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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8 | [문화와사람]
폐교에서 길어온 장수 문화의 꿈과 희망 장안 문예촌을 꿈꾸는 사람들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4-02-19 12:05:06)
짙은 녹음이 탐스런 머리칼처럼 층층이 흐드러지고, 여름 뒷산은 병풍을 둘러친 듯 지척에서 학교를 호위하고 있었다. 운동장엔 잡풀이 무성했지만, 그들은 학교 안을 휘휘 둘러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장수군 장계면 장안리 장안초등학교. 폐교된 지 1년 반이 조금 넘은 이 곳에 여섯명의 꿈이 착실히 영글어 가고 있다. 벼루장이 고태봉· 문인숙 부부와 그의 제자 박천생씨, 한학을 연구하는 박수섭씨, 그리고 생활 도자기를 만드는 방호식·유신아 부부. 이들이 인적이 사라진 장안초등학교에 사람 내음을 불어넣고 문화의 향기를 피워갈 장안 문예촌의 주역들이다. 전국적으로 문 닫은 초등학교를 예술촌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대부분 문화예술인들의 창작 공간으로의 개념을 뛰어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안 문예촌은 한껏 '욕심'을 실어 장수 문화의 구심점이자, 전통 문화의 첨병이길 꿈꾸고 있다. 장안 문예촌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자랑은 적극성에 있다. 본인들이 지닌 문화예술적 가치를 안으로만 고집하기 보다는 밖으로 내놓고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나누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머물러가는 관광지로 정착시키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문예촌에서 영리나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조례를 제정한 것도 침체된 장수 문화의 활력을 찾고 관광산업의 돌파구를 찾아보자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문예촌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문방사우'를 통해 장수의 정신과 맥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와 그들 문화에 대한 애정이 우선이다. 문예촌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사업의 골격을 만드는데 앞장서 왔던 벼루장이 고씨에게 장안 문예촌은 각별한 의미이자, 남다른 기대와 희망이 어려 있는 곳이다. "전국적으로 친환경적 개발이 큰 힘을 얻고 있는데, 장수는 하드웨어는 탄탄한데 소프트웨어 개발이 미흡합니다. 장수가 성공할 수 있는 열쇠는 문화예술뿐이라고 생각했죠. 그 가운데 문방사우는 전통문화의 핵이고, 타 지역과 차별화할 수 있는 부분인 동시에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문방사우는 기본적으로 장수만이 갖는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찍이 한학과 서예가 발달했던 장수였고, 그들의 꿈을 품고 있는 장안초등학교는 원래 근수루라는 유명한 사당이 들어서 있던 자리였다. 이들이 유난히 먹과 붓, 벼루, 종이를 아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벼루장이 고씨가 벼루를 깎고, 한학자 박수섭씨는 문화학교를 열어 한학과 전통예절을 가르치면 그들의 뜻에도 안성맞춤인 것이다. 20여년동안 무료로 초등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쳐온 박수섭씨는 '서당식 교육'의 마지막 주자로서 "서당교육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소박한 욕심 하나로 문예촌에 합류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먹과 붓의 장인도 두루 수소문하고 있다. 체험하는 문예촌을 만들기 위해 도자기를 비롯해 목공예, 한지 체험 프로그램도 공을 들이는 부분이다. 보다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문예촌을 만들어 보자는게 이들의 공통된 뜻이기도 해서다. "무주만 해도 반딧불이나 구천동, 스키장이 있어 활기가 느껴지는데 장수는 아직 거쳐가는 곳으로밖에 인식돼 있지 않습니다. 훌륭한 전통문화나 자산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전국적인 명소로 만들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지요." 지금은 지역민들이나 장안리 사람들도 이들의 꿈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해나 걱정어린 시선이 더 많았던게 사실이다. "문화라는게 어디 다리를 세운다든지 하는 일과 같을 수가 있나요?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일이 아니라서 6억이라는 엄청난 예산만 엉뚱한데 쏟아버리는게 아니냐며 걱정들도 많았죠. 힘든 부분도 바로 이점이예요. 문예촌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뭔가 성과가 나타나야 할 테니까요." 그들의 희망과 주위의 기대가 많은 만큼, 자신들에게 주문하는 조건들도 그만큼 까다롭고 엄격하다. 고씨는 뭔가 '중요한 것'이 나와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업을 성공시키려면 무엇보다 사업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 정신적인 가치를 찾지 못하면 그냥 '장사꾼'으로 전락하는 겁니다. 미래를 가늠하고 일궈가지 못한다면 이 사업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죠." 시종 말을 아끼던 고씨가 '정신적 가치'에 힘을 실어 놓는다. 문예촌에서 장수의 전통 문화를 일구고 장수의 정체성과 정신성의 단초를 찾아가겠다는 이들의 다짐이 결코 허투루 들리지 않는 부분이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내 모습을 담아내는 매개가 바로 공예"였다고 말하는 고씨. 그렇게 해서 선택한 벼루장이로서의 삶이 이제는 몇몇 뜻 있는 동료들을 만나 '문예촌'이라는 결실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내년 3월 장안 문예촌이 문을 열고, 바로 앞 5백m 지점에 관광순환도로가 들어서면 잡풀이 무성한 이 곳 장안초등학교에도 새로운 희망과 생명력이 넘실댈 터이다. 그들 말처럼 문예촌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이 있는 한, 성공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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