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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 | [문화시평]
전주시립극단 <하늘잡고 별따세>
김정수 연출가(2003-04-07 09:25:08)
20세기 최고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의 일화 한 토막. 그가 유럽 여행 중 어느 도시에 들렀을 때라고 한다. 아마 그 도시에서 축제라도 열렸었나 보다. 그런데 그 곳에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호기심에 채플린은 참가 신청을 했다. 물론 본인임을 숨기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였고…. 수 십 명의 참가자가 열 띤 경합을 벌인 끝에 입상자 발표가 있었다. 채플린의 성적은 동상, 즉 3등이었다. 채플린 자신보다 훨씬 더 채플린 같은 사람이 두 명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이 간단한 일화는 일화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연극이 가지고 있는 극적 리얼리티에 관한 많은 생각들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전주 월드컵경기장 개장을 축하하기 위해 시립극단에서 특별히 제작한 풍물 뮤지컬 <하늘잡고 별 따세>를 보면서 갑자기 생각난 채플린의 일화가 왜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일까? 아마 일차적으로는 극 중 주인공역에 실존인물이 출연하는 공연방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이 작품에서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 작품은 공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지역 역대 최고의 제작비를 지원받은 데다가 여성농악단 원로단원, 각 민간 풍물단체가 가세하여 지역을 대표할 대규모 무대를 꾸밀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지나치게 컸던 탓일까? 정작 작품은 실망스럽게도 기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공연이 갖는 의의를 생각할 때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지향하는 바 목표에 충실한 공연이었나, 그리고 자체의 완성도는 충분히 높은 것이었나 하는 문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행히도 두 가지 중 그 어느 것도 만족시키지 못한 공연이었다. 우선 여성농악단의 고난과 부활이 전북의 대표성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하자. 단언컨데 농악이 우리 지역의 대표적 전통연희임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전라도 고을고을마다 울려왔던 우리 농악의 대표성을 여성농악단에 부여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볼 문제다. 그 것까지 그렇다 하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일정한 상업적 전선에 나섰던 이 농악단에 대한 향수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던져줄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심히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국악의 교육과 예술적 실험이 활발한 상황에서 농악단 부활의 문제는 주인공의 소박한 사적 희망일 뿐이라는 인상만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겪은 다양한 체험, 시대와 예술이 부딪혀 낳은 크고 작은 그림자, 사적 고뇌와 숙명적 상황 등은 얼마든지 좋은 극적 소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이 극이 그런 부분에서 욕심을 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 선녀의 전통에 관한 집요한 예술혼도, 유화의 인생유전과 그 딸의 관계도, 전통음악의 현대적 계승과 그에 따른 갈등의 문제도,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전통예술의 모습도, 예술과 사랑 사이의 갈등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제답게 포착되어 깊이를 더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 표류하고 말았다. 오로지 긴 시간의 공연 끝에는 귓가에 소음처럼 들렸던 풍물소리만 남아 있다. 그랬다. 가장 큰 원인은 농악에 있었다. 뮤지컬은 극이다. 설사 완성도 높은 농악단의 공연이 있다 해도 그건 농악일 뿐이지 연극이 아니다. 연출은 이 작품이 복고풍의 버라이어티 쑈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연극이 아닌 하나의 쑈로 즐기려 해도 전혀 버라이어티하지 않았다. 참여자의 흥이 반을 차지하는 농악을 서구화된 무대에 박제처럼 나열하는 일은 오히려 농악의 참 맛까지 식상함으로 바꿔버렸다. 한마디로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뮤지컬인지, 쑈인지, 농악공연인지…. 물론 하나의 공연이 꼭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전제는 없다. 새로운 양식은 언제나 환영받아야 마땅한 창의력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작품은 새로운 양식으로 정의되어야 하는 것일까? 농악을 위해서, 농악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 정작 농악이 방해를 하고 있는 이 답답한 상황은 또 어떻게 이해를 할 것인가? 기본적으로 탈출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열린 공간에서 공연되었으면 좋았겠다 생각된 이 극은 극장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객석까지 두루 활용하는 도입부를 마련했다. 단연 관객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고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또한 주인공의 직접 출현이 설명되어지는 극적 주인공과 실제주인공의 대화부분도 참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도입부의 연출은 마치 잔잔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해서 편안하면서도 뿌듯한 느낌을 주었다. 극 곳곳에서 그런 미덕들은 발견되었다. 나무를 활용한 상황 설정이라든가, 장시간을 간편하게 설명해내는 로울러 피켓 보이의 활용 등은 극적 재미를 주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런 극적 재미들이 하나로 응집될 수 있는 기본적인 그릇이 약했다. 농악판으로서도 걸죽하지 못했던 것 만큼이나 극적인 구성 역시 허술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에피소드 나열식 드라마를 지향하더라도 기본적인 이야기의 연결고리는 있어야 했으며 그 부분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야 했다. 관객들은 선녀와 유화가 원래 어떤 사이인지, 단장이 선녀의 남편인지, 신들려 무속인이 되면 왜 선녀의 적이 되는지, 손녀딸의 음악은 왜 선녀를 향한 배신이 되는지를 전혀 설명받지 못했다. 한편, 실험적 음악을 함께 보여주겠다던 관현악단은 장장 2시간 40분이 넘는 공연시간 내내 몇곡을 반주하는데 그쳤고, 선녀의 손녀 유리와 함께 하는 그들의 음악 역시 이미 이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공연되어온 음악이었다. 홍보문안을 보고 농악단과 관현악단이 함께하는 특별한 협연을 기대했던 사람으로서는 단단히 찬물을 뒤집어 쓴 격이었다. 무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분히 상징적인 무대로부터 펄럭이는 태극기를 사진처럼 그린극사실주의 무대까지, 일단 버라이어티하긴 한데, 무대미술이라 부르기 힘들만큼의 세트들이 튀어나오는 일은 차라리 참담한 심정이 들기까지 했다. 제 아무리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극이라 할지라도 극은 극이다. 극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허구적 경험이다. 역사적 사실과 극적 진실과는 그 궤가 같지만 표출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기에 이 작품에 기량적 역할에 제한했다 하더라도, 본인이 직접 출연하여 감정과잉의 연기를 하는 일은 보는 이에게 대단히 불편함을 주었다. 월드컵맞이 축제성 공연을 위해 마련된 예산이, 본인이 원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마치 주인공 한 명의 소원풀이를 위해 쓰여진 것 같다는 찜찜한 기분이 영 가시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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