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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5 | [문화와사람]
순창 사람들 고향 순창에서 살고 있는 유일한 소리꾼 유성준의 수궁가 바디 보유자 박복남 명창
황경신 기자 (2004-02-17 16:37:25)
서편제의 시조인 박유전의 고장, 송흥록과 함께 동편제의 또 다른 시조로 불려지는 김세종이 활동했던 고창. 순창은 동편제와 서편제의 고장이라 불리어진다. 그리고 그 맥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는 이가 박복남(75,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43호) 명창이다. 대표적 소리는 유성준 바디의 '수궁가'. 힘있고 거칠면서도 밀고 당기는 소리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그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열두살 되던 해. 명창으로 대성하길 바라던 아버지가 당시 유성준의 제자 소리꾼 박삼룡을 집으로 모셔다가 소리를 배우게 했단다. 그 후 열네살 때 담양 출신의 주광덕으로부터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웠고 장흥에서 이동백을 만나 단가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소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1970년대 전주대사습놀이가 부활되었을 때 출전했지만 탈락한 쓰라림을 맛본 후로는 아예 대회라는 것엔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다시 용기를 낸 것은 1995년. 이미 일흔이 다된 나이였다. 그날 대회에서 다듬어지고 치장된 소리에 식상해 있던 수많은 귀명창들은 그의 소리를 듣고 "어디에 저런 소리가 숨어 있었느냐"며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결과는 결선 탈락. 이듬해인 1996년에도 '새파란' 후배에게 장원을 앗기고 말았다. 안타까움과 설움을 삭이며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판소리대회에 다시 출전, 결국 대통령을 받으면서 그의 소리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한때 순창국악원에서 소리선생으로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내놓은 상태. "그저 쓸만한 제자를 길러 자신이 고스란히 지켜온 유성준의 수궁가 바디를 물려주고 싶을 뿐"이라는 그는 순창에서 나서 순창에서 살고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다. 군정을 감시하는 시민의 눈 순창의 자랑스런 시민운동, '순창지기단' 1997년 11월, 주간 순창신문에 특별한 광고가 게재됐다. 순창군정지기단의 회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지방자치시대에 군정의 문제를 이제 군민의 손으로 이끌어가자는 취지. 이에 52여명의 군민들이 동참했고 12월 1일 창단식을 가짐으로써 순창의 군정을 군민의 눈으로 감시하는 '순창지기단'이 순창에 등장했다. 대도시에서도 '시민없는 시민단체'라며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당에 군세가 열악한 순창에서 시민운동의 맹아를 틔운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 터. 그러나 회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순창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순창군정을 감시·감독하는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로 발돋움했다. "처음엔 자료공개도 안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어요. 그러나 의회를 참관하고 의원간담회를 통해 주민의사도 전달하고 군예산 편성의 문제점과 조례제정 등을 건의하다보니까 이젠 우리들을 제대로 봐주는 것 같아요." 그저 이익단체로만 알고 있던 지자체도 회원들의 공익을 앞세운 활동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는 것이 안욱환 공동대표의 설명.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려움은 여전하다고 말한다. 53여명의 회원이 4년동안 20여명으로 줄어들고, 한의사, 농민, 공무원, 주부 등 다양한 직업군은 활동폭을 늘리기 어렵다는 것이 내부 속사정. 회원들의 후원금만으로 운영하는 재정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다. 더 큰 문제는 군 업무추진비 등 중요사안에 대해선 여전히 자료공개를 꺼리는 지자체의 의식이다. "매달 군정을 알리는 소식지를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보면 이 모든 문제는 해결되리라 봅니다. 군정을 지키는 것은 특정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창군민들 모두의 일이기 때문이죠." 허울좋은 관광사업으로 일관하는 듯한 성황사 복원과 그린투어리즘의 문제점을 꼼꼼히 체크하는 안대표와 회원들의 활동은 "자랑스럽다"는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총장의 말처럼 순창의 자랑스런 시민운동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저 풍물이 좋아서 모였죠' 순창풍물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한소리회' "뭐 이렇다할 목적이 있기 보다는 풍물이 좋고 어깨춤이 좋아서 모였다고 할까요." 그저 풍물이 좋아서 1996년에 창단됐다는 순창풍물패 한소리회는 그러나, 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순창을 대표하는 풍물패로 자리잡게 되었다. 마땅한 장소가 없어 읍내를 벗어나거나 초등학교 강당에서 연습하던 초창기 시절에 비해 요즘은 여기저기서 '출연요청'이 쇄도할 정도라고. 쇠와 장구채를 잡는 한소리회는 학생, 농민, 직장인 등 직업도 다양하고 연령도 다양하다. 그래서 매주 모이는 연습시간도 맞추기 어려울 정도란다. 그러다보니 쇄도하는 출연요청을 모두 들어줄 수 없어 아쉽다고 최효식 회장은 말한다. 하지만 연습할때는 풍물이 좋아서 모인 이들답게 신명을 내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새 실력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농악대회에서 수상하는 것도 한소리회가 결코 친목동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 그들의 가락은 임실 필봉농악. 순창국악원에서 가르치는 남원농악과 달라 '약간의 마찰'도 있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들 가락을 사람들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풍물이 만들어내는 흥과 신명을 순창사람들이 느꼈으면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아직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지만 매년 꾸준히 정월대보름굿을 치고 있고, 각 마을을 돌며 풍물의 신명과 흥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필봉가락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방학기간동안 전수도 계획중이다. 대표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대표하지도 않는다며 최효식 회장은 극구 부인하지만 한소리회는 그들의 신명나는 활동으로 순창을 대표하는 풍물패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장세길 기자 "사라져 가는 역사를 놓칠 수 없다" 향지사(鄕地社) 양상화 회장 어릴 적 보이던 그 많던 고향의 유적과 유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순창'에 대한 기억들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 조차 놓쳐버리고 있던 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찾기 위해 뒤늦게 고향땅을 찾은 향지사(鄕地社) 회장 양상화(70세)씨. 고향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지 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일흔이라는 연로한 나이에도 순창땅 구비구비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열성이다. "임진왜란과 6.25 동란을 겪으면서 순창의 많은 유적은 거의 손실됐습니다. 남아있는 유적들은 복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내려오는 역사와 전설들이 일제시대를 넘어오면서 많이 왜곡된 채로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간 순창의 모습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록작업에 나서게 됐습니다." 향지사와 양회장은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순창의 지명찾기에 나섰다. 3년의 답사 작업과 집필기간을 거쳐 완성된 책에는 순창의 문화와 사람이 오롯이 담겨있다. 단순히 지명과 지명의 유래만을 기록한 것이 아닌, 지명을 통해 그곳의 문화를 읽어보는 일과 지명과 문화 모두 사람이 일구어낸다는 생각에 토착 성씨를 찾아내는 작업까지 보태졌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두 번째 작업으로는 순창의 물과 산을 천천히 따르고, 거슬러 올라 남아있는 문화유적과 유물들을 꼼꼼히 담아낼 예정이다. 물론 양회장 혼자의 힘으로는 부치는 일. 향지사는 각 면마다 편집위원을 두고 자료를 수집하고, 활동하고 있다. 마을 구석구석을 잘아는 각 면의 편집위원들이 낚아내는 정보는 그래서 더욱 생생할 수 밖에 없다. 빼곡히 들어선 답사일정을 숨가쁘게만은 여기지 않고 노후를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위해 '저당' 잡혀 놓았지만 그런 양상화씨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기껏해야 지금은 금석문자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순창의 많은 유적들은 흔적을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순창에만 남아있는 '가마탑'의 왜곡된 전설을 바로 잡고, 인계 세종마을의 석룡사 석탑의 작은 흔적이라도 하루가 늦기 전에 담아둬야 한다. 애써 옛 자료들과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곳의 유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고, 그저 구전으로밖에는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애석함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그는 향지사와 자신의 일을 더욱 미룰 수가 없다. 언젠가는 그 구전으로 전해오는 순창의 크고 작은 역사마저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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