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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 | [문화저널]
【추모기획】故 심천(心泉) 이강오 선생을 추모하며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이강오
글.오병무 순천대 교수. 철학과 (2004-02-17 14:25:20)
한국신흥종교사를 정립한 ‘동양철학의 대가’ ,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 , ‘한국향토사 정립에 큰 족적을 남긴 사학자’ , ‘수많은 제자들의 큰 스승’ , 10월 25일 작고한 심천(心泉) 이강오(李康五) 전북대학교 명예교수를 일컫는 말들이다. 그는 전북대학교 철학과에 30여년 재직하는 동안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자신의 문하에서 수학한 직제자가 수백명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은 무소불능(無所不能)인지라 국가와 사회와 문화발전에 초석이 될만한 저서와 논문 90여편을 저술하는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가 훌륭한 인격과 폭넓은 학식을 겸비하였음을 보여 준다고 할 것이다. 앞으로 그의 저작과 논문을 분석해본다면 그의 철학 사상이 무엇인지 구체저으로 밝혀질 것으로 생각하며, 본 고에서는 그의 생애를 중심으로 철학 사상을 살펴 보는데 그치기로 한다. 그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용순리 668번지에서 1920년 7월 13일 아버지 이공(李公) 기하(起夏)와 어머니 연안 이씨(延安李氏)사이에서 1나 1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가의 풍(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열한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3년 복상(服喪)을 어른처럼 마쳤다고 한다. 그 뒤 편모 슬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편모의 명을 단 한번도 거역 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1950년 뒤늦게 그는 전주에 있는 명륜대학 경학과(經學科)에 입학하여 유학(儒學)을 연마하기 시작, 1952년 명륜대학이 전북대학교로 개편될 때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로 편입되었다. 철학과에서 철학을 연마하게 된 그는 서양철학에 관해서는 전원배(田元培, 뒤에 원광대학교 대학원장 역임, 철학박사) 교수로부터, 동양철학에 관해서는 김영수(金暎遂, 號 句光, 뒤에 서울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장 역임) 교수로부터 특별 사사하였다. 1954f년 철학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대학원에 입학 동양철학을 전공 김영수 교수의 지도 아래 ‘중국 고대 천인 합일 사상(天一合一思想)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를 1956년 취득하고, 1958년 3월 모교 철학과 전임 촉탁교수를 시작으로 1985년 정년퇴임하였고, 이후 지난 10월 25일 작고하기까지 명예 교수로 봉직해왔다. 드동안 그에게 사사한 사람들 가운데 대학 교수 10여명, 종교인 10여명(목사와 승려 포함), 중고교 교사 100여명이 배출되었다. 현재 그들은 대부분 중견이 되었는데 그들이 중견이 되기까지 그의 가르침의 힘이 컸다. 그는 모교 철학과에 재직하는 동안 『주역연구(周易硏究』(1959), 『인도철학』(1960), 『송대성리학(宋代性理學)』(1961), 『불교철학(佛敎哲學)』(편,1962), 『노장철학(老將哲學)』(1962), 『한국사상(韓國思想)』(1963) 등 동양철학 전반에 걸쳐 연구 저술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으며, 자신의 저술을 가지고 후진들을 직접 강의하였다. 그는 1959년 봄학기부터 ‘한국철학’ 과 ‘한국사상사’를 강의하였는데 ‘한국사상’의 원류를 찾고자 고심하던 가운데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민속과 민속신앙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듯하다. 그는 처음 한국의 전통 사상이 ‘동학(東學)’에 집대성된 것으로 파악 동학을 연구하던 중 충남 계룡산 주변에 50여개의 유사 종교가 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 1960년 봄 ‘계룡산학술탐사’를 계획 그 해 여름 방학을 이용 현지를 답사 직접 조사해 본 결과 종교 단체라 볼 수 있는 것은 10여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속과 민간 신앙을 대상으로 학술 탐사를 한다면 한국 철학과 한국 사상사의 원류를 밝힐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며, 마침내 1963년 전북대학교에 ‘한국신흥종교연구소’를 설립 작고하기 두달 전까지 전국을 누비면서 민속과 민간 신앙을 본격적으로 조사 연구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60년 여름 계룡산 유사 종교 탐사 결과를 {계룡산신흥종교분류일람}이라는 소책자로 발표하였으며, 그 뒤 이를 보완 1963년 {한국신흥종교분류일람}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소책자를 보면, 우리 나라에는 10계통의 신흥종교가 전국에 180여개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10계통이란 ‘수운계(水雲系, 東學系)’, ‘단군계(檀君系)’, ‘증산계(甑山系)’, ‘봉남계(奉南系, 찬물교계)’, ‘신계계(晨鷄系, 覺世道系)’, ‘불교계(佛敎系)’, ‘기독교계(基督敎界)’, ‘유교계(儒敎系)’, ‘무속숭신계(巫俗崇神系)’, ‘연합계(聯合系)’, ‘일관도계(一貫道系) 등이다. 그 뒤 전국을 누비며 조사한 결과를 『단군교계총론(檀君敎系總論)』(1965). 『증산교계총론(甑山敎系總論)』(1966). 『봉남교계총론(奉南敎系總論)』(1967)과 『한국신흥종교분류일람』을 몇 차례 보완 발표하였다. 1975년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신흥종교 13P통 340여 단체를 조사 발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다시 지역별로 분류 전국 각지의 신흥종교를 각각 정리해냈다. 이 같은 그의 신흥종교 탐구 결과를 정리한 내용을 보면, 그는 항상 신도들의 입장에서 신흥종교 단체의 교리며, 신행(信行)등을 이해 정리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힘없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코자 하였으며, 그러한 가운데에서 우리 나라의 전통 사상이 무엇이고 전통 철학이 무엇인가를 밝히려 하였다. 그는 항상 신흥종교 단체들의 신앙 생활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였다. 그렇게 연구를 하다보니 신흥종교 단체 지도자들의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로부터 살해를 당할 위협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연구 활동을 미루어 본다면 그는 학문을 하는데 대중을 대상으로 실증적이고, 실학적인 방법을 취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그의 연구 방법은 비단 신흥종교 연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민속학, 문화인류학, 역사, 문화사 등 그가 관여했던 여러 분야의 학문에도 똑같이 적용코자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익산의 기세배와 지게목발 노래’, ‘익산 삼기 농요’, ‘위도 띠뱃노리’ 등을 발굴했을 때도 그러했으며, 전북대학교 박물관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전북지역 문화재지표조사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전개할 때도 그러했다. 특히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를 조직하여 운영하면서 그는 한국의 역사는 지방사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 향토사 연구를 강조한 것도 그와 같은 자신의 찰학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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