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7.11 | [특집]
전북문화 10년, 그 의미와 전망 ‘대항’과 ‘경쟁력’의 강을 건너 21세기로 -전북문화 10년의 변화와 과제-
글ㆍ원도연 문화저널 편집장 (2004-02-17 12:08:17)
80년대는 대항문화의 시대 문화는 실로 변화무쌍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무릇 문화란 한 시대와의 간단없는 교통 속에서 생성되고 성장하며 소멸해 간다. 당연히 문화는 세상을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면서 한 시대를 비춰준다. 문화저널이 창간의 깃발을 올렸던 87년은 지역문화에 있어서 일종의 전환기였다. 87년을 전후로 한 이 시기의 문화는 급속한 고양과 성장기에 있었으며 공격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특성은 87년을 전후한 민중의 정치적 투쟁이 얻어낸 상대적인 자율성과 80년대 초중반의 경제적 부흥에 힘입은 것이었다. 80년대의 문화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담론은 ‘대항’과 ‘대안’이었다. 큰 틀에서 본다면 80년대 전북의 지역문화 역시 상대적으로 왜소하기는 했지만 대항문화의 강력한 진출과 대안문화에 대한 은근한 탐색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한국사회의 문화지형을 뒤흔든 대항문화의 흐름은 전북지역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변혁의 무기’로 상정된 대항문화의 흐름은 지역문화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뜻밖의 성과를 가져왔다. 우선 지역문화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고 허리가 튼튼해졌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80년대라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지역문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북지역에서 대항문화의 첫 번째 깃발을 올렸던 ‘사건’은 1983년 송만규를 비롯한 5-6인의 젊은 작가들이 이리에서 올린 <땅>전이었다. 이 전시는 한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반향은 보이지 않게 지역문화운동의 맥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민주화 운동의 진영에 선 문화 운동패 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서 강력한 실천력을 발휘했다. 지역문화의 새로운 ‘힘’ 82년 전북예술회관의 개관과 극단 ‘황토’의 창단, 83년 최초의 연극소극장 ‘전북문예소극장’개관, 84년 전북종합문화지를 표방하면서 인문사회과학과 문학의 영역을 망라한 『남민』지 창간, 85년 전투적인 미술패 ‘들ㆍ바람ㆍ사람들’ 창립, 역시 같은 해에 도내 최초의 전문 무용단인 ‘전북가림다현대무용단’(91년 현대무용단 사포로 명칭 변경)의 창단 등은 전북문화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러니까 전두환 정권이 레임덕에 걸리기 시작하면서 전북지역의 문화운동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86년 전주시립극단과 전북도립국악원이 나란히 창단되면서 관립예술단이 면모를 일신했고, 87년에는 민간차원에서의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먼저 음악 전문공연장인 소극장 예루가 문을 열었고, 민족예술을 표방한 연희패 ‘온고을’이 창단과 함께 공간을 마련했으며 굿패 ‘갠지겡’도 창단되었다. 또 민간화랑으로는 두 번째인 ‘온다라 미술관’의 개관, 노래패 ‘녹두꽃’의 출범, 전문학술운동단체를 표방한 호남사회연구회의 창립, 전북문화저널의 창간도 87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역문화의 새로운 기운을 조직해내는 사업들은 88년에도 이어졌다.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가 창립했고, 전북민주여성회도 여성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같은 일련의 문화운동은 아직 응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87-88년을 관통했던 변혁적 사회운동 속에서 문화는 일종의 ‘무리’로 인식되고 있었고, 아직 문화운동이라는 개념들은 분명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 변혁운동의 좌절이 조금씩 확인되면서 문화는 오히려 융성기를 맞았고, 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변혁운동의 전선이 다원화되면서 여성, 청년, 환경, 시민 등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문화 역시 새로운 운동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89년 황토현문화연구회의 창립은 기본적으로 변혁운동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이른바 대안적 문화운동의 하나였고, 90년 새길청년회의 창립도 80년대 중반의 치열한 전투성으로부터는 한발짝 물러선 것이었다. 90년 열린마당 아사달이 문을 열면서 문학의 대중화를 표방하고, 같은해 창작극회가 3년여의 공백을 딛고 재건의 깃발을 올리고 풍물패 ‘탈머리’가 조직되었으며, 91년 우진문화공간이 문을 열었던 것도 문화가 전북지역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문화의 개념이 바뀌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지역문화는 80년대의 전투성이 약화되면서 대안문화가 약진하고,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해석이 대두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변화와 함께 지역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각종 공연 및 미술장르가 ‘기획’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문화장르에서의 기획은 실험성과 통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만큼의 성장이라는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그같은 지역문화의 성장세를 주도했던 것은 87년 나란히 문을 연 음악의 ‘예루소극장’과 미술의 ‘온다라’, 그리고 82년 창단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를 풍미했던 극단 황토의 약진과 창작극회의 부상 그리고 현대무용단 사포의 끈기였다. 예루소극장은 개관 이후 서양음악과 한국음악의 장르를 넘나들며 매년 60여회의 공연을 기획해내는 놀라운 활동력을 보여주었다. 온다라 역시 끊임없는 기획전과 문화강좌들로 미술인구의 저변을 넓히는 저력을 과시했다. 극단 황토가 흔들리면서도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었고 여기에 91년 개관한 창작소극장을 중심으로 새롭게 연극판을 주도한 창작극회 역시 계속해서 문제작들을 터뜨렸다. 국악계 역시 도립국악원의 활동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각종 국악동아리들과 함께 지속적인 활동을 보여주었고, 문학은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를 통해서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암중모색을 계속하고 있었다. 현대무용단 사포의 활동도 전북지역에서는 거의 최초로 춤판을 기획해나가는 참신한 무대를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었다. 이들 지역문화의 2세대들이 주도한 지역문화는 비록 소규모적이지만 다양한 실험과 기획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서 문화는 더 이상 고리타분하고 귀족적이며 우아한 것이 아니라, 시대 속에서 거칠게 호흡하며 살아 생동하고 있었다. 다시 ‘흐르지 않는 물’로 90년대는 지역문화의 또다른 기점이 되었다. 90년대 중반을 향해가면서 한국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목표상실과 무좌표적인 경향이 전북지역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면서 지역문화는 그동안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9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지역문화는 정체되기 시작했다. 극단 황토가 92년 심각한 내분으로 주저앉고 소극장이 화재로 전소했으며, 미술운동의 선두주자였던 ‘들ㆍ바람ㆍ사람들’이 소리없이 흩어졌다. 80년대의 화제작이었던 『남민』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연회패들도 속속 무너지고 있었으며, 80년대 내내 대학으로부터 충원되어왔던 문화 운동패들의 진출도 주춤해졌다. 또 80년대 지역문화의 바탕이 되었던 소극장들도 하나둘 간판을 내렸으며, 저력의 ‘온다라’도 온다라 미술관 5년사를 결산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북지역의 문화운동은 이처럼 알게 모르게 새로운 시련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91년 정부내에 문화부가 독립하면서 91년 연극의 해를 시작으로 해마다 특정 장르에 대한 지원에 나섰지만 그것도 지역문화의 활성화에는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마침내 80년대를 화려하게 보냈던 문화패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제도권으로 진입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했고, 또 일부는 대학이나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했으며 나머지는 여전히 운동의 길에 서서 몸을 새롭게 만들어 문화운동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90년대 중반의 지역문화는 새롭게 재편되어져 갔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제도권 문화조직들이 서서히 조직을 정비하고 활로를 모색했고, 전북예총과 산하 각 단체들이 각기 세대교체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들이 겪고 있었던 진통은 80년대를 통해 성장한 신진 문화운동가들의 진출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속에서 80년대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은 이른바 제2세대의 마지막 주자들은 그들의 선배들에 비해서는 불행한 편에 속했다. 92년 한꺼번에 창립된 놀이패 ‘우리마당’과 미술패 ‘그림마을’, 그리고 노래패 ‘선언’, ‘청년문학회’ 등은 그들의 선배들과는 다른 감성으로 문화운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이미 잃고 있다는 뼈아픈 체험을 통해서 다시 과감하게 ‘대중속으로!’를 외치면서 투신해 들어갔다.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대중성은 80년대 문화운동의 종착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미 ‘80년대’는 약효를 잃고 있었다. 대중들은 그들 마지막 문화운동패가 추구하는 대중성과는 다른 감성으로 시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전북의 지역문화는 다시 해마다 ‘흐르지 않는 물’이라는 가혹한 평가를 들어야 했다. 지역문화는 새로운 인재발굴에 실패하고 있었으며, 거듭되는 실패는 지역문화의 저발전이라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경쟁력’으로 승부하라(?) 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은 지역문화에 또 한번의 찬스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통해 지역문화의 전투성은 다시 한번 발휘될 법 했지만 결과는 기대 이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면서 많은 공연과 전시가 열렸지만, 그 결실에 비해 준비는 그다지 치밀하지 못했다. 결국 백주년 사업은 그 성과를 구체적으로 남기지 못했고 더더욱 문화운동의 조직화는 멀어졌다. 지역문화는 활로를 새롭게 찾아 나섰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95년 창작극회는 <꽃신>이라는 대형무대를 올리면서 지역연극의 상업적 가능성을 타진했고, 도립국악원은 <춘향전>을 필두로 잇달아 대형 창극무대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화된 무대들은 80년대 소극장을 통해 건실하게 쌓여진 문화역량의 축적논리에 비한다면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90년대 중반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던 ‘세계화’와 ‘경쟁력’ 개념은 이처럼 지역문화의 목을 죄고 있었다. 악전고투 속에서도 꽃은 핀다 그러나 진흙탕 속에서도 꽃은 피기 마련이다. 문화는 늘 뜻밖의 생동력을 가져다 주는 법이다. 95년 지방자치제의 본격적인 실시 이후 지역문화는 새로운 개념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역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문화를 둘러싼 대중적 분위기가 비교적 선진화되고 있는 것이다. 광의의 개념에서 지역문화는 지역 정체성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바로 그 점에 지역문화의 활로가 있다. ‘세계화’의 부차적인 개념으로서의 ‘지방화’가 아니라 지역성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 지역문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지역문화의 가장 절실한 미덕이 바로 지역성이라는 점이 한 시대를 되짚어오면서 확인되고 있다. 아직 고생문의 끝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고 패기 넘치는 제3세대들이 이렇다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은근한 움직임들은 감지되고 있다. 그 은근함 속에서 우리는 21세기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