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시골 극장에서 영화보기
신귀백(2003-04-07 09:27:09)
같은 영화라 해도 시골은 광고장이들이 도시와 달리 좀 야하게 포스터를 따로 만들어 준단다. 내 거기 산다. 한 때 다섯 개의 극장이 이제 중앙과 현대 둘만 남았는데 고추 그려진 자판기 공간은 '씨네19' 수준인 데다 겨울엔 알아서 보온메리를 두툼히 입어야 한다. 그렇지만 풀비 바르는 아저씨에게 포도 몇 송이 건네면 지나간 영화 포스터를 한아름 안겨 준다거나 어른 표 두 장이면 초등생 둘 데불고 들어가도 눈감아 주는 것이 우리 동네의 인심이다. 뭐 국화가 다른 데 보다 늦게 피는 것도 아니고 눈이 늦게 오시는 것도 아니니, 사람이 하는 짓거리 한 보름 늦는 것은 잘난 내가 못난 나를 달래는 수밖에.
만국기 펄럭이는 추석날, 현대는 성룡을, 중앙은 이미숙을 올렸다. 그런데 세상에 추석 다음 프로가 이럴 수가!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한참 떨어져 있는 두 극장이 조직적으로 짜고서 폭력적으로 <조폭마누라>를 동시에 건 것이다. 이런 폭거는 처음이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지만 분했다. 당연히 <아멜리에>나 <고양이를 부탁해>는 걸리지도 못했다(안 걸릴 게 뻔해 광주·전주 쫓아가 보았다).
차라리 책 한 권을, 하고 뻗다가 마감에 쫓기어 본 게 <킬러들의 수다>다. 재미 있었다. 코메디임에도 불구하고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 셀링 포인트, 어차피 상품으로 만들었을테니까. 어리숙한 경찰하며 적당한 헛점도 있지만 연극 <햄릿>의 죽음에 맞추어 살인을 꾸미는 극중극 솜씨에 속도감, 분위기 등 끝까지 관객의 본전을 책임져 주는 장진은 참된 장사꾼이다.
장르 영화에 빠져드는 이유는 금기에 대한 욕망의 대리만족일 것이다. 그래서 이 수다는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결혼한 선생을 죽이고 싶어하는 철부지와 애인을 살해하려는 앵커 또 마약상 등 군상을 통해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풍자는 약해도 재치는 돋보인다. 스치는 한 마디의 대사나 에피소드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이 씨줄과 날줄의 알레고리로 잘 묶여 관객의 재미에 확실히 봉사를 했다. <롱키스 굿나잇>이나 <니키타>의 여전 가 철저히 훈련된 병기였으나 그 따스한 본성이 문제였듯이 역시 여기서도 울고 웃을 줄 아는 그 뜨껀뜨껀함이 문제를 일으키고 수다를 이끌어 간다. 그 속에서 <세븐>이나 <콘에어> 그밖의 느와르를 흉내내다가도 냅다 비트는데 이는 허무나 환상적 미학 아닌 따뜻함에 기대자는 얘기로 들린다. 신현준이 눈과 어깨에 힘을 빼니 훨씬 보기 좋았고, 처녀애들이 원빈을 왜 좋아하는 지도 알 만했다.
가고 싶은 극장을 참고 참아서(절대 돈이 아까워서는 아니다) 비디오로 <신라의 달밤>을 보니 역시 아니다 싶었는데 <엽기적 그녀>를 보니 웬걸, 내가 아닌 듯 싶었다. 의미있는 영화만 좇으려는 나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는 생각에 이어, 그래 그렇다면, DJ동네가 그리도 잘 못해쳐 먹는가? 이회창은 비전이 있는 정치가인데 나만 유난을 떠는가? 정말 라덴은 나쁜 놈인가? 시골 양반의 고민은 꼬리를 무니, 이 시대 재미와 의미 사이의 중심잡기 정말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