리에 빠져드는 까닭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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