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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 | [문화저널]
【전북의 땅과 문화, 사람들】9. 정읍 다양한 생활문화, 삶의 윤기를 더한다 정읍의 현대문화
글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4-02-17 14:54:03)
입춘과 경칩을 넘기고서도 정읍 천변은 희끗희끗 찬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천변을 따라 아치형으로 이어진 벚꽃길은 상춘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인구 15만의 정읍은 1995년 도농통폐합 정책에 따라 정주시와 정읍군이 합해진 전라북도의 소도시이다. 전주와는 불과 자동차로 1시간 남짓한 곳에 위치해 있어 생활·문화적 영향이 적지않은 곳이지만, 이 지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 자긍심은 그 뿌리부터가 견고하다. 그것은 정읍이 간직한 간단치 않은 지역사가 그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백제여인의 정한을 깊이 새겨놓으며 한국 문학사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정읍사'와 저항정신의 표상으로 자리잡은 동학농민혁명 등은 정읍 사람들의 자랑이자, 정신적 토양과 공통의 정서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여기에 부안에서 시작된 평야가 정읍을 기점으로 산악지형으로 바뀌는 인문지리적 환경은 정읍 사람들의 기질과 성품을 파악하는 단초가 되어준다. "정읍 사람들은 까다롭고 강단이 있다"는 '설'은 이미 정읍 사람들까지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인데, 정읍의 지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정읍의 정체성을 바로 이 '강단있는 성품'이 발휘된 '저항정신'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정읍(井邑)'이 갖고 있는 지명의 유래에서도 이같은 기질을 보다 확실히 규정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정읍은 예로부터 눈이 많아 샘이 흔할뿐더러 물맛 또한 좋았다고 하는데, 이 물이 갖는 의미가 범상치 않다. 물은 만물 생육을 의미하는 '생명성'을 상징하지만, 이에 반해 강한 파괴력을 동시에 갖고 있어 '차면 이내 흘러 넘쳐' 새로운 국면을 도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역사 연구자인 김재영 교사(정주고)는 전봉준을 필두로 한 동학의 저항정신을 이같은 지명을 통해서도 풀이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내력이야 어찌됐든 정읍의 저항정신을 대표하는 동학혁명과 백제가요의 진수로 칭송받는 '정읍사'는 정읍 사람들이 내세우는 문화적 자긍심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정읍문화의 중요한 화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문화적 자긍심이 높을수록 현대에 이르러 정읍이 겪고 있는 문화적 침체에 대한 정읍 사람들의 안타까움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오페라나 연극, 영화 등 이른바 '세련'되고 '현대적인' 문화 향수와 인프라는 척박하기만 하고, 그것을 향유할 주체들에게는 "기회도 없고 욕구도 없다"는게 이 지역 문화 주도층들의 전언이다. 그러나 지역문화의 판도를 가늠하는 데에는 다양한 잣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최근 시민들과 청소년들 사이에 활성화되고 있는 생활 문화의 확산은 주목할만한 현상으로 비쳐진다. 특히 지역 인구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 전북의 타 소도시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아이들 교육이나 문화적 활성화가 쉽지 않은 상황에도 시민들의 자원봉사 활동과 문화의집, 여성회관 등은 타 도시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도 웹사이트 운영과 신문 제작, 만화·댄스 동아리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욕구가 표출되고 있다. 특히 자원봉사 활동은 지난해부터 여성과 청소년, 종교인들 사이에 '붐'이 형성될 만큼 각계로 확산되고 있어 정읍만의 독특한 문화현상으로 비쳐지고 있다. 지난해 YMCA에서 개관한 청소년수련관이 문을 열면서 청소년들의 봉사활동도 활기를 띠고 있다. 정읍신문 박하정 기자는 "월드비전이라는 복지사업기구가 정읍을 비롯해 전국 4개 도시에서 활동중인데, 주부나 학생들의 호응이 매우 높다"며 "매일 4백개의 도시락을 싸서 홀로사는 노인들을 찾아가며, 배영고 댄스동아리인 ZAG를 비롯한 청소년 동아리 회원들도 공연을 열어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을 찾거나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아 '춤추는 아이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도 많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전북에서는 최초로 문을 연 정읍 문화의집(96년 12월 개관)은 생활 속의 문화 향유 기회를 확대시킴으로써 99년 '우수 문화의집'으로 선정될 만큼 프로그램과 시민 호응이 알차게 맞물려가고 있다. 도서관과 문화관람실, 영상감상실(음악, 컴퓨터 교육장) 등으로 꾸며진 문화의 집은 하루 이용객 120여명 정도로 시민들의 문화체험공간으로 정착해가고 있다. 정읍시에서 운영하는 여성회관 역시 타 지역과는 대별되는 특색사업으로 꾸준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정읍시 인구의 10%를 육박하는 60세이상의 여성 노인 인구를 껴안은 '꿀벌 할머니집'은 92년부터 시작해 매 분기별 170여명의 회원을 꾸준히 확보해 가고 있다. 97년부터 운영된 '이동 여성회관'은 스포츠댄스와 생활요리 등의 프로그램을 꾸리고 문화 향유 기회를 면 단위로 확대함으로써 도농통합에 따른 문화적 불균형을 해소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 두 기관이 갖는 고유 기능도 기능이거니와, 무엇보다 여성회관과 문화의집은 시민들의 문화 의식을 높이는 구심체로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들이 배출해낸 수강생들 사이엔 서예나 문예창작, 수채화, 생활일어 등의 동아리반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등 문화 인구의 확장을 가능케 하고 있다. 정읍 여성회관과 문화의집은 이같은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과 공무원들의 성의있는 운영으로 전북지역에서는 모범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주부들을 중심으로 한 생활문화적 기반은 탄탄한데 반해 현대 공연물과 전시에 대한 관심도와 향유 욕구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형편이다. 정읍시에서 운영하는 농악단과 교향악단, 합창단 등 세 개의 시립예술단 가운데에서도 교향악단은 학생 동원 등을 합해 평균 관객점유율 70% 정도를 밑돌 만큼 '고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시립예술단이 대부분 무료공연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공연물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도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수요가 적기 때문에 공급 또한 많지 않다. 그나마 정읍 신문사에서 꾸준히 뮤지컬과 연극, 클래식 공연 등을 유치하고 있지만 93년 뮤지컬 <넌센스>를 제외하곤 대부분 '기대치'를 채워주지 못했다. 전시는 더욱 척박한 상황이어서 뜻있는 향토 작가들이 전시회를 기획해 놓고도, 관객 반응 때문에 적잖이 실망하고 돌아가는 형편이다. '공공성'과 문화수요 창출을 위해 정읍시가 내놓은 문화정책은 '정읍사'와 '동학'이라는 큰 줄기를 포함해 문화단체 육성과 예술활동의 확대를 위한 재정적 지원과 기회제공 등으로 모아진다. 매해 단풍철인 10월과 11월 사이에 열리는 정읍사문화제와 내장산 단풍축제는 정읍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꼽힌다. 축제기간에는 각 문화협회와 시립예술단, 시민들이 참여해 각종 민속행사와 문화예술행사를 치르고 있는데, 올해에는 특별히 '움직이는 미술관'과 '푸른 음악회' 등의 공연전시물이 기획돼 있다. '움직이는 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자치단체를 순회하며 한국화와 양화, 조각, 판화 등을 선보이는데 정읍은 지역작가의 작품을 포함해 총 80여점이 전시된다. '푸른 음악회'는 서울 팝스오케스트라를 초청해 수준높은 클래식 공연의 향유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취지로 계획됐다. 최근 정읍시는 동학계승 사업의 하나로 전봉준 장군 영화제작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일반극장용 장편 극영화로 순수제작비 20억원이 투여되는 이번 사업은 영화제작사 (주)뮈토스 필름(10억)과 전라북도(8억) 및 정읍시(2억)가 야심차게 준비한 동학계승 작업이다. 현재 시나리오 작성과 감독 등을 선정하고 있는 가운데 오는 10월 제작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정읍시는 이번 영화제작을 기회로 영화수익을 통한 재정확충과 촬영세트장의 관광상품화 등을 부대 효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고증과 영화적 픽션이 어느 정도의 균형을 맞춰 제작될 것인지와 제작사가 당초의 약속대로 제대로 사업비를 투자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정읍 시민들의 우려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어서 신중한 접근과 계획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요의 진수로 꼽히는 '정읍사'에 대한 계승작업은 시민들의 높은 자긍심에 비해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예술회관 앞에 세워진 백제여인 동상 이외에는 '정읍사'를 알릴만한 프로그램이 전혀 없다는 점부터가 그러하다. 정읍시에서는 연차적으로 전봉준 장군과 정읍사 여인의 일대기를 조각 작품으로 남기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지만 정읍과 '정읍사'를 연계해내는 보다 적극적인 '이미지화' 작업이 아쉬운 부분이다. 정읍사와 정극인의 상춘곡이 잉태된 땅이자, 황톳재를 더욱 붉게 물들였던 동학농민혁명의 고장.정읍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오늘에 잇고, 지역 주민의 문화 향수를 삶의 일부로 정착해내는 두 가지 중요한 과제를 앞두고 새 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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