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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 | [서평]
은미희의 {비둘기집 사람들} 우리 시대의 희망찾기
글/임동확 시인 임동확/1959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과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광(2004-02-19 13:41:57)
몇 년 전이던가. 나는 친하게 지내던 세칭 '90년대 작가'라는 소설가로부터 "쓸 게 없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볼 때, 너무 많은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이 땅은 그야말로 '소설감'들이 널려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영민한 젊은 소설가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으며, 결국엔 소설쓰기를 그만두고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운동권 출신으로 시대와 역사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대면했던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 뒤로부터 이 땅에서 쓰여진 소설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꼭 쓰여져야할 소설'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내 좁은 소견으로 "쓸 게 없다"는 우리 시대에 사랑받는 소설들을 '꼭 쓰여지지 않아도 될 소설'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가 함께 통과해온 쓰라린 저 세월과 삶에 대한 독법에 입각하지 않는 소설들이 왜 이다지도 사랑받는지. 그 와중에서 정작 사랑받아야할 소설들이 얼마나 많이 암매장되고 사라져야 했는지……. 은미희씨의 장편소설 『비둘기집 사람들』은 그와 한 발 비껴선 소설이다. 그러기 때문에 쉽게 눈에 잘 띄지않은, 도시 한구석에 서 있는 허름한 여인숙과 같은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둘기집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 시작된다. 단물 빠진 껌처럼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시공간이야말로 우리소설이 있어야 할 자리다. 우리 시대의 소설들은 지금 사람들과 거리로부터 턱없이 멀어진, '오피스텔'이나 '고층 아파트' 등의 공중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의 소설에 보이는 근거없는 냉소와 허무는 그 부산물이다. 이와 반대로『비둘기집 사람들』은 '밑바닥'에 가까운 수평적이고 평균적인 삶의 세계를 지향한다. 은미희씨의 소설에 나타나는 눈물범벅의 '희망찾기'는 그것들에 대한 눈물겨운 애정의 산물이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추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지요. 늘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봐요." '블루레인'이라는 작은 카페의 여주인인 '암수염 고래'는 고립된 섬의 다방아가씨로까지 내몰린 '청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어쩌면 은미희씨가 이 『비둘기집 사람들』을 낳게 하는 근원적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추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 생각이,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에 대한 버려진 인간들에 대한 끈끈하고 끈질긴 시선을 투사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각 인물들이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부분들의 곧 전체가 되는, 전체주의적인 조합이 아니라 각각의 관점들 안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열적 배열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만큼 『비둘기집 사람들』은 어느 한 부분을 따로 떼어내도 독립된 완결성을 가진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이 소설이 연작형태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점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누가 딱히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이 개별화된 가치와 의미로 복수화되어 있는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적 애정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비둘기집 사람들』은 '청미'와 '성우'가 중심이라면 중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믿고 따르던 애인 '찬경'에 의해 세상끝으로 비유되는 '꽃섬'으로 팔려나간 '청미'에 대한 노점상 '성우'의 순애보랄까. 그들로 상징되는 '절망과 악몽', '희망과 구원'의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들을 통해 "안 오면 죽어버릴" 그 절박한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오빠야? 오빠지? 나야. 청미. 말 좀 해봐. 어떻게 된 거야? 나 이곳에서 더 이상 일 못하겠어. 그러니 나 좀 데려가. 애초에 우리가 얘길 했던 곳은 이런 곳이 아니잖아. 말 좀 해봐." 이렇게 '청미'로 대변되는 사람들은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응답은 자신이 가깝게 믿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청미'의 안중에도 없었던 '성우'로 대변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이다. "애초가 우리가 얘기했던 곳"이 아닌 세상으로 내몰린 자들의 꿈과 희망의 교직(交織) 또는 수놓기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은미희씨는 '작가의 말'을 통해 '그 헛것 때문에 열병을 앓아야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은미희씨가 말하는 '그 헛것'이 실제가 아닌 어떤 허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땅에 마땅히 현현해야하나 '사라지거나 죽거나 부재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믿고 있다. 또 이미 무엇이 자리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무엇이 아닌 어떤 것'에 대한 눈길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그것들에 대한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고 함께 울고자하는 의지가 바로 '그 헛것'의 정체라고 말하고 싶다. 은미희씨의 『비둘기집 사람들』의 탄생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삶의 심해에 여전히 스무살의 '처녀'인 청미가 살아 있다. 그게 모순되고 왜곡되어 보일지라도, 여기 이 땅의 소설에 없는 것들을 보게 하고, 그 '헛것'들 가운데서 있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으로써 '비둘기집'으로 상징되는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들 모두의 경험으로, 지나간 역사적 현실이 지금 여기의 현실로 가시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은미희씨의 작가적 시선과 역량에 우리가 기대를 거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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