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8 | [사람과사람]
놀이터 할아버지의 '이것이 인생'
'노로공원' 김갑희씨
글/황경신 문화저널 기자(2004-02-19 11:53:34)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논들 사이로 색색의 우산 지붕들이 솟아 있다.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앞으로는 무럭무럭 자라나는 볏가지들이 에워싸고 있는 저 곳의 모양새는 흡사 동화책 속 풍성하게 그려진 그림들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정읍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이평면 두지리에 자리잡은 아이들의 놀이터 '노로(老路) 공원'. 평범하기 그지 없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이야깃거리가 된데에는 물론 남다른 사연이 깃든 연유에서다. 놀이터 그대로속에 그 이야기가 있고, 또다른 하나는 이 놀이터를 만들고 지키고 있는 김갑희 할아버지(71세) 때문이다.
'노로공원'에는 새 것이나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다. 폐품처리장이나 쓰레기장에 버려졌을 물건들이 새옷을 입고 아이들의 놀이기구로 둔갑을 한 것은 김갑희 할아버지의 솜씨 덕. 손수 물건들을 모아 빨강, 노랑, 파랑으로 페인트칠을 하고 요모조모 손을 본 폐품들은 아이들의 그네로, 미끄럼틀로, 작은 무대로 되살아났다. 연못을 잇는 다리도 할아버지의 솜씨가 깃들어있고, 연못위로 물레방아처럼 물을 뿜어내는 기구도 할아버지가 자전거 바퀴를 가져다 직접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기에 돈주고 산 물건은 하나도 없지. 낡았아도 조금만 손을 보면 모두 쓸만한 물건들을 요즘은 너무 많이 버리잖아. 아이들 위해서 좋은 일 하는 거니 우리 환경도 함께 생각하면 더 좋지 않겠어?"
애초 1천평이 조금 넘는 놀이터 자리는 할아버지의 밭이었다. 시골 아이들에게 아직도 놀이터에서 맘껏 뛰어노는 것은 쉽지 않은 일. 노쇠한 몸으로 밭농사까지 지을 여력이 충분치 않은 할아버지는 고향 마을에 손주 같은 아이들이 뛰어놀만한 놀이터를 만들기로 맘먹고 시작한 일이었다.
소일거리로 조금의 농사를 짓는 시간을 빼면 할아버지는 이곳에 와서 아이들에게 하모니카 연주법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아이들을 무대에 세워 노래 한 자락을 뽑게도 만든다.
"내가 노래를 듣고 싶어서 시키는 게 아니지, 학원 한군데 제대로 못 다니는 애들 자신감을 키우는데 이 무대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남들앞에서 노래도 해보고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고 그러는 거 아녀?"
60가구 정도가 사는 두지리의 아이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열댓명. 하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놀이기구 뿐만이 아니라 원숭이, 공작 등 할아버지가 정성스레 보살피고 있는 '작은 동물원'이기도 한 덕분에 마을 어른들은 물론이고 지나다 들리는 방문객들도 꽤나 된다.
김갑희 할아버지는 이 마을의 토박이다. 칠십 평생을 이곳 두지리의 들고 남을 함께 했다. 밖에서는 '노로공원'의 놀이터 할아버지로 그 이름을 매기고 있지만, 마을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구구절절 살아온 지난 시간이 더 이야깃 거리가 되는 사람. 그 옛 시절 대학에서 임학공부를 한 할아버지는 정읍에서도 알아주는 '엘리트'였다. 어릴 적부터 의사가 꿈이었지만 여러 형편상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김 할아버지는 대학 시절부터 전공 공부보다는 의학공부에 더 관심이 많았다. 스스로 그 어려운 공부를 파헤치기도 하고,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어깨 너머로 배운 의술은 정식 의사까진 못돼도 '보조'를 하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내가 의사가 못된 것이 그렇게 한이 됐었어. 지금 생각하면 참 못된 짓을 한 것도 싶은디, 나땜에 사고 나고 잘못된 것은 없응께. 그래도 병원에서 이일 저일 하던 그때는 참 마음이 불안했지. 그래서 사람들이 말려도 그만뒀어. 더 이상 죄를 지을 순 없는 노릇인게."
그렇게 이루지 못할 꿈을 접은 김 할아버지는 이평면 별정 우체국의 초대 국장자리에 올랐다. 꼼꼼하고 언변이 좋기로 소문이 난 할아버지가 마을에 처음 들어선 우체국의 국장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생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잘나가던' 할아버지의 인생이 우체국 도난 사건으로 사정없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60년대 몇백만원에 달하는 도난금액을 국장인 김 할아버지가 다 책임을 져야 하는 마당에 가세는 쉴 새없이 기울어 갔다. 그 옛날의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은 흥미진진하게 들을 법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직도 눈물을 글썽일 일이다.
"그때 그렇게 되고 나서 자식들이 너무 고생을 했어. 그래도 시골에서는 우체국 국장이면 알아주지 않어,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애들 학비며 밥도 제대로 못 챙겨주는 형편이 됐지. 우리 아들래미는 의대에 두 번이나 합격을 했는디 등록금이 없어서 결국은 대학을 못갔어. 내 꿈을 우리 아들래미가 풀어줄 수도 있었는디 말여."
좁디좁은 이평의 두지리 땅에서 참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다는 김갑희 할아버지. 지금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할아버지는 쉴 새 없었던 젊은 시절과 자식들 뒷바라지 못한 애석함이 큰 탓으로 유독 이곳 '노로공원'에 공을 들인다. 공원의 이름이 '노로(老路)'인 까닭도 한많은 그저 평범한 한 촌로의 인생에 새 길을 찾은 것 때문이다.
"죽을때까정 잘나가는 인생이 몇이나 있단가. 늙어가면서 재미를 찾은 것이, 이것이 내 인생 길인것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