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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 | [문화와사람]
전라좌도굿의 마지막 상쇠 부들상모의 명인 남원농악보존회 유명철씨
글 장세길 문화저널 기자(2004-02-19 11:13:21)
"정월부터 대가리를 하늘에 대고 고갯짓을 허니 재수가 없지." 친구가 문득 던진 이말에 그는 10년 가까이 꽹과리를 놨다. 그때가 1978년쯤이란다. "지금이야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때는 그랬지. 집에 안좋은 일이 많았는데 모두 나때문인 것 같더라니까." 전국을 누비며 전라좌도굿 상쇠로 이름을 날리던 때였다. 일곱 살 먹은 자식이 '딸딸이'에 치여 아비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지붕위에서 그것을 보던 아들은 놀라 기절하더니 45일이 지나야 정신을 차렸단다. 그러더니 자형이 갑자기 세상을 등지고, 그 이듬해는 동생이 뜬끔없이 병들어 숨을 거두었다. 업친데 덥친격이랄까, 이번엔 친척에게 그때 돈 2천5백만원을 사기당하는 어쩌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 "아, 그래서 친구말처럼 '굿치러 다녀서 그런가보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 그래서 바로 전립을 다 싸서 곡성에 있는 친구놈한테 줘버렸지. 나는 이제 꽹과리 안친다고." 그리곤 그는 '정말' 꽹과리를 놨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전라좌도굿 상쇠 유명철씨(60). 스물살부터 쓰던 전립을 친구에게 주며 "나 이제 꽹과리 안친다"고 말할 때 그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더 이상 그의 상쇠놀음을 보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도 그이 못지 않게 아쉬웠다. 우도농악의 뻣상모와 달리 간들간들 돌아가는 전라좌도굿 상쇠놀음의 백미인 부들상모 놀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명철만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모를 돌며 새가 모이를 쪼는 듯한 '전조시', 살짝살짝 연봉만 돌리는 '연봉돌리기', 상모위에 새가 둥지를 틀 듯 얹혀지는 '또아리 올리기' 등 "좌도 부들상모는 유명철이"라는 말이 나올정도였으니 더 말해 뭐하랴.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원군 금지면 상귀리에서 농사를 짓던 토박이로 아버지는 전국을 휩쓸고 다녔던 전라좌도굿의 상쇠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릴적부터 풍물이 "그냥 좋았다"고 말한다. 소나무를 잘라 머리에 뒤집어 쓰고 끈으로 솔방울을 매달라 상모돌리기를 하던 어릴적엔 동네에서 요샛말로 '짱이었다'고. 본격적으로 꽹과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여섯살 되던 해. 아버지의 제자이자 좌도굿 상쇠였던 강태문 선생을 찾아갔고, 선생은 별다른 말없이 전남 담양 굿판에 그를 데려갔다. "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생 뒤만 따라다니라는 거야. 굿판에서 부쇠를 시켰는데 말이 부쇠지, 다깨진 꽹과리 하나 주더라고.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말야. 그렇게 전국을 오십여일동안 선생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가락을 익혔지." 그러더니 그 이듬해는 '진짜' 소리가 나는 꽹과리를 주었단다. 강태문 선생의 부쇠가 된 것이다. 그렇게 또 한해를 보내면서 그는 동네 아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쳤다. 그리곤 '겁도없이' 내로라하는 굿패들이 모이는 춘향제 전국농악경연대회(1958년)에 참가했다. 기창수 선생의 곡성농악단, 김수동 선생의 진안농악단, 남원 조산농악단, 정읍 정이섭 선생의 농악단 등 당시 전국을 휩쓸던 굿패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열대여섯된 아이들의 소년농악단을 이끌었던 것이다. 특별상은 그의 차지가 됐고, 그의 말대로 이대회를 통해 그는 "어른들의 눈에 찍히게 됐다". 기초가락을 전수해준 강태문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는 곡성의 기창수 선생에게 판굿을, 진안 김수동 선생에게 쇳가락을, 그리고 금산의 최상근 선생에게 장구가락을 물려받으며 전라좌도굿의 상쇠로서의 길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유명철'이라는 이름은 전라좌도굿의 앞자락에 자리잡게 되었고, 5·16이 나던 해에는 제1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1등에 입상하기도 했다. 여성농악단이 득세를 할 때도 그의 상쇠놀음은 언제나 인기가 높았고, 1978년에는 양순용, 이학기, 이수복 등과 함께 임실필봉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농악부문 장원을 차지했다. 물론 그가 상쇠를 잡았다. 그리고 겹겹히 부딪힌 집안의 불운한 일들로 꽹과리를 놓을 때까지 그는 구례농고, 전주농고, 광주농고에서 아이들에게 전라좌도굿을 가르쳤다. 그러던 그가 다시 꽹과리를 잡은 것은 1988년이다. 뜻밖의 일때문이었다. 한 후배가 서울의 한 프로듀서에게 그에 대한 이력을 말했고, 서울 '공간사랑'에 그의 공연일정을 덥썩 잡아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한사코 거절하던 그에게 공연전날 관계자 두명이 찾아오더라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 실린 팜플렛과 하루두번씩 오일동안의 공연티켓이 모두 팔렸다는 소식을 가지고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전립을 보따리채 줬던 곡성 친구에게 가서 치복과 상모를 가져오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갔지만 첫날 4시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고 7시 공연부터 설 수 있었다. 이때 공연에 대해 그는 "가락은 머리속에서 맴맴 도는데 몸뚱이는 저리가는 것 같아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공연에 나선 것은 그로부터 8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다. <전라도의 춤·전라도의 가락> 여섯 번째 무대에 서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꽹과리를 잡았고, 그만이 가진 전라좌도굿의 상쇠놀음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남원굿의 마지막 상쇠, 유명철씨. 남원굿이 요즘들어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고, 시쳇말로 '가장 잘 나간다'는 소리도 듣지만 그에겐 개인적인 찬사는 반갑지 않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단절됐던 남원굿을 이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굿판이 최고라고 할 수 없지. 저마다 특색이 있는 거니까. 남원굿도 남원만이 가지는 전라좌도굿의 특징이 있다고 할까. 그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침체했던 전라좌도굿의 참맛을 많은 이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고. 한참을 쉬었으니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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