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 | [사람과사람]
황혼의 소리꾼에게 찾아온 '어느 좋은 날'
보성판소리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한 이귀례씨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4-02-19 13:25:18)
황혼길에 얻은 '명창'이라는 이름. 늦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찾아든 그 영광 앞에 남은 희망은 희망대로 빛났으되, 30여년의 지난한 소리 인생은 또 그 세월만큼 반짝이는 눈물과 회환으로 빛났다.
지난 11월 10일 열린 보성판소리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쥔 황혼의 소리꾼 이귀례씨(72). 나이 40에 시작한 눈물겨운 소리 인생이 '명창'이라는 이름을 안겨주며 비로소 환하게 화답해 오는 순간이었다. 일흔을 넘긴 그에게 '소리'는 삶을 이끄는 소중한 희망이며, 노년의 그를 청년의 열정으로 되돌리는 힘이다.
진절머리가 나도록 지겹고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어김없이 그를 무서운 스승 앞에, 손주벌의 어린 소리 동료들 앞에 서게 한 건 소리에 대한 집념 하나가 전부였다.
"외롭고 슬플 때도 많았지요. 어느 한 자리에 맘 편히 앉아 쉬지도 놀지도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어요. 그렇게 30년을 넘기고 나니까 질려서 못하겠다 허는 소리를 노상 입에 달고 살면서도 소리를 멀리 떼어버리기가 쉽지가 않았어요. 고생헌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을 허겄습니까. 보성에서 내 이름이 불려질 땐 꿈인지 생신지 멍하더니, 나도 모르게 뜨건 눈물이 주르륵 흐릅디다."
30여년전 거짓말처럼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5남매를 홀로 뒷바라지하면서 늦은 소리 공부를 시작한 그에게 소리는 소리대로, 생활은 생활대로 버겁고 힘겨운 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따뜻이 위로하고 덜어주었던 것 역시 '소리'였다.
"주변에서 목청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늦은 나이에도 시작할 수 있었던건 주변의 그런 격려 때문이었지요. 아이들 가르치고, 소리 공부도 할라니까 경제적으로 힘이 많이 들었어요. 제가 행상으로 아이들 다 키우고 소리 공부도 했습니다. 애들 굶기지 않으려면 뭐든 했어야 했지요. 그래도 곧 죽어 나자빠질 것 같다가도 소리만 하면 힘이 나요. 건강이 좋지가 않은데도 노래하는 순간만은 아프지 않았지요."
눈길에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도 입원실에서 환자들을 모아놓고 소리 한 자락을 신명나게 불러재낀 사람,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소리꾼이다.
행상을 하면서도 길거리에서든 버스 안에서든 그는 늘 웅얼웅얼 소리를 다듬고 목청을 돋웠다. 강도근 명창과 이일주·오정숙 명창에게서 동편제와 동초제 소리를 배우면서 그의 삶 역시 그 가락의 씩씩하고 우렁찬 소리를 닮아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님들이 형편이 어려운걸 아시고 많이 배려해 주셨어요. 그런 선생님들한테 혼이 나면 우선 미안한 마음부터 들지요. 내가 왜 선생님의 소리를 받아내지 못헐까 허면서 많이 속상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30년 남짓 소리 공부를 했는데, 대통령상 한번 못 타고 죽는다면 얼마나 한이 되겄습니까. 여기 저기 대회에 나가서도 결과가 신통찮고 해서 그동안 참 맘고생도 많았어요. 보성 대회도 큰 아들한테만 살짝 말하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얘기도 안꺼냈어요. 또 떨어지면 민망허기도 허고요."
오랜 세월 어머니의 집념을 지켜봐온 5남매는 그에게 큰 후원인이자, 든든한 동반자다. 숱한 '낙마'의 고비에서 좌절할 때마다 변함없이 격려해 주고, 묵묵히 오랜 세월을 지켜봐 주었던 이들이 바로 5남매였기 때문이다. 보성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었을 때에도, 그 보다 더 많은 울음을 울었던 이들이 5남매였다.
"자식도 몰라볼 만큼 소리만 보고 살았는디, 자식들은 대통령상이 별거냐고, 소리는 취미로 한다고 생각하고 건강하게만 사시라고 늘 옆에서 힘을 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절머리가 나도록 고생도 많이 했지만, 후회도 없고 만족헙니다. 죽기 전에는 반드시 영광이 있을 거라고 믿었고, 이제는 내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만큼은 되니까 제자들도 조금씩 받아볼까 생각허고 있습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쩌렁쩌렁 하늘을 찌른다는 그의 소리. 젊은 소리꾼들과 나란히 앉아 배우면서 많은 나이가 부끄러워 이리저리 불편한 자리다툼을 해야했던 그에게 30여년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따라붙은 평이다.
"소리도 잘 나오고 선생님이 옆에서 잘한다 잘 한다 허면 날아가고 싶지요. 때가 되도 배고픈 줄도 모르겄고. 그래도 젊은 사람들 줄 것인디, 내가 나이 많이 먹었다고 주는게 아닌가 싶어서 민망하기도 허지요. 생각 같아서는 한 10년만 젊었어도 참 좋겄어요. 한 60만 먹었어도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제자들도 받을라면 80까지는 살아야 헐텐디... 요즘 젊은 소리꾼들도 고난이 있드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오기를 배웠으면 좋겄어요. 칠십둘에도 이리 좋은날이 오는디..."
황혼의 소리꾼에게 찾아온 '어느 좋은 날'. 늦은 나이에 명창의 반열에 들어선 그에게 그저 '행운'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치열하고도 눈물겨운 한 사람의 세월을 맥없이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리라. 그가 살아낸 세월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까닭이다.
익산 그의 집 방안엔 사람 사는 온기로 가득하다. 손자 녀석들이 무시로 방문을 열어재끼며 "우리 할머니 대통령상 탔어요!"라며 박꽃처럼 환한 웃음을 피워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