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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 | [문화저널]
【박남준의 모악일기】 겨울편지를 쓰는 밤
문화저널(2004-02-19 13:28:18)
무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툇마루에 떠다놓은 물이 꽁꽁 얼음이 되는 날들도 있었다. 추위가 일찍 시작되었다는 올 겨울, 그 겨울 밤 문밖에 나서면 쩡쩡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한 푸른 별들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묻던 날들이 있었다. 반문처럼 그 별들에게 보이지 않는 길의 나침반을 묻기도 했었다. 불소시게로 쓰던 소나무 잎들이 다 떨어진지도 벌써 십여 일에 가깝다. 나무청의 나무들은 한 사흘은 버틸 수 있을까. 저녁 일찍 불을 때고 그나마 나무를 아끼느라 장작을 조금만 넣었더니 새벽부터 구들장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새우처럼 잔뜩 웅크린 채 이불을 둘러쓰고 미적거린다. 결국은 일어난다. 날이 꾸무럭거린다. 심상치 않구나. 나무를 조금이라도 해야겠다. 모처럼 마음을 내어 갈퀴와 큰 자루를 찾아 들고 앞산에 올랐다. 노란 소나무 잎들이 어느새 저렇게 수북하게도 떨어져 내렸구나. 슬슬 갈퀴질을 몇 번 하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소나무 잎새들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 녹두 알만한 푸른 열매가 대여섯 개나 보였다. 근처에 이런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들이 없는데 어디서 왔을까. 열매를 손에 들고 살펴보다 조금 흠집을 내어 가만히 냄새를 맡아보니 송진 냄새가 물큰 거린다. 무슨 나무의 열매일까. 향나무나 노간주나무 같은 것들의 속 열매일까. 어떤 새가 이 열매를 먹었겠지. 그리고 여기 와서 실례를 했겠지. 새들의 튼튼한 뱃속에서도 살아남아 여기에 싹을 틔우려는 모양이구나. 그 씨앗들 다시 제자리에 놓아둔다. 나 여기 숲 속에 살며 그간 나무 한 그루 심지 않은 채 나뭇잎들을 긁어가거나 새파랗게 살아있는 나무들을 베어 오지 않았던가. 내 한 몸 따뜻한 잠자리를 얻고자 그 나무들 깜깜한 아궁이 속에 들이밀고 불을 때며 살아왔는데 새들은 나무들에 깃들어 둥지를 짓고 벌레들을 잡아먹으며 이제 또 그 씨앗들을 옮겨서 숲을 키우려 하는구나. 갈퀴를 내려놓고 한동안 우두망찰로 앉아있었다. 해가 뉘엿거린다. 너 뭐하니. 저만큼에서 직박구리가 꾸짖음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그래 나무를 하러 왔었지. 갈퀴나무 한 짐을 해서 서둘러 내려온다. 툇마루에 앉아 담배 한 대 꺼내 들고 불을 당긴다. 뜰 앞에 무성하던 지난여름의 풀들이, 나무들의 낙엽들이 경배를 하듯 낮게 엎드린 채 다시 돌아올 거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나도 그 길을 갈 수 있겠지. 그 무엇에게 인가의 거름이 되어 돌아갈 수 있겠지. 지난 한해 떠돌며 간절하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겉모습에 혹하여 세상의 명리를 구하고자 하였던가. 아니었는가. 마음속에 한 점 어긋남이 없었는가. 하루해가 진다. 새들이 돌아간 겨울 저녁 숲에 적막처럼 어둠이 깃든다. 편지를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을 위하여 올 겨울 길고 긴 편지를 써야겠다. 내가 나에게 써야겠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 어찌 세상의 그리운 것들에게 떳떳할 수 있겠는가. 뉘우침의 편지를 그리움의 편지를 쓰는 그 겨울 밤, 밤새 세상을 하얗게 눈은, 흰눈은 내릴 것이다. 그 눈 길 위에 첫 발자국을 새기며 걸어 편지를 전하러 갈 것이다. 그 발자국을 따라 그리운 것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며 달려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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