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 [문화칼럼]
자연과 문화, 그곳에 놓인 우리의 미래
오태수 KBS 전주방송총국장
(2004-02-19 13:45:31)
<가을동화>란 드라마 하나로 일약 방송계 미다스의 손으로 급부상한 PD가 이번에는 다시 <여름향기>를 내 놓아 화제다.
그가 만든 작품이 우리에게 감동과 여운을 주는 것은 특유의 순수와 아름다움이 배어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받쳐주고 있는 드라마 속의 배경 화면이 눈길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독특한 자연경관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전라북도의 자연풍광을 이번 드라마의 주된 배경으로 담는다고 한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는 요즘 보기에도 시원스러운 덕유산 자락의 무주리조트를 메인 무대로 해서 남원 일대 등지의 녹색 경관이 빼어난 곳을 촬영하여 담아 낼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지역 풍광들이 자주 선보이게 될 이 드라마는 7월 초부터 안방에서 만날 수 있게 된다.
드라마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 보다는 방송을 통한 홍보가 때때로 폭발적인 광고 효과를 내기도 하여 이 드라마 이후에 예상되는 관광특수에 나로서는 내심 기대가 크다.
관광공사에서는 이 드라마의 가치를 1,800억원으로 계산해 내고 해외 홍보전략에 아이디어를 짜고 있다는데 말하자면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에 이 드라마가 판매되어 방송되면 우리 전북을 포함한 한국의 명소(?)를 보기 위해 이전의 <가을동화>나 <겨울연가> 때처럼 적지 않은 관광객이 몰려들어 그 정도의 돈을 쓰고 갈 것이라는 계산이다.
여기서 잠시 지금의 우리 전라북도의 생활 형편을 살펴보자.
전북의 경제규모는 고작 전국의 3%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기 그지없고 재정자립도는 겨우 18% 남짓에 머무르고 있을 만큼 초라하다.
그렇듯 가난한 경제구조에서 한 발자국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며 우리는 단합된 의지를 모아 그동안 새만금사업을 추진해 왔지만 아직도 중단이냐 계속이냐 하는 소모적인 논란이 그치지 않은 채 겨우 겨우 공사를 이어 가고 있다.
전북경제 활성화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믿고있는 또 다른 대형 프로젝트인 군산 경제자유구역 지정이나 양성자 가속기 사업과 연계한 방사성 폐기장 유치, 지방분권과 관련한 중앙부처 기관의 도내 이전 문제 등 굵직굵직한 현안들도 아직 뚜렷한 비전 없이 모두가 지지부진 상태로 표류하고 있다.
희망적인 생활기반이 부족하고 보니 전북의 상주인구는 해마다 줄어들어 드디어는 200만명 선마저 붕괴되어 버렸다.
이런 시점에서 잠시 눈을 돌려보면 우리에겐 때묻지 않은 자연이 있고 자연과 어울려 만들어 낸 소중한 문화가 있으며 그 안에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는 예술성과 창의성을 갖춘 심성 좋은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잠재되어 있는 좋은 자원의 활용 문제를 심도 있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연과 문화는 기본적으로 원형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생활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일정부분의 자연스러운 변형 말하자면 친환경적인 개발 또는 현대생활과의 접목 같은 것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내가 PD신분으로 전국을 쏘다니며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자주 낙담해야 했던 경험이 있다.
봄에 봐 두었던 풍광이 가을에 다시 찾아가면 다른 모습으로 변모해 있는 황당함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정겨운 오솔길이었던 것이 폭넓은 시멘트 도로로 바뀌고 정겨운 토담과 창살무늬가 있었던 집들이 헐려 나가면서 국적불명의 야릇한 형태의 집으로 변해 가는 모습, 하천 변을 시멘트 옹벽으로 처리하여 민물고기가 살 수 없게 만든 모습 등 그런 것들을 보면 그저 참담하다는 느낌 뿐이었다.
특히 제일 가슴 아픈 것은 편리함이라는 이유로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농촌마을에 아파트 덩어리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보기 좋았던 스카이라인이 없어지고 이웃 간의 오붓한 인정도 철문으로 단절되어 버렸다.
그 뿐인가. 무수한 전신주 군상과 어지러운 전선 가닥들, 이것들은 일정한 룰이 없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곳에는 여지없이 시멘트 기둥이 꽂혔고 전선들은 산발머리처럼 방향 없이 종횡무진 난무하였다.
문화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나 현대생활과의 접목 같은 명제는 당연하지만 원래의 가치나 시대정신이 사라지고 없어 실망할 때가 많았다. 땀과 혼으로 명예를 지켜야할 장인(匠人)은 작품완성 기간의 단축과 대량생산을 위해 각종의 현대식 기계에 의존해 있었고 고유민속 같은 것은 시상금이나 시연사례에 눈이 멀어 어줍잖은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었으며 복원해 놓은 문화재는 도무지 정감이 가지 않는 등 그 사례는 참으로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개발이나 현대생활에의 접목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TV화면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자연 속에 풋풋하고 순수하게 때로는 의연하게 존재해 있는 모습, 자연과 문화와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었으며 그래야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도처에서 전화를 걸어오며 길 안내를 부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도 우리 전북에는 아직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를 깬 야릇하고 험상궂은 모습이 아직은 덜하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자 행복이다.
지리산이나 덕유산 같은 어느 산이라도 그렇고, 도시를 끼고 돌지 않아 오염되지 않은 섬진강이 그렇고, 만경평야 같은 너르고 너른 들녘이 그렇고 외변산 앞의 맑은 서해바다 등 사방을 둘러봐도 거부감이 들지 않는 천혜의 자원들이 그렇듯 모두를 유혹할 만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리 자연과 문화의 순수함은 계량화할 수 없는 큰 자산인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취재카메라에 잡힌 전주천 생태 관련 화면을 보니 수풀 사이로 갈겨니, 칼납자루, 그리고 쉬리 같은 우리 민물고기가 싱싱하게 뛰놀고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전주천을 친환경적으로 조성한 노력의 결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주는 지금 문화영상산업의 수도를 지향하며 전주 문화산업단지 조성사업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고 부안군에는 오픈 세트인 영상테마파크가 만들어지고 있어 변산반도 일대의 빼어 난 자연경관과 함께 우리 지역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히 찾아올 것이고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돈도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의 근간이 되는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친환경적인 모습으로 어떻게 더 잘 가꾸고 보존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자 부담으로 남는다.
오래 전 어느 도시의 시(市)승격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그곳 시장의 느닷없는 도시발전 청사진 발언에 황당해 한 일이 있다. '지금의 전원도시로는 비전이 없다. 높은 굴뚝들이 우람하게 솟아있는 공장들을 유치하여 반드시 소득 높은 잘사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넓은 들녘에 자운영을 심고 수만 마리 나비를 풀어놓아 봄마다 전국 각지에서 수십만의 관광객을 일시에 끌어 모으는데 성공한 젊은 군수가 있었다. 이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활수준이 차츰 나아지게 되고 앞으로 주 5일제 근무가 정착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볼거리와 휴식을 위해 집 밖으로 나서게 될 것이다. 아마 그들의 상당수가 TV와 같은 영상매체의 영향을 받고 행선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 때문이라도 우리의 자연과 문화는 보다 많이 그리고 널리 알려져야 한다. 꼭 인기드라마가 아니더라도 TV의 다른 프로그램 또는 영화, 인터넷 동영상, 홍보비디오, DVD등 다양한 영상매체를 통해 다양한 내용으로 밖으로 소개되는 기회가 자꾸 자꾸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지역경제가 살아난다.
나는 주말마다 즐겨 이 땅의 산천을 찾는다. 때묻지 않은 우리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조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대하며 그것의 전이 방법과 함께 우리 지역의 밝은 미래를 그 길에서 그려보는 것이다.
오태수/KBS 프로듀서로 입사해 <6시 내고향> <한국의 미> <한국의 재발견> <우리문화 유산을 찾아서> <체험! 삶의 현장> <도전 지구탐험대>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답사 취재기를 엮은 『이보다 더 아름다울수는 없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