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6 | [문화저널]
【 동학농민혁명 107주년 기념대회 】
한중일 석학들의 갑오년 역사 다시보기
동학농민혁명 국제학술대회 지상중계
글 장세길 문화저널 기자(2004-02-19 11:21:01)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계기와 의의를 한·중·일 석학들이 함께 짚어보는 국제학술대회(6월1일∼2일)는 동학농민혁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뤄진 자리였다.
첫날 기조강연에 나선 정창열 교수(한양대)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발제문에서 "동학농민혁명에서 희생된 수만, 수십만의 영령은 아직도 저승세상에 안착하지 못한 채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며, "한국근현대사의 파란만장의 고비고비에서 살아 남아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들 영령들을 위로하는 진혼(鎭魂)의 역사학을 이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을 오늘에 되살려야 하는 의무가 학자들 손에 쥐어져 있다는 얘기다.
모두 3부로 진행된 이번 학술대회는 정교수의 발제문처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이뤄졌다. 첫날 '동학농민혁명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라는 주제로 열린 제1부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계기를 짚어보는 자리.
김원기 교수(서원대)는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과 동학농민정쟁'이라는 발제문에서 임오군란(1882) 직후부터 동학농민혁명 말기(1894)까지 진행된 청의 '동방정책'이 민중의 저항을 불러온 중요한 계기라고 주장했다. 지금껏 반외세, 반일만 주장되던 보고와 달리 강도의 편차는 있지만 반청에 대한 의식도 동학농민군에게 여러사례를 통해 확인이 된다는 설명이다.
일본 나카쯔카 아키라 명예교수(나라여자대학)는 '갑오농민전쟁과 일본'이라는 발제문에서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최초 무력행사였던 조선왕궁(경복궁) 점령을 둘러싼 진상을 통해 일본의 역사위조와 민중의 항일운동과 그 은폐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일본 후쿠시마현 현립도서관에서 발굴한 '일청전사초안'을 근거로 이 사건이 "일본정부의 의도에 따라 조선주재 일본 공사관이 서울 주둔 일본군과 모의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군사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철저하게 은폐했고, 그것은 국제법상으로도 도저히 정당화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일본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중국 곽위동 교수(북경대)는 동학당의 기의와 이를 둘러싼 한중일 삼국의 외교활동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지연시킬 수는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갑오전쟁을 일으킨 원흉은 일본제국주의라는 것. 그리고 그 화는 오늘에까지 미치며 끊없는 후유증을 낳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학농민군의 이상과 혁명의 성격,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와 동아시아 인권에 대한 토론에 이뤄진 제2부는 주목할만한 내용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일본군의 동학농민 학살'을 발표한 일본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훗카이도대)는 갑오년 당시 일본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5만명 이상 학살됐으며 30여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당시 군사문서를 통해 처음으로 밝혔다. 게다가 일본의 동학농민군 토벌은 조선정부의 허가없이 대량살육한 국제법 위반이며 중요한 것은 이런 국제법 위반이라는 사실은 일본 정부역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 산하 도서관에서 당시 일본군 진압부대의 문서를 대량발굴,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의 주장에 관심이 쏠렸다.
일본의 명백한 침략행위라는 주장은 요시로 요시따께 교수(오키나와 기독교단기대)와 대만출신 유진경 교수(일본 동경경제대학)도 마찬가지. 일본의 군사점령과 일본 제국주의의 오키나와 황민화를 주제로한 발표에서 두 교수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적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대외적 팽창정책으로 조선은 물론 대만과 오키나와 등에 제국주의적 힘을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명맥한 침략행위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김정인 교수(서울대)의 근대적 여성관과 여성운동단체의 활동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됐다는 '동학·동학농민전쟁과 여성'은 동학농민혁명과 여성을 주제로 한 첫 발표문으로 평가받았다. 김교수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 등을 통해 남녀 평등의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으며 전쟁중의 여성의 역할이나 여성교육에 대한 필요성 등도 제시됐다고 주장했다.
'동학농민혁명 인식의 변화와 과제'로 발표한 이진영 학예연구사(정부기록보존소)는 1990년대 이후 민중과 정치권력의 이원적 양상은 상당부분 해소됐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자주근대화를 위한 민중의 혁명운동, 민족민중운동의 원천, 현재에 계승해야 할 정신'으로 대중속에 자리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혁명정신을 계승하는데 다양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과제도 함께 제시했다. '동학과 농민군'을 주제발표한 최원식 교수(인하대)의 동학농민혁명을 문학사적으로 분석한 내용도 색다른 접근방식 중의 하나로 평가됐다.
둘째날에 열린 제3부는 지금까지의 주제발표를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21세기적 의미를 되돌아보고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이뤄졌다.
첫 번째 발제에 나선 중국 왕효추 교수(북경대)는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대규모 농민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혁명과 중국의 태평천국농민혁명을 비교분석했다. 왕교수는 이들 혁명이 역사적으로 각 나라의 근대사에서 최대규모의 농민혁명이었고, 외국세력의 개입으로 폭발력이 강화된데다 반봉건, 반침략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종교를 통한 민중의 혁명이었다는 점, 그리고 결국은 '적'으로 규정한 외세와 봉건세력에 의해 혁명이 꺾이고 말았다는 것도 공통적인 특징으로 꼽았다.
박준성 연구원(역사학 연구소)은 동학농민혁명 기념 조형물이 역사적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면서 황토재와 우금재, 황토현기념관과 고부의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등을 분석했다. 역사적 조형물이 정권을 찬양하거나 정당화하는 행위, 지자체의 업적과시용으로 전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