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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5 | [정철성의 책꽂이]
꽃잎에 대한 명상
문화저널(2004-02-19 10:34:26)
봄이 또 지나가는 것을 속절없이 바라보고 있다. 두보 시의 한 구절이 이렇게 절절히 와 닿는 것을 보니 세월이 고맙고, 무섭다. 봄꽃이 다 지고 말아 서운함을 달래려고 시집을 뒤적이다가 김용택의 [봄]을 발견했다. 바람 없는 날 저문 산머리에서 산그늘 속을 날아오는 꽃잎을 보았네 희고 고운 몸짓으로 물에 닿으며 물 깊이 눈감는 사랑을 보았네 아아, 나는 인자 눈감고도 가는 환한 물이네 여덟 줄에 불과한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산문시보다 더 긴 이야기를 듣는다. 산머리에 그늘이 지는 시각이라면 대여섯 시는 되었을 게다. 날아오는 꽃잎이 무슨 꽃잎이면 어떠랴만 나는 꼭 산벚꽃이라고 우기고 싶다. 바람이 자는 날, 공중의 계단을 밟아 내려오듯이 천천히 꽃잎이 떨어지는 "희고 고운 몸짓"은 눈송이보다 아름답다. 강물에 몰입하는 순간을 시인은 "물 깊이 눈감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 줄 건너 감탄사 다음에 갑자기 등장하는 "나"는 누구인가?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면 그는 꽃잎이며, 물이며, 꽃잎과 물을 바라보던 사람이다. 눈감은 것은 꽃잎이었고 환해진 것은 물이지만, 눈송이가 강물에 내려간 다음에 둘 사이를 분리할 수 없듯이, 둘은 이미 하나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 바라보던 "나"까지 합세하여 하나가 된다. "나"를 따로 세워 두고 꽃잎과 물이라는 자연물의 짝에 상응하는 인간의 짝을 떠올릴 수도 있으며, 그럴 경우 이 시는 보기보다 훨씬 관능적인 자태를 그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용택 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새로운 몸짓이다. "환한 물"을 보고 비로소 나는 강물이 밤에도 길을 잃지 않고 흘러가는 까닭을 깨달았다. 김용택의 시에서 이런 성찰의 순간을 발견한 것은 기대 이상의 기쁨이었다. 농촌의 마을과 학교를 그려온 그의 시들이 정경을 그리는 데는 능숙하지만 내면의 깊이를 보여주는데는 인색하다고 느껴왔던 나는 이것이 새로운 탐색의 증후일지 모른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봄]이 우연히 이루어진 성취가 아니라는 증거를 나는 같은 시집의 앞쪽에서 찾아 제시하고 싶다. 그것은 [사람들은 왜 모를까]라는 시이다. 이별은 손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여기서 김용택은 한꺼번에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형체를 만들어 가는 이별의 아픔을 꽃이 피어나는 풍경 위에 겹쳐 놓는다. 보라, 꽃들이 고통스럽게 피어나고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이런 슬픔이 [봄]에서는 합일로 돌아간다. 두 시를 하나의 연장선 위에서 함께 비추어 보면 [봄]의 환희가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별이 장애가 되지 못하는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좋은 시에 이렇다 저렇다 말을 덧붙이는 것은 시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시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이다. 그런데 시는 언어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시가 사용하는 언어는 시인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일상언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말로도 우리가 느끼는 것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시의 언어는 최대한 비슷하게 느낄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언어의 앞뒤에, 그리고 위와 아래에 펼쳐진 있는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 비유를 하자면, 낯선 집에 들어가 가구의 배치를 조심스럽게 둘러보고 그 다음에 방문 목적을 떠올리면서 주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과 비슷하다. 주인이 외출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찾아오던지 아니면 연락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 시인은 이 주인을 위하여 집을 지은 사람이다. 시인과 주인이 한 사람일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은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이다. 나는 주인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고 외람스럽게도 그 내용의 일부를 공개한 것이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직접 가서 확인해 보면 아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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