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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 | [특집]
예술인, 돈 없으면 꿈꾸지 말라? 경제력과 예술교육의 함수관계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 (2004-02-19 13:34:20)
"안녕하세요. 저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가지고 있는 올해 중2가 될 소년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열심히 피아노 공부를 해서 여러 콩쿨에 나가 수상도 하고 예원학교 시험도 쳐서 합격했었는데 집안 형편이 저에게 피아노 공부를 시켜줄만한 형편이 되지 못해서 지금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지원하면 캠프에 참가하는 것만 무료인지, 아니면 전문 연주자가 될 때까지 지원해 주는지 궁금합니다. 너무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제게 꼭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얼마 전 해외 모 유명 음악인의 이름이 걸린 영재 캠프의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글을 올린 어린 학생의 처지나 진실성은 몇 줄의 글로 증명될 수 없지만, 예술인을 꿈꾸는 아이들과 자신의 자녀가 예술인이 '되기를' 꿈꾸는 학부모들에겐 예사로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다. 이는 또 한국의 예술 교육계가 처한 무시 못할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길"…재능과 투자 사이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경제력 없이 자녀에게 제대로 된 예술 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은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공허하게 들린다. 물론 많은 예술인들과 학자들은 한결같이 "그건 단지 오랜 선입견일 뿐"이라며 "돈으로 해결되는 예술 교육은 부모들의 욕심과 일부 지각없는 예술인들이 만들어낸 거품에 불과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능이나 문화적인 환경, 노력여하에 따라 경우의 변수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또 지역과 서울의 상황이 다르고, 예술교육도 분야에 따라 다르며, 학부모들의 욕심이 어디로 닿아있는지에 따라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변수는 말 그대로 변수일 뿐, 아직까지 예술교육과 경제력의 함수는 '선입견'을 잠재울 만큼 미력하지 않다. 예술인, 돈이 없으면 진정 얻을 수 없는 이름인가. 초등학교 고학년 자녀를 둔 강모씨. 자녀에게 예능을 가르치고 있는 학부모들 중에서 경제적인 능력이나 자녀에게 쏟아붓는 정성만을 놓고 보면 그는 지역내 상위 그룹에 속한다. 외가쪽이 음악가 집안인 탓에, 아이는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게 됐고, 5살 때 이미 바이올린을 손에 잡기 시작했다. 아이가 8살이 되면서 악기를 첼로로 전환했고 다행히 아이에게 재능이 있어 앞으로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도록 지원해 주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다. 서양음악을 가르치는 학부모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이른바 '엘리트 코스'는 대개 서울예중과 서울예고, 그리고 서울대로 이어진다. 누구나 같은 꿈을 꾸지만, 모두 다 이런 '명문 코스'를 밟을 수는 없는 일. 초등학교 아이를 둔 강씨에겐 앞으로 남은 여정이 멀고도 험난하기만 하다. 그는 "어디에서 만족해야할지 모르는 일 아니냐"며 "이 길은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에게 들어가는 교육비가 만만치 않은데다, 아이가 언제까지 어느 만큼의 재능을 발휘해 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강씨의 경우 기본적으로 악기값만 첼로 3천5백에, 활 6백을 합쳐 4천 1백만원이 들어갔고, 각종 콩쿨이며 음악 캠프 참가 비용도 고정적으로 지출된다. 여기에 레슨 시간에 뺏긴 다른 학과 공부를 위해 과외교사까지 따로 두고 있는 형편이다. 또 1주일에 한두번씩은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가기 때문에 순수 레슨비와 교통비, 체류비 등을 합치면 한번 움직이는데 20만원 정도가 고스란히 빠져나간다. 이래저래 아이에게 들어가는 한달치 교육비는 줄잡아 250~300만원 정도. 일반 서민 가정에서는 엄두조차 못 낼 일이지만, 아이가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한 어느 하나 포기하고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음악공부를 하는 아이에게 레슨이나 과외는 필수인데다 콩쿨이나 캠프는 심사위원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어둔다는 의미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내 유명 음악인은 대부분 정해져 있고, 세칭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입상 결과도 중요하지만, 명문대 입시 심사위원들이 대개 비슷한 인물로 한정되어 있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심사위원들에게 자주 얼굴을 내비쳐주는게 아무래도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강씨의 경우는 서울의 유명 대학 교수나 강사를 학생과 묶어주는 이른바 '새끼 선생'은 쓰지 않아 그나마 비용을 절약하고 있다. 강씨처럼 '보이지 않는 길'에 들어선 학부모들은 자녀의 재능과 투자 사이에 적당한 '협상 지점'이 어디인지를 늘상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의 경제력은 협상 지점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는 셈이다. '엘리트 코스'는 한달 학원비 1백만원 국악 역시 엘리트 코스가 정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국악중학교와 국악고등학교, 서울대학교로 이어지는 '대망의 노선'은 한국 사회 입시 교육의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엘리트 코스의 첫 관문인 국악중의 경우만 보더라도 평균 4:1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어야만 선발될 수 있어, 서울엔 이 학교를 대상으로 한 전문 학원이 생겨날 정도. 서울에서 학원 강사로 일했던 한송이(전북대 음악학과 강사)씨는 "국악중은 시창청음(악보를 보고 노래하는 능력이나 피아노 소리를 듣고 음표를 악보에 옮기는 능력)이 중요한 과목인데, 이를 겨냥해 시창청음만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생겨나 학원비만 100만원정도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서울대 들어가기 보다 더 힘들다는 국악중은 비단 서울지역 학부모들에게만 선망의 대상은 아니다. 한씨는 "전주에서도 정보력이 있거나 부모가 국악을 전공한 경우 엘리트 코스가 어느 정도 위력적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초등학교 아이를 재수까지 시켜가면서 그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어한다"고 귀띔한다. 무용교육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북지역의 경우 월평균 학원비는 최소 20만원에서 많게는 40만원정도. 학부모의 '투자 의지'나 가계 사정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기본적으로 작품비나 의상비, 콩쿨 참가비, 개인 레슨비 등을 합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비용이 소요된다. 콩쿨이나 대학입시를 대비한 순수 작품비만 놓고 보더라도 2백~5백만원 정도가 기본이고,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무용가나 교수들에게서 받아오는 작품은 대개 1천만원~1천5백만원 정도의 상한선을 형성하고 있다. 각종 콩쿨이나 입시를 대비해 1년에 최소 한 작품 이상씩은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한다면, 작품비만으로도 적게는 2백만원에서 많게는 기천만원까지 소요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에 의상비나 기타 부대비용까지 합하면 '돈 없으면 예술인을 꿈꾸지 말라'는 말은 그저 속설로만 치부하기 어려워진다.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을 포괄해 의상비는 대개 1백만원에서 2백만원 사이. 전주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는 "한 학생이 1년에 다섯 번에서 많게는 열번까지도 콩쿨에 나가게 되는데, 한 작품만으로, 또 한가지 의상만으로 버틴다는건 학생을 위해서도 결코 발전적이지 않다"며 "문제는 작품비나 의상비가 정해져 있지 않고 천차만별인 점"이라고 지적한다. 그만큼 거품이나 과열경쟁의 폐해가 조장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김모씨는 또 "기천만원을 들여 유명 무용가나 교수에게 작품을 받으려고 기를 쓰는 이유도 그만큼 플러스 알파가 작용하기 때문인데, 인적 라인을 확보하기 위해서나 입시 때 유명 안무가의 이름을 올릴 경우 그만큼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능 교육의 공통적인 현실은 기본적으로 학생의 재능과 소질이 뒷받침돼야 하겠지만, '투자 비용' 만큼 얻게 되는 효과도 확실하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 경제력과 예능 교육의 함수가 엄존해 있는 셈이다. 희망을 말하기엔 경우의 '변수'가 미약하다 그러나 예술 교육 분야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은 존재한다. 다른 분야에 비해 성악과 미술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성악의 경우 타고난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반복 훈련이나 개인 레슨도 무용지물인데다, 사람 사이의 특정 계보나 시험 족보가 적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한 폐해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전북에서 성악 강사로 일하는 조모씨는 "성악은 부모가 만류하는 경우가 많은데다, 특히 남자 지망생은 거의 없어 대학 입시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편"이라며 "최소한 전북지역의 경우엔 계보니 족보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해당사항 없다"고 잘라 말한다. 강사가 중하급 정도의 수준이면 대개 개인 레슨비는 시간당 3만5천원 정도로 책정돼 있고, 전북지역 최고 수준은 시간당 7~10만원 정도. 그러나 서울 유명 강사는 시간당 30만원을 웃도는 레슨비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지역내 서울 선호파들에게는 성악 역시 그렇게 만만한 상황은 아니다. 미술 교육의 경우 사설 학원은 학원비가 각 학원마다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 전북의 경우 한달에 대략 30만원 정도를 받는다. 다만 방학 기간에 석달 학원비를 한꺼번에 내야 하는 규정이 있어 특강비까지 합해 170만원정도의 목돈이 들어가긴 하지만, 개인 레슨도 거의 없는 편이어서 타 예능 장르에 비해 교육비는 적게 들어가는 편이다. 물론 교육계나 예술인들의 자성의 목소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경제력에 의존하지 않고 재능과 노력만으로 길을 스스로 열어가는 학부모나 학생들도 없지 않다. 학원이며 유명 강사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경우의 변수를 일궈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학원 강사나 교수들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와 학원이며 레슨에 엄청난 여력을 쏟아붓는 아이를 비교했을 때, 재능을 가진 아이 쪽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를 경험상으로 많이 보아왔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실력이 엇비슷한 아이들의 경우엔 이야기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북대 강사 한씨는 "실력이 엇비슷한 아이 둘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더 주목받을 수 있겠느냐"며 "경제력이 뒷받침되면 기회도 많고 소위 라인을 잡기도 훨씬 유리해지지 않겠느냐"고 일갈한다. 바로 여기에 경제력이나 투자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희망을 말하기엔 경우의 변수는 아직까지 미약하기만 하다. 결국 예술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학부모들이 경제적인 희생까지 감수하면서 욕심을 부리고, 기를 써가며 엘리트 코스를 고집하는 건 한국 사회의 '대학 간판'이 예술성에 입각한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절대 권좌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란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돈이 없으면 예술인을 꿈꾸지 말라"는 속설은 한국 사회 안에서 여전히 위력적이다. 예능교육의 지향점이 대학 입시로 향해 있는 한, 투자의 범위가 아이의 재능이나 예술적 감성보다는 학부모들의 경제력으로 결정되는 풍토가 계속되는 한, 돈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서울로 향하는 학부모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편에선 재능은 있으되, 돈 문제로 한숨짓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안타까움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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