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 | [문화칼럼]
활자와 영상
글 고규진 전북대 교수·유럽어문학부
gjgo@moak.chonbuk.ac.kr
고규진 (2004-02-17 14:32:41)
"우리가 지난 시대의 고전적인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들은 우리의 문화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항상 끝이자 시작이다."
상업적인 대중문화를 비평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자 근래에 창간된 어떤 계간지의 의욕에 넘친 창간사 중의 일부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신감으로 무장된 이 비장한 선언이 왠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가을동화>같은 텔레비전 연속극의 신드롬에 동참하지 못하고, 최신 영화나 비디오 얘기만 나오면 모르쇠로 일관하다 왕따를 당하다보니 어느새 그만큼 삐딱한 콤플렉스가 자리잡은 것일까? 하기야 은서와 준서의 그 지고하고 순수한 운명적 사랑을 그린 연속극의 제목을 언급해야할 때마다 불경스럽게도 저 괴팍하고 반항적인 독일의 정치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장편 운문 서사시의 제목 '(독일) 겨울 동화'를 들이대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상업적인 대중문화, 특히 영상문화를 바라ㅏ보는 시각은 참으로 다양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술로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의 예술작품』은 영상매체를 읽어내는 방식이 활자매체에 익숙한 사람들의 구미에 들어맞는 '지난 시대의 고전적인 교과서'의 하나이다. 1936년에 나온 이 에세이에서 벤야민은 기술을 수단으로 예술의 대량 복제가 가능해진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예술작품이 아우라(Aura) - 예술작품의 권위와 진가(眞價), 일회성과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성격 - 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그는 영화를 '대중운동의 대리인'이라고 지칭하면서 영화야말로 예술작품의 역사적 의미가 엄청나게 동요되는 장소임을 밝힌바 있다. '전통적 가치들을 해체하는 것'을 그는 영화의 '카타르시스적인 측면'으로 파악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카타르시스는 역사의 파괴이며, 영화의 심리적 작용은 아우라를 상실하는 대가로 획득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아우라의 파괴여부를 벤야민은 매체의 특성을 분석하는 준거로 삼아, 복제가 용이한 예술일수록 이 예술형식은 더 효과적인 작용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드라마 예술과 영화를 비교해보면 쉽게 확인된다. 영화관의 관객과 영화애호가는 더 늘어나는 반면, 연극이 공연되는 극장의 객석은 갈수록 비어가는 것이다. 영화는 복제가 가장 용이하기 때문에 가장 효과가 큰 예술형식이다. 반세기 전의 벤야민의 진단을 오늘날에 적용해 보면 TV나 TV 드라마가 가장 효과적인 예술 형식의 자리를 점했다고 할 수 있다. 광적인 드라마 애호가들은 <가을 동화>의 재방송을 보고도 모자라 녹화까지 해놓는다.
벤야민이 미학적 성찰을 비판적 사회이론과 연계시킨 것은 위기의 징후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벤야민에게는 무엇이 위기로 여겨졌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화면을 이용하는 매체들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경험을 갖지 못한 시청자들에게는 현실을 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또한 TV속 드라마는 우리를 더 오랜 시간동안 화면 앞에 붙잡아두기 위해 보편적으로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문제들을 테마로 선택하는 친절을 베푼다. 그럼으로써 개개인의 고유하고 직접적인 경험들조차도 매체가 제공하는 현실상이나 현실해석에 의하여 지배되는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 뿐인가. 화면에서는 현실 경험의 직접성은 사라지고 영상의 테러만 존재한다. 영상의 테러는 시뮬레이션의 테러이다. 우리에게는 대용품으로서의 현실이 제공된다. 매체를 통해 제공되는 현실은 현실의 고유한 경험에 대한 대용품이다. 우리는 쉴새없이 매체적 현실을 통해 기쁨과 슬픔, 연민과 분노를 흉내내기를 강요받는다. 이러한 시뮬레이션의 벽은 고유한 생활세계로서 경험되어야만 하는 것으로부터 계속해서 소외된다는 것의 증표이다. 오른손에는 TV 리모콘을, 왼손에는 과자 봉지를 들고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앉아 TV 드러마나 블록버스터 영화에 빠져 있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해 보자. 매체들은 우리를 탈집단화하고 우리를 단자로 만듦으로써 현실로부터 우리를 격리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자로서 영상들을 여과 없이 수용하는 것은 영상의 지배에 노예가 되는 것을 자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배트맨을 흉내내려고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다 목숨을 빼앗긴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영화나 인터넷 화면을 통해 각인된 살인의 영상을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에 비한다면 그래도 괜찮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TV에 의해 구성된 현실은 이미 우리 삶의 중요한 구성 성분이 되어 버렸다. TV에서 보여주는 현실과 우리의 실제 세계를 구분하고, 우리의 실제 세계를 기준으로 TV에서 보여주는 가상 현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의 사회학과정에서 이미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TV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TV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관조하거나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의 입지가 점점 더 좁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느릿느릿한 몸짓을 지닌 문학은 재빠르게 움직이는 영상들과 비교해 본다면 거의 원시시대의 제식(祭式)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화면이 현대 정보사회의 가장 큰 징후라면 문학은 영상의 지배를 거부하는 형식을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학은 영상의 폭력을 거부함으로써 이미지의 지배를 근간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모든 것에 대한 위협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문학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현실해석의 자유와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영상의 독재의 시대에 '독서하는 아이' 제 2의 앨리아스 카네티를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페인어가 모국어였지만 10살의 나이로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프랑스어 원서로 읽고 11살에는 스트린트베리를 읽었으며 그러한 독서에 대한 보답으로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게된, 활자매체를 통한 사회화의 전범, 엘리아스 카테티 같은 작가를 오늘날의 아이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