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5 | [문화저널]
【박남준의 모악일기】
봄날은 간다
문화저널(2004-02-19 10:25:37)
진달래꽃이 피어있는 동안 화전놀이다 뭐다 집을 찾는 손님들로 큰일을 치루듯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어느 저녁 무렵 마지막으로 남은 손님들을 앞에 두고 그만 내려가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꾸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내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마음을 좀처럼 다잡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 월요일 저녁, 내가 한학을 가르침 받는 사부님이 강론 중에 들려주신 이야기가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사는 여자가 있었다. 그 과부의 부지런한 살림살이와 몸가짐의 정숙함은 물론이고 언제 어느 때고 집을 찾는 손님들의 대접에도 한결같이 정성을 다한다는 소문이 인근마을에 자자했다. 하루는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작당을 하고 그 과부댁과 면식이 없는 사람들을 택해서 초저녁 무렵부터 한사람 두사람 시간을 두고 차례대로 그 집을 찾게 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정성을 다해 손님을 맞이했으며 그때마다 밥을 지어 소박하지만 정갈한 상을 차려 내왔다. 밤이 깊어간다. 여기저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날 밤 아홉번째의 손님이 그 집을 찾았다. 그것을 본 아들이 부엌에 계시는 어머니께 가서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또 손님이 오셨어요. 아들의 목소리에는 내키지 않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이 없이 밥을 짓고 상을 차려 사랑방에 들여놓고 돌아와 신음성을 흘리며 자리에 누우셨다.
아들이 물었다.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어머니는 대답을 않으신 채 모로 돌아 누우신다. 생전 그런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였다. 한동안을 걱정이 되어 쩔쩔매던 아들이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는가요.
그때서야 어머니가 입을 여신다. 내가 집을 찾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한끼의 식사나마 대접하는 것은 우리 집의 가세가 넉넉해서가 아니었다. 내 비록 몸이 고단하나 아비없는 네가 손님들을 맞이하며 좋은 인연들을 짓고 말벗을 하는 동안 선비의 예를 배우며 익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귀찮게 여겼으니 내가 지금껏 해온 일이 다 부질없고 헛된 일이 되고 말았구나. 어머니는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아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셨던게군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무릇 가정교육이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집안에 어찌 웃음꽃이 피어나지 않겠는가.
한꽃이 지고 한꽃이 피어난다. 툇마루에 앉아 배꽃이 지는 것을 하릴없이 바라본다. 지는 흰꽃잎 속에 봄날의 처절하도록 눈부심이 들어있다. 저 눈부신 것들을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봄날이 간다.
전설
길고 긴 두 줄의 강철 詩를 남겼으랴
기차는, 고향 역을 떠났습니다
하모니카 소리로 떠났습니다
서정춘/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등단 28년 만에 발표하여 문단을 술렁이게 했던, 대숲에 일렁이는 푸른 저녁종소리의 잠언 같은 시집 {죽편}이 있으며 바로 며칠 전 그의 두 번째 시집 {봄, 파르티잔}을 <시와시학사>에서 펴냈다.
주소 : (우) 156-060. 서울 동작구 본동 10-9
전화 : 02-813-0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