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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 | [문화와사람]
13.장수 삶이 빈약해도 자랑은 높다 장수의 역사와 문화
글/황경신 문화저널 기자(2004-02-19 12:13:40)
"울고 왔다 울고 가는 곳"이라는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 장수군에 사는 사람들도 자기 고장을 이렇게 곧잘 이야기한다. 이곳에 오는 대처 사람들이 처음에는 이곳이 너무 외진 산골이어서 겁이 나서 울지만 지내다보면 소박한 인심에 정이 담뿍 들어 떠날 때에는 섭섭해서 운다는 것이다. '무진장' 고원지대 중에서도 장수는 평균 높이 4백30미터로 가장 높다. 이 군의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동쪽에는 덕유산의 힘을 이어받은 장안산이, 서쪽에는 팔공산이, 남쪽에는 대망산이, 북쪽에는 장등산이 우뚝 솟아 있다.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이기 때문에 지금은 잘 닦인 도로가 바깥 고을과의 길을 잇고 있다고 해도 고개들을 넘는 일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북쪽에 있는 무주군에서는 '마의 고개'라는 오조개를 넘어야 하고, 동쪽에 있는 함양군 쪽에서는 육십령을 넘어야 하고, 서쪽에 있는 임실군에서는 비행기재를 넘어야 한다. 전체 넓이 중 80%가 산으로 이루어진 장수군은 그만큼 경지 면적이 좁다. 전라북도에서 군세가 가장 빈약하고 지난 열몇해 사이에 인구가 줄어든 비율이 높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75년에 7만3천명쯤 되던 인구가 1980년의 인구조사에서는 5만7천명쯤으로 줄어들더니 현재는 3만명을 웃돌아 인구가 계속해서 줄고 있어 '울고 가는' 인심 좋은 고장이라고 해도 자리를 잡고 눌러 살기에는 '힘들고 고생스러운' 고장이라는 인상을 씻기가 어렵다. 경상도 사투리가 들리는 곳 장수군은 백제때에는 우평현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에 백제현으로 불리었고, 조선 왕조 때에 장천현으로 고쳐져 남원부의 속현이 되었다. 그러다가 1896년에 장계현을 합쳐서 장수군이 되었다. 이곳의 계내면 명덕리와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육십령은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해서 도둑떼가 많아 육십명이 모여서 넘여야 안전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고새는 삼국 시대에는 무주군에 있는 나제통문과 남원군에 있는 팔령과 더불어 신라와 백제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고, 지금은 장수군과 경상남도 함양군과의 통로이다. 그래서 경상남도 함양군에 가까운 번암면과 계내면의 오동리, 대곡리 지방의 말씨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있다. 이곳의 농산물로는 쌀, 보리와 같은 주곡말고도 누에고치나 담배 재배가 그래도 활발한 축이지만 수익성이 적어 고랭지 채소 재배 등을 하는 농가가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장수사과는 장수의 특산물로 손꼽히지만 그 인기가 좋아 '장수 사람들도 먹기가 힘들다'. 또다른 특산물로는 곱돌 그릇은 육십령 고개 초입에 있는 계내면 명덕리 반송부락에는 수연을 캐내는 광산이 있었는데, 폐광이 된 이후 차돌을 캐내는 광산으로 개발되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 곱돌 그릇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무렵인데 식민지 시대에 가세가 기울자 농사를 지으며 또다른 수익원으로 마을 주민 대개가 곱돌 공장과 연관을 맺고 살게 되었다. 주로 솥, 약탕관, 남비, 화로와 같은 것을 만들었지만 요즘은 불고기판, 촛대, 꽃꽂이 그릇, 절구와 같은 물건들도 만들어내 장수군의 특산물이 되었다. 이 고장 사람들의 상업활동은 읍내보다는 장계면에서 더욱 활발하다. 상설시장이 2개가 있고, 정기시장 네 번 열리는데 장수읍 장수리과 장계면 장계리가 그곳이다. 장수읍은 군의 행정 중심지이지만 배후지가 작아, 배후지가 크고 산간분지상에 발달한 비교적 넓은 평야와 전주, 무주, 남원, 거창 등지로 통하는 교통의 결절지점인 장계의 시장이 장수보다도 규모가 크고 사람들의 활동이 많이 이루어진다. 5일과 10일에 열리는 장수장과 3일과 8일에 열리는 장계장 모두 한약재와 약초의 거래가 주로 이루어지는데, 약초의 활발한 거래가 산세 험한 곳에서의 여유롭지 못한 생활상을 나타내주기도 한다. 좁은 골, 높은 사람 자랑 사는 일이 힘들고 고생스러워 이곳 사람들은 "고려 태조 이래 정치적으로 소외당해온 전라도요 그 전라도에서도 지리적 조건으로 겹치기 소외를 당해온 곳이 장수"라는 말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러나 새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 보다는 자력으로 살아나가는 가능성을 모색해나가는 원동력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청정의 자연과 함께 이 고장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 '2덕(德) 3절(節) 5의(義)'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절의의 고장'이다. 역사적·지리적 배경과 절의의 고장으로 바탕을 이루게 하였던 전라 좌동 인맥(全羅左東人脈)의 뿌리와 그 맥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절의의 고장으로서의 자취를 장수 어느 곳을 가더라도 쉽게 들을 수 있다. 그 중에서 첫째로 내세우는 것이 주 논개의 충절이다. 주 논개는 1574년 계내면 태곡리 주촌 부락에서 주 달문의 딸로 태어났다. 논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외삼촌이 빚을 많이 져서 그를 부자에게 첩으로 팔려고 했다. 그래서 논개가 어머니와 함께 장수 현감인 최경회에서 그 억울함을 호소하자 최경회는 논개를 도와주어 자기 집에 있게 하고 나중에 첩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중 최경회가 진주 병사가 되어 진주성 싸움에서 폐하여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자 그를 따라갔던 논개는 기생으로 꾸며 진주 촉석루 잔치에서 왜장인 게야우라 로꾸스께를 안고 남강에 빠져 그를 따랐다. 그 뒤에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논개의 넋을 기려서 1786년에 추모비를 장수읍에 세우고 1955년에는 의암사라는 절을 세워서 해마다 음력 9월 3일이 되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지금은 생가터를 복원하고 논개 정신 선양회라는 것을 조직해 군민 전체가 어우러지는 논개 제전이라는 군 축제로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논개를 기리는 많은 문화예술활동과 사업들이 장수군을 대표하고 있다. 논개의 충절 다음으로 내세우는 것은 바로 세종때의 명신 황희다. 두 조정을 섬길 수 없다하여 가족들과 유배를 당해 내려온 황희가 후학을 양성하며 충절을 심었다하여 이 지방 사람들이 논개 못지 않게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다. 이밖에도 자랑으로 내세우는 것이 있다면 향교지기 정경손과 천천면 장판리에 있는 타루비에 얽힌 노비의 충절이다. 정경손의 충절로 임진왜란 당시 다른 고을의 향교는 거의 다 불탔는데 장수 향교만이 남게 되었고, 그의 충절을 기려 지금은 '정 충복 경손 수영비'를 세워 전하고 있으며 주인을 따라 죽은 노비 '타루비'의 충절이 가상하다고 하여 비석을 세우고 해마다 장수 현감이 제사를 지내 주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비각만 남아있다. "골이 좁고 생활면에서 빈약해도 삶의 길을 열어주는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인물들이 살아가는 데 삶의 지표들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말처럼 장수 사람들은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약해져 가는 문화의 맥이 아쉽다 장수군의 문화사업은 대개가 절의를 지킨 이 고장의 인물들을 기리는 추모사업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군민의 날 행사와 때를 같이한 논개제전은 장수군의 가장 큰 문화행사다. 논개를 기리는 충절무, 논개 캐릭터 개발과 만화영화 제작, 논개 사당과 생가터 등을 중심으로 한 문화유적지 등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보니 현재 장수에서 현대적인 문화활동을 하는 곳을 찾아보기한 쉽지가 않다. 폐교를 이용한 예술촌 조성 사업과 문화원, 문인협회나 연예인협회의 활동이 고작인데 어떤 연유로건 고향을 떠나는 젊은이들과 특별한 이유없이는 이곳에 들어와 활동을 펼치기가 쉽지 않은 지리적, 생활권적 이유들이 아직까지도 차지하는 면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백두대간이 뻗어내린 태백정간과 노령산맥의 언저리에 자립잡은 이 고장이 그 옛날 백제와 신라의 접경완충지역으로서 백제와 신라의 민속문화가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고 근대에 와서 전라, 충청, 경상권의 문화가 한데 어울어져 있지만 무관심속에 그를 잇는 맥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전라좌도 문화의 뿌리라고도 말하는 이 고장 사람들은 한때 번성했던 좌도농악의 '재기'를 위해 조사작업이나 맥을 이어내려는 노력도 기울였지만 현재는 그것도 중단이 된 상태다. 또한 장수의 35개 마을에서 발견된 탑신앙에 대한 연구나 1백편이 넘는 전설과 설화 등에 대한 연구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더욱 시급함을 갖는 민속문화이다. 그 옛날에는 사람이 쉬이 살수 없을 만큼 도둑떼와 전쟁이 자주 일어났고, 그 험한 산세로 귀향지와 유배지가 되었던 장수. 지금도 넉넉치 않은 생활이지만 전라 좌도 문화의 뿌리로서의 자긍심과 험한 지리적 여건 덕에 후세까지 남게된 많은 인물들은 장수 사람들을 단단히 엮어주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사는 일이 빈약해도 자랑이 높은 이곳 사람들은 그 험한 산세가 청정지역의 푸른 꿈으로, 사라져 가는 민속문화와 역사의 복원과 연구로 인물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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