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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 | [특집]
전북문화 10년, 그 의미와 전망 지역문화의 활로는 대중성과 지역성에 있다 -전북문화 10년 장르별 결산-
문화저널(2004-02-17 11:56:22)
국악 ‘대중’의 바깥에서 대중 속으로 1980년대는 사회 전체가 ‘제자리 찾기’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그것은 민족적인 것을 찾고 그 위에 현실의 옷을 입히는 작업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같은 사회 전반의 상황 속에서 전북의 국악은 다른 장르에 비해 가장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80년대를 통해 국악이 서서히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국악의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해졌다는 점이 전북 국악의 가장 커다란 성과였다. 80년대 들어 전북 국악계에는 도제 중심으로, 또는 계파 중심으로 이어져 온 교육체계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 이를 전문ㆍ체계화 해 국악의 새로운 흐름을 수용할 수 있는 연구작업이 병행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북 국악계의 현주소를 실감한 국악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86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이런 의지를 한몸에 안은 도립국악원이 개원의 빛을 보게 된다. 도립국악원의 개원은 국악계뿐만 아니라 도민 모두의 오랜 염원을 한꺼번에 이룩한 쾌거로 기록됐고 이를 통해 비로소 국악인구의 저변확대는 물론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중장기적인 정책을 펼 수 있게 됐다. 이후에도 도립국악원은 87년 향토 민속악을 조사 발굴하고 보존ㆍ연구하기 위해 연구단을 결성했고, 이듬해에는 연주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국악단을 조직해, 교육ㆍ연구ㆍ공연이라는 종합적 국악의 전당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됐다. 92년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의 개원도 민속악의 본고장으로서 전통성과 독창적 정서를 회복하고 지켜가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전북국악사에 큰 의미를 주는 것이었다. 서울국립국악원에 이어 개원된 민속국악원은 앞으로 우리 음악의 정통성을 살리고 그것을 현대 속에 재조명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 10년간 지속된 국악 저변확대 이면에는 여러 국악단체들의 노력과 신설 단체들의 시도가 있었다. 독자성 있는 음악, 현실과 현장에 걸맞은 음악을 선호하는 대중이고 보니 창작과 개량이라는 문제를 두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시대적 변화 속에서 전통성만으로 승부하겠다는 전북국악의 고집은 곧 한계에 부딪쳤고 그 속에서 전북음악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전통을 바탕으로 한 창작가곡, 민요 등 생활정서에 맞는 참신한 국악가요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으며, 국악인들이 직접 대중을 찾아 나서는 현장음악 등도 새롭게 시도되었다. 90년을 기점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이같은 움직임은 도립국악단의 지속적인 공연무대 마련과 전주 국악관현악단의 활동에서부터 시작됐다. 특히 전주 국악관현악단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연 3회의 정기연주회와 소규모 공연무대를 지속적으로 기획하면서 전북국악의 분위기를 바꾸어 나갔다. 특히 타 지역 작곡가에게 음악을 위촉하는 등의 편안한 방법들을 버리고 창작에 몰두하는 한편 전북지역의 작곡가들에게 지역성 넘치는 작품을 위촉하기 위한 노력들을 계속해 나갔다. 또 이들 관현악단은 인근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갖는 등 노년층과 청소년층에 이르기까지 국악의 저변확대를 위해 분투했다. 눈에 읽힐 만한 이같은 성과들 속에서도 전북 국악계는 적잖은 과제를 안고 있다. 교육기관의 체계화와 양적으로 증가한 공연회수, 그리고 창작에의 실험이 자칫 속빈 강정으로 전락할 수 있는 우려 때문이다. 우선 독주회나 독창무대가 줄어드는 추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단체공연의 증가 속에는 국악의 맥을 이어가는 개개인들의 역량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한편에 남아있다. 또 심도깊은 연구없이 올려지는 공연무대는 외형상의 화려함만 있을 뿐 국악 특유의 정서와 감정을 전달해 주지는 못하는 약점을 안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공연회수와 전북국악의 발전이 무조건적인 비례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나 이같은 우려 속에서도 국악에 거는 기대는 대체로 희망적이다. 이미 대중정서와 접목된 국악의 새로운 장르가 개발되고 있고 창조적인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고 우선 안심이다. 다만 전통국악과 개량된 국악간의 세대차이가 너무 커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지만 새롭게 치고 올라오는 젊은 국악인들의 열정과 패기는 과거 볼 수 없었던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데다 문화저널과 우진문화공간 등이 마련하고 있는 각종 공연을 통해 개인역량이 우수한 국악인들이 계속적으로 발굴되고 있다는 점 등에서 사회적인 반향을 기대해 봄직하기 때문이다. (손) 무용 ‘외강내강’한 전라도의 춤 지난 10년간 전북 무용계는 외형적으로는 90년을 기점으로 각 무용 장르가 고르게 성장하고 무용의 대중성 확보를 통한 저변확대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돋보인다. 내용적으로는 무용이 관념적인 레퍼토리를 탈피, 삶을 충분히 반영하고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심도깊게 고찰하는 등 질적인 성장도 두드러졌다. 전북무용계의 뿌리는 깊고 탄탄하다. 우리나라 무용계를 주도하는 원로들이 이 지역 출신인데다 독특한 지역적 정서와 문화적 바탕의 든든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전북 무용계는 외형적으로는 90년을 기점으로 각 무용 장르가 고르게 성장하고 무용의 대중성 확보를 통한 저변확대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돋보인다. 내용적으로는 무용이 관념적인 레퍼토리를 탈피, 삶을 충분히 반영하고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심도깊게 고찰하는 등 질적인 성장도 두드러졌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전북의 무용은 지난 10여년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깊은 뿌리에 걸맞지 않게 불균형적인 발육을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고 여러 가지 한계에 직면해 있는 실정이다. 한국무용 중심의 춤은 나름대로 활성화되어 왔지만, 현대무용이나 발레, 민속무용 등의 경우는 그 활동영역을 기대만큼 확장시켜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중에서도 오늘 전북무용의 위상이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80년대 중반부터 전북의 현대무용계에 과감하게 도전(?)한 현대무용단 ‘사포’는 그런면에서 본다면 전북지역 춤문화 발전의 중심이 되어왔다. 80년대 중반부터 배출되기 시작한 도내 대학 무용전공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고 그 가운데서도 오늘날 현대무용단 사포로 이어지고 있는 전북가림다 무용단은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85년 창단된 전북가림다 무용단의 젊은 춤꾼들은 ‘오늘의 한국춤 찾기’ 작업을 통해 전북무용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들은 91년 들어 현대무용단 사포로 이름을 바꾸고 실험성 높은 창작무대를 끈기있게 올렸으며, 정기공연을 통해 고정적인 무용관객들을 확보하면서 현대무용의 독자성을 높여 나갔다. 결과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의 현대무용계를 자극하면서 무용계 전반의 질적 성장을 선도했다. 유독 침체와 불모의 국면을 면치 못했던 발레도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우석대의 손정자 교수가 이끄는 ‘우석발레인스티튜트’, 전북대의 ‘손윤숙 발레단’ 등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발레단들이 전북 발레의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90년대 들어 전북발레는 형식과 내용의 양측면에서 발레 나름대로의 전통성을 살리면서도 서서히 창작발레에 대한 마인드가 열리고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전북무용에서 전통적인 강세를 보여왔던 한국무용의 경우는 전통의 계승과 창작이 어우러지면서 활동이 왕성해져 원숙기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9년 한국무용가 최선의 살풀이 무대와 금파의 춤공연은 전북의 전통 춤사위와 맥을 복원하는 의미있는 무대였다. 특히 춤의 해인 92년부터 문화저널이 해마다 기획해 온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은 잊혀져 가는 우리춤의 정서를 되찾고 그 현대적 계승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시켰으며 전북지역 곳곳에 숨어있는 명무를 발굴, 전북 춤의 맥을 잇는 개가를 올렸다. 또 우진문화공간의 의욕적인 기획춤판을 통해서는 소극장 춤문화가 정착되었으며 젊은 춤꾼들에게는 창작활동을 북돋우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무용이 제각각의 개성을 살려 고른 성장을 이끌어내자 대중들도 ‘무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80년대만 해도 ‘무용인들의 잔치’였던 춤공연은 90년대를 기점으로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일반관객의 증가는 단순히 시대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무용인들이 보여준 각고의 노력과 시도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현대무용단 사포의 야외춤판과 소극장 공연은 무용이 대중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어떤 결과가 얻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모범이었다. 사포는 올해까지 모두 10회의 야외춤판과 21회의 소극장 공연을 기획하면서 <거울 속의 카르멘>, <한여름밤의 꿈>,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9월의 신부> 등 실험적이고 독창성 넘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특히 91년 해수욕장과 대학노천극장에서 마련한 ‘청소년을 위한 야외춤판’은 무용의 대중성 확보에 기여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이를 시발로 꾸준하게 무용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80년대 무용계는 우리의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화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다양한 실험과 전통계승의 문제가 심도깊게 모색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이 지역의 정서가 고려되지 못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현대무용은 오늘의 춤 언어를 창출하는데 성공한 면모를 보여줬다. 95년 사포는 한국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는 광주민주항쟁을 현대무용화한 3부작 <그해 오월>과 97년 <편애의 땅>을 발표, 역사를 끌어안는 내용적 성숙을 이루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을 춤으로 형상화해낸 소중한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춤패 ‘해오름’은 80년대로부터 성장해온 재야의 무용동아리임에도 불구하고 전북무용의 두터운 벽을 넘지못한 채 고전하고 있지만 눈여겨 볼만한 작업들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지난 10년간 발전적 청사진을 마련해 오고 있는 무용계는 그러나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해 1백여명 이상 쏟아져 나오는 대학 무용인들이 설 무대의 부족과 그들이 몸을 담고 뛰어야 할 무용단이 없어서 우수한 인력들이 중앙무대로 속속 빠져나가고 있는 열악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관립무용단의 부재, 다른 시ㆍ도에서 비해 비싼 대관료, 정책적 지원의 미비로 인해 무용인들 자체도 전북지역 공연을 꺼려하고 타시도 공연을 선호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그 성과를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전북 내에서는 내실있는 무용 전반의 성숙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도 전북 무용계가 고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손) 문학 ‘지역정서와 삶’의 끝없는 모색 동인지의 양적 증가가 반드시 문학의 질적 향상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88년이후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난 문예지에 전북지역 신인작가들이 속속 등단하고 지역의 동인지 발간 등을 통해 왕성한 창작활동이 이루어졌지만, 그 가운데서 문학성과 대중성에 있어서 관심을 모은 수작은 많지 않아 ‘풍요 속의 빈곤’을 실감케 했다. 80년대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모색하던 문학이 21세기를 앞두고 몸살을 앓고 있다. 문학인구는 급격하게 확산 되었지만 독자의 기호를 찾아 헤매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무의미한 창작물이 범람하는 등 본래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퇴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80년대 중흥기를 맞이한 전북문단은 80년대 중반이후 사회적인 격변기를 겪으면서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으로 양분되는 경향을 낳았다. 62년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로 출발한 ‘전북문인협회’가 표방한 순수문학과 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시운동을 자임하고 나섰던 『남민시』동인이 발전적인 민족문학운동을 모색하며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를 결성, 오늘의 ‘전북 작가회의’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이하 민문협)의 결성은 80년대 사회적 격변기와 때를 같이해 출범했다. 당시 ‘참다운 민족문학이란 수천년의 역사 안에서 줄기찬 생명을 이어 오고 있는 이땅의 사람들, 민족공동체의 건강한 생활을 올바르게 반영한다’는 민문협의 선언은 순수문학계열과 차별화를 선언하면서 80년대 민족민중문학의 시대를 열었다. 창립 당시 「양심수 석방을 위한 문학의 밤」행사를 통해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고 나선 민문협은 문학강연, 창작교실, 시인학교 등을 꾸려가면서 지역 문학의 대중화를 위한 틀을 다졌다. 또한 농촌문제 노동자 문제 등,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지역적 기반에 연고한 창작물을 끊임없이 발표했다. 민족문학의 진영에서 김용택이라는 걸출한 시인이 전성기를 맞았고, 뒤를 이어 안도현, 오봉옥 등의 시인들이 시대의 아픔을 직접 노래했고, 이광웅 역시 길지 않는 생애 속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소설쪽에서는 이병천의 득세가 완연했으며 정도상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변혁운동의 좌절과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민족문학의 진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민족문학진영은 심각한 존재의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고, 80년대의 고민은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80년대의 좌절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등의 고민과 과제는 전북의 문학운동 역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민족문학진영이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매년 조용하게 수확을 거두고 있었던 전북문인협회는 중견작가들을 중심으로 지역문학의 또다른 축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80년대 초반 전북문인협회가 정상화되면서 조직의 안정을 꾀했던 효과가 80년대 후반들어 탄력있게 분출되었던 것이다. 각종 문학상이 문인협회의 주도로 제정되고 김남곤, 허소라, 이운용 등 저력의 시인들이 시집을 내면서 지역문학은 균형을 잡아갔다. 90년대 초반에 이르면서 민문협은 지난 시대에 대한 자기반성과 90년대라는 시대성을 성찰하면서 기관지 『사람과 문학』을 창간했다. 민족문학진영의 중심을 세운 『사람과 문학』은 ‘진정한 변화는 지금, 이 곳의 대중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 그리 될 것이라는 귀중한 확신을 얻었다’고 밝히면서 문학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민문협이 변혁의 전선에서 한발짝 발을 빼면서 ‘사람의 문학’으로 주력을 이동시키자, 이번에는 청년문학회가 나섰다. 92년 창립된 청년문학회는 ‘그래도 본질적으로 변화한 것은 없다’는 확신 속에서 기성 문단의 병폐들을 거울삼고, 문학이 민족민중운동의 당당한 주체로 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좌표로 삼고 있었다. 20-30대가 주축을 이룬 전북청년문학회는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기관지 『청년문학』을 통해 문학과 삶의 진지한 성찰을 꾀했다. 90년대 초중반은 지역문학의 고비길이 되었다. 문인협회와 민문협이 지역문학의 양대축을 이룸과 함께 문학의 대중적 확산이 두드러지면서 동인지들도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전북의 동인지는 80년대 19종에 이어 90년대 들어 16종이 새로이 출간되었다. 여기에 각 지역동인지와 학교동인지까지를 포함하면 무려 100여종의 문학 동인지들이 선을 보인 셈이다. 문학이 지니는 대중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들이다. 그러나 동인지의 양적 증가가 반드시 문학의 질적 향상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88년이후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난 문예지에 전북지역 신인작가들이 속속 등단하고 지역의 동인지 발간 등을 통해 왕성한 창작활동이 이루어졌지만, 그 가운데서 문학성과 대중성에 있어서 관심을 모은 수작은 많지 않아 ‘풍요 속의 빈곤’을 실감케 했다.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문학의 흐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학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 즉 작가의 확고한 문학관과 진정한 삶의 근원을 찾는 작업들이 문학의 생명력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창작활동은 여전히 ‘부익부 빈익빈’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안도현 시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현재는 민족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상상력의 위기로 봐야 옳을 것이다”라며 “창작물에 사회적 분위기를 담지 않는, 아니 담을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근래에 들어 문학이 독자의 기호에 영합되면서 베스트 셀러의 주기가 짧아지고, 출판이 급격하게 상업화되는 상황 속에서 지역문학은 다시 위기를 맞고 있는 듯 하다. 전북의 지역작가들도 아직은 이 변화들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결국 한 시대를 가장 앞서가는 문학이 지역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지역대중들의 삶과 정서를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위기는 의외로 장기화 될 가능성도 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의 꾸준한 약진은 그래서 지역문학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 미술 실험과 창작에 승부를 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북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표현방식의 다원화, 민간화랑의 증가와 미술 동호인구의 수적 확산 등으로 요약된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지역미술은 기초가 단단해지면서 나름대로 저변확대에 성공했지만 아직은 지역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이른바 ‘미술로서의 미술’ 즉 순수미술을 표방해온 전북 미술계는 80년대의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맞으면서 적지않은 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작가들은 ‘시대적 격변 속에서 미술운동이 어떠한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87년 새로운 미술운동을 표방하고 나선 ‘온다라 미술관’의 개관은 전북지역 미술운동에 커다란 활력이 되었다. 전 온다라 미술관 김인철 관장은 “온다라 미술관을 만들면서 처음 떠올린 것은 이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변혁에 동참하는 일이었다”고 개관의 의미를 회고했다. 온다라 미술관은 서울의 그림마당 ‘민’, 대구의 예술마당 ‘솔’과 함께 80년대 민족민중미술의 아지트가 되고 있었다. 또 온다라의 개관은 전북지역에서도 대성화랑에 이어 두 번째 민간화랑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으면서 지역 미술계의 돌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온다라는 개관이후 5년여 동안 82회의 기획초대전과 26회의 강연, 14번의 강좌를 쉴새없이 치러내면서 민중미술뿐만 아니라 지역미술의 기반이 되었다. 본격적인 민중미술패 ‘들ㆍ바람ㆍ사람들’도 88년 창립전 등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미술의 무력함과 무의미함을 과감히 탈피,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민중의 삶을 담은 전시회로 큰 호응을 얻었다. 여기에 잡음많던 전라북도 미술대전도 89년부터 민전으로 돌아서면서 점차 전북미술 최대의 축제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한국의 민중미술은 서서히 침체기로 빠져들었다. 다시 순수미술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작가의 관심사는 민중의 삶과 생활에서 자신의 내면문제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른바 80년대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새로운 리얼리즘이 90년대를 풍미하기 시작했다. 설치미술, 행위미술이 선보이고 조각, 도자기, 공예 등의 전시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초중반의 변화였다. 미술의 다양성은 도내 각 대학에서 매년 배출해내는 백여명 가까운 젊은 미술작가들에 의해서도 주도되었다. 그들은 대학별 특성을 견지하면서도 경쟁적으로 새로운 미술사조에 몰입해갔고, 그 속에서 대중들은 실험성 높은 미래의 작가들로부터 다양한 색조와 형상의 체험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지역미술의 수준이 향상되고 미술인구의 층이 두터워지면서 전시회의 형태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의 인간적 교류에 기반했던 기존의 전시회 형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미술적 성격과 계열을 같이하는 기획전과 주제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좀처럼 침체기를 빠져나오지 못했던 전북민족미술인협의회가 <삶의 현장전>, <환경과 인간전> 등을 통해서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또는 우회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 전북미술의 상승세에 힘입어 민간화랑도 아연 활기를 띠었다. 80년대의 온다라미술관, 얼화랑, 대성화랑에 이어 90년대에 우진문화공간, 정 갤러리, 갤러리 고을, 민촌 아트센터가 개관했고 최근에는 서신갤러리도 여기에 합류했다. 얼화랑이 매년초 기획하면서 간판 전시로 자리잡은 <띠전>이나 우진문화공간의 <신예작가초대전> 등이 주제전과 기획전의 지평을 넓혔고, 전주지역의 화랑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화랑연합회전도 전북미술의 발전을 반영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전북미술의 실험성과 의욕이 한계에 부딪치고 여기에 경제적 불황으로 미술시장이 얼어붙고 민간화랑들이 부진에 빠져들면서, 전북미술은 94년을 기점으로 급격한 하강세에 접어들었다.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획의 부재가 전북미술의 고질적인 문제로 답습되었다. 90년대 초반까지 전북미술의 성장세속에 감춰져 있던 비평 부재라는 고질병, 혹은 전문큐레이터를 전혀 양성해내지 못했던 근시안적인 미술풍토가 90년대 중반의 대외적 악조건을 극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80년대의 온다라와 같은 활력을 90년대 들어서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전북미술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크게 보아 몸을 움츠리면서도 주제기획전이 강화되었고, 전통 한국화가 새롭게 조명을 받았으며, 한국화와 서양화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미술기법적으로 점차 통합되어지는 것도 특징 중의 하나였다. 순수민간화랑이 흔들리는 반면에 기업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유건물의 일부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공간들도 속속 등장했다. 여기에 폐교된 초등학교를 자연 속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오궁리 미술촌의 개관도 기획 자체는 획기적인 바 있었다. 전통 한국화의 약진도 90년대 중반의 특징이었다. 95년 예술회관 분관에서 전시된 고구려특별대전은 보기 드물게 앵콜을 거듭하면서 3개월여의 장기 전시를 성공시켰고, 96년 국립전주박물관이 열었던 <고구려특별대전>은 한달동안 무려 6만여명이 몰린 전북 지역 사상 최고의 히트를 기록했다. 지난해부터 도내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시작하고 있는 <전라한국화제전>이나 <중견작가초대전> 등도 한국화의 복원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외형적인 회복이 지역미술의 또다른 전성기를 예고한다고 볼 수는 없다. 민간화랑들의 어려움은 계속되고 있고 작가들의 창작활동은 외적인 요인으로 제약받고 있다. 95년 광주비엔날레는 전북미술의 상대적 허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으며 아직까지도 이렇다할 승부수는 보이지 않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선태씨는 “미술사조의 큰 줄기 속에서 자기만의 표현방식을 찾고 창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북미술이 80년대의 좌절로부터 너무 빨리 지쳐버렸고 90년대 초반의 활황 속에서는 면밀한 자기성찰과 조직이 부재했던 것이 뼈아프지만, 그것은 동시에 교훈으로 남기도 한다. 민미협이 이른바 제3세대들로 충원되고, 곳곳에서 가능성있는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저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그속에 전북미술의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최) 연극 삶에 밀착된 연극, 활로는 거기에 연극계가 일궈낸 소중한 성과들을 몇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소극장 연극의 활성화, 공연의 양적 증가, 관객의 관심과 수준 향상 등으로 요약된다. 또 대외적으로 전국 규모의 연극제를 통해 전북 연극의 역량이 검증된 것이나 시립극단의 꾸준한 활동과 상근화도 지난 10년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변화들이다. 지난 10년간 전북 연극계는 각 극단마다 그동안 쌓은 역량들을 바탕으로 서서히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연극계가 일궈낸 소중한 성과들을 몇가지로 요약해 본다면 소극장 연극의 활성화, 공연의 양적 증가, 관객의 관심과 수준 향상 등으로 요약된다. 또 대외적으로 전국 규모의 연극제를 통해 전북 연극의 역량이 검증된 것이나 시립극단의 꾸준한 활동과 상근화도 지난 10년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변화들이다. 소극장 연극은 연기자의 입장에서는 반복되는 공연 속에서 연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관객과 근거리에서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극발전의 기반이 된다. 전북의 소극장 연극운동은 80년대 중반에 들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었다. 84년 창단돼 80년대 후반과 전북연극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극단 ‘황토’는 86년 황토예술소극장을 개관, 그 무대를 통해 소극장 연극의 기틀을 다져오면서 88년 <태>(오태석 작, 박병도 연출)라는 작품으로 제6회 전국연극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그 실력을 검증받았다. 황토는 한해에 3편 이상의 작품을 올려 소극장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거기에 90년 재창단식을 갖고 <남자는 위 여자는 아래>(안종관 작, 김정수 연출)를 개관기념공연으로 올려 면모를 일신한 창작극회가, ‘삶에 밀착된 연극’, ‘창작극 위주의 공연’을 내세우면서 개관한 창작소극장도 공연무대가 많지 않은 전북연극의 척박한 여건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연극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연량과 관객수 증가. 연간 30여편이 넘는 연극작품이 마련되어 월 평균 3편 이상이 무대에 올라 연 10만 이상의 관객과 만나게 됐으며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줄을 서는 진풍경도 그려졌다. 80년 후반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황토는 그 여세를 90년대로 몰아 한해 5-6편의 크고작은 무대를 마련했으며 시립극단의 연 3회 정기공연, 창작극회의 정기공연, 각 극단의 창단공연과 대학연극, 초청공연까지 감안하면 시민들은 언제라도 ‘관객’이 될 수 있는 풍성한 공연문화가 싹텄다고 할 수 있다. 85년 시립극단의 창단은 연극계에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매년 두세 차례의 공연을 통해 관객과의 만남을 시도해 왔으며 특히 시인 고은의 연작시를 단원공동으로 구성해낸 <만인보> 공연은 춘천 태백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금석씨를 객원연출로 초빙하고 우석대 국악과 심인택 교수가 음악을 맡아 민중의 건강한 정서를 재조명해 냄으로써 관심을 모았다. 또 지방 창작극 활로에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아 높은 호응와 갈채를 받기도 했다. 또 시립극단의 창단으로 극단간의 교류가 활성화 되었다는 점도 성과였다. 서로 다른 극단에 속한 연극인들이 한 무대에서 공연하면서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기량을 맘껏 펼치고 교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자연스럽게 연극인 상호간의 이해와 공통분모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 이처럼 대외적인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전북연극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북지역 연극계가 가장 고심하고 있는 부족한 연극인구 문제를 타개하고 연극 활성화에 새바람을 불어넣자는 데 뜻을 두고 시작한 전북대학연극제의 무산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대학연극제는 그동안 올려진 작품의 질적인 역량을 거론하기 앞서 연극인구와 관객확보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쳐온 것이 사실인데도, 연극협회와의 갈등으로 시작된 침체와 좌절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상황은 전국연극제의 예선을 떠나 지역 연극인들의 축제마당으로 꾸려지길 기대했던 전북연극제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80년대를 잘 이끌어오던 이 축제는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3~4개 극단이 고정참가하는 데 그쳐 각 극단의 참가를 유도할 수 있는 적극적인 활성화 방안이 아쉬운 상황이다. 이와 함께 전북연극은 대내외적으로도 탄탄한 뿌리를 인정받고 있지만 근본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만만치 않다. 우선 부닥치는 문제가 연극계의 경제적 어려움과 연극인의 처우문제다. 도내 극단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는 좋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데 치명적인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이같은 문제는 소극장 연극이 대형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상과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공연무대의 대형화는 연극인들의 영세성 극복을 위해 어느 정도 필수적이고 소극장을 통해 축적된 개인기량들이 선보일 수 있는 장점에도 불구, 연극의 저변확대를 저해하고 연극의 순수성을 왜곡시킬 수 있는 상업화 등의 문제를 낳고 있어 무조건 환영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희곡작가의 절대적 부족과 비평부재도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지방연극으로서 자생력을 가지고 그 지역만의 독특한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희곡작가와 연극전문 비평가를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시급한 문제다. 또 고급 연기자와 연출가의 양성도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체계적인 연극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극단 사이의 활발한 교류와 워크샵 등을 통해 이론과 실기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앞으로 연극계가 해결해 나가야 할 숙제로 남게 됐다. (손) 양악 ‘까탈스런’ 대중에게 지역음악의 자존심을 ‘예향 전북’의 이미지 속에서 서양음악이 차지하는 정신적ㆍ물리적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전북은 국악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에 기댄 음악적 자존심에 때로는 상처를 받으면서도,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속에서 음악적 발전의 길을 찾아냈던 것이 80년대 이후 전북음악의 가장 고유한 특징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를 통해 전북 음악계는 다른 어떤 장르에 못지않게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질높은 대중성의 확보 또는 전문기획의 측면에서 본다면 여전히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전북지역의 음악적 전통을 지켜나가고 있는 관현악단들과 음악 동아리들의 꾸준한 활동 또는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을 접목시킨 새로운 경향의 등장 등은 전북음악의 미래를 밝게 하는 요소들이다. 음악의 대중화와 활성화를 모색하며 87년에 문을 연 예루소극장은 전북 음악의 선봉이었다. 예루소극장은 매주 1-2회씩 예루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단일 음악소극장으로서 년간 50-60회의 공연기획을 지치지 않고 해왔다. 예루의 이런 왕성한 활동은 전북음악계로서는 거의 기념비적인 사업들이었고, 예루음악회는 신인 음악인의 발굴과 음악인구의 저변확대라는 측면에서 적지않은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예루소극장의 놀라운 활동력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도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대중과 함께’라는 기치에 걸맞는 대중성 자체는 미진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예루소극장을 열고 지금껏 끌어가고 있는 전주대 김광순 교수는 “전문 음악공간은 근본적으로 공연장과 기획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예루소극장의 경우 출발 당시 전북음악의 상황들을 인지하고 출발했던 만큼 튼튼한 기획이 뒷받침됐어야 했으나, 단순히 음악을 제공하는 선에서 머물렀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80년 중반 이후 전북음악계는 예루소극장과 전북예술회관을 위시한 곳곳에서의 개인발표회 그리고 클래식음악 감상공간이 공존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그간 활동해온 KBS합창단, 전주시립합창단, 호남오페라단 등이 정기연주회 등을 통해 꾸준하게 활동했고 그 속에서 민중음악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또한 개인발표회와 관주도의 음악행사들이 두드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인구의 양적 성장도 가져왔다. 특히 해외에서 음악공부를 마친 유학파 음악인의 귀국발표회가 자주 등장하고, 때를 같이해 장르별 음악단체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특징이었다. 특히 전북최초의 목관실내악단 ‘아울로스’와 같은 장르별 음악동호회가 결성되는가 하면 피아노, 첼로 등 특정악기를 중심으로 하는 연주회도 속속 선을 보였다. 92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주의권과의 교류가 확대되었고 전북지역에서도 동구권 음악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국적으로 음악의 저변인구가 확산되고 있을 즈음 도내 대학 음악과 등에서 배출된 전문인력들도 사회 무대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80년대 외지에서 공부한 도내 음악인이 합세해 전북지역은 상당한 음악적 성장세를 경험하고 있었다. 또한 국악과 양악이 접목되어 같은 무대에 올려지면서 전북의 ‘까탈스러운’ 관객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는 등 전북 음악은 그야말로 다각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활발한 음악활동에도 불구하고 전북의 음악계가 고정적인 음악인구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잔치’로 남겨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음악비평의 부재에 있었다. 전북지역에서 전문적인 음악비평가는 지금까지 거의 전무한 상태다. 비평이 가능한 전문가들조차 학연과 지연관계에 얽매여 비평을 꺼리는 현실은 결과적으로는 전북음악의 실험성과 진취성을 크게 훼손시키고 있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음악정신이 배어있는 음악행사가 선보이지 않고, 단순히 행사를 위한 음악회가 만연되어 있는 전북의 음악계에 경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행사를 위한 음악에서, 음악을 위한 음악으로 발돋움 하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것이 바로 비평의 바다인 것이다. 비평을 고려하는 음악은 그만큼의 고민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참신한 기획으로 나타난다. 또 80년대 중반 전북음악의 미래를 짊어지고 문을 연 예루소극장의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동안 전북음악이 질적인 발전이 없었다는 것은 전북음악이 전반적으로 기획부재의 상황에 빠져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문적인 공연 기획이 없을 때 공연기획의 몫은 시스템이 비교적 완비되어 있고, 가장 많은 음악무대가 올려지는 전북예술회관이나 삼성문화회관 등의 몫으로 넘겨진다. 이제 이들 공간들이 대관 위주의 행사진행에서 실험적인 무대를 가꾸기 위한 기획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와 함께 최근들어 성행하고 있는 상업화된 대형무대 중심의 음악판도에 대한 우려도 높다. 서울을 중심으로 기획된 대형공연들이 여과없이 지역무대에 올려지면서 음악행사가 흥행위주의 단발성 이벤트로 치닫는 현실은, 본래의 음악이 향유하고자 하는 바를 시민들에게 올바로 제공하는 기회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두고 음악인들은 “중앙음악과 지역음악의 격차를 넓히는 결과만 가져올 뿐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결국 ‘지역음악 죽이기’에 불과하다”고 개탄하고 있다. 이같은 상업화, 이벤트화는 결국 무분별한 중앙음악의 선호와 지역음악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가져올 것이라는 지적이다. 여기에 매년 도내 대학을 통해 2백여명씩 배출되는 전문 음악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음악적 환경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아직 일반화되지는 못하고 있지만 최근 시립합창단, 시립교향악단 등의 활동은 전북음악의 활로를 제시해주고 있다. 이들이 모색하고 있는 이른바 ‘틈새 음악회’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 지역음악의 기반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관객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관객을 찾아 아파트 단지, 중고등학교 등을 순회하면서 가정 주부들과 청소년들에게 전북음악의 수준을 확인받고, 그를 통해 연주자들과 관객들은 호흡을 일치시키고 있다. 이들을 맞는 관객들의 호응은 깜짝 놀랄만큼 열정적이고 다시 관객들의 환호 속에 묻힌 전북음악은 지역음악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대중성과 전문성을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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