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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 | [문화저널]
【박남준의 모악일기】 푸른 종소리를 가진 돈
문화저널(2004-02-17 15:08:07)
마당 앞에 꽃들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황금빛 복수초꽃이 피어나더니 그 뒤를 이어 흰빛과 연분홍빛 노루귀 꽃이 낙엽사이를 비집으며 그 작고 앙증맞은 꽃을 피워 올렸다. 지난겨울 추위에 갇혀 방안에서만 뒹굴던 날들은 얼마나 답답했던가. 오늘은 무슨 꽃이 피어날까. 햇볕 바른 날 요즈음은 하루종일 마당 앞에 나가 그 꽃들과 꽃향기를 찾아 날아온 나비와 벌들을 바라보느라 몸과 마음을 다 빼앗긴다. 어제 밤에는 주로 여름철새로 알려진 호랑지빠귀가 벌써 집 주변에 날아와 나 다시 찾아 왔어요. 변함없는 내 노래 소리를 어디 한번 들어보세요 하며 노래를 들려주었다. 따뜻한 봄날 사는 일이 이만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이 갈수록 살풍경해지며 각박해져 간다고 하지만 아직 이 세상에는 콩 한톨, 쌀 한줌을 가진 삶을 살면서도 기꺼이 마음을 다하여 콩 한톨과 쌀 한줌을 세상 속에 내놓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그 콩 한톨과 쌀 한줌의 소중한 사랑이 어찌 저 기름진 음식으로 배부르고 가진 자들의 돈과 황금덩어리에 비교될 수 있으랴. 평생을 구도자의 삶으로 작은 교회의 종지기로 살아가는 어떤 가난한 노인의 집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그분의 집에서 묵고 떠나가는 날이었다. 그분은 찾아온 이가 떠나는 날 버스를 타는 곳까지 따라나오시고자 했다. 그만 들어가세요. 한사코 만류하는 그에게 그럼 조금만 더가면 당신이 차를 타는 곳까지 가는 길의 반이니 거기에서 돌아가겠네. 거기까지 왔다. 그분은 주머니에서 무얼 한 주먹 꺼낸다. 동전소리가 났다. 있으면 더 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라고는 이것뿐이네. 여비에 보태 쓰시게. 팔백원이라고 했던가. 그분이 건네주는 동전 한줌을 넣고 헤어져 가는 길 주머니 속에서 뗑그랑거리는 동전소리가 그 분이 평생을 그렇게 사시고자 했던, 그러나 교회에서 종소리를 녹음기의 차임벨로 바꿔버리는 통에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푸른 종소리로 그 사람의 가슴에 그렇게 눈물나도록 벅차게 울려왔다고 한다. 그 푸른 종소리가 나는 백원짜리 동전들은 지금쯤 어디 어느 누구의 손길을 거쳐가고 있을까. 버스 비를 받은 운전사 아저씨의 손길을 거쳐, 알사탕을 사러온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거쳐서, 무얼 사야할까. 만원짜리 한 장 들고 나와도 이젠 반찬거리 사들고 갈 것이 없다. 아이고 뭐가 그렇게 비싸요. 백원만 더 깎아줘요. 알사탕을 팔던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이 땅의 어머니들이 시장에 가서 사오는 고등어 한 마리, 콩나물 한봉지의 거스름돈을 거쳐, 그 입씨름을 거쳐 깎아낸 동전 한 닢이 하모니카를 부는 지하철 안 맹인 악사의 낡은 바구니 속을 거쳐, 불우이웃 돕기에 그 동안 용돈을 아끼며 모아온 아이들의 돼지저금통을 거쳐 지금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문밖에 봄볕이 눈부시다. 이부자리를 걷고 방바닥을 쓸어야지. 딸그랑 내가 흘려놓은 것이었나. 방바닥을 뒹구는 동전 두 개. 나는 문득 동전을 집어들고 귓가에 가져가 본다. 이것일지도 몰라. 푸른 종소리가 들리는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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