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7.11 | [문화저널]
【전북의 인물, 전북의 역사 】가왕 송흥록 귀신도 울린 동편제 소리의 시조
글ㆍ최동현 군산대 교수·국문학과 최동현 / 54년 순장 출생. 전북대학교 사법대학 국어교(2004-02-17 11:50:12)
송흥록은 진양조의 완성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하고, 산유화조의 개발을 통해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함으로써, 판소리가 계급적,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음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판소리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할 무렵, 판소리의 발전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남원 운봉 출신 소리꾼 송흥록이다. 송흥록에 관한 당시의 기록은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1826년에 쓴 <관극시>의 ‘고송염모일대재(高宋염一代才. 고수관, 송홍록, 염계달, 모흥감은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재주를 지니고 있다)’ 라는 구절과 1827년에 만들어진 <팔도재인등장>에 송흥록이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것뿐이다. 그리고는 1940년에 조선일보출판부에서 나온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의 기록이 있다. 따라서 송흥록이 대체로 19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한 생몰 연대는 물론, 묘 또한 알 수가 없다. 박황은 송흥록이 한양에 올라가 소리를 하면서,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씨에게 괄시를 당하고 있는 대원군을 두둔하다가 함경도로 귀양을 갔으며, 그곳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이 또한 신빙할 만한 것은 못된다. 남아 있는 것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몇 개의 설화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송흥록에 대해선 설화로 접근할 수밖에는 없다. 『조선창극사』에는 송흥록에 관하여 ‘여산폭포(廬山瀑布) 호풍환우(呼風喚雨) 송흥록, 가왕(歌王)의 송흥록’이라고 적고 있다. 여산폭포와 같은 우렁찬 소리로 비와 바람을 부르는 재주를 구사하며, 또 가왕으로 일컬어진다는 뜻이다. 가왕이란 칭호는 그보다 조금 선배인 모흥갑이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모흥갑도 당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대명창이었다. 모흥갑의 활동 무대가 북녘 지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평양감사 부임도> 중 모흥갑이 소리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모흥갑이 송흥록을 가왕으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니, 송흥록의 소리 실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송흥록은 남원 운봉 비전리에서 태어났다. 비전리는 고려말 이성계가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적지로, 황산대첩비가 있는 동네이다. 송흥록 이후 이 동네에서는 여러 명창이 났다. 송흥록의 동생 송광록, 그의 아들 송우룡 등은 송씨 문중을 빛낸 명창들이다. 송우룡 대에는 구례로 이사를 해서, 송씨 가문의 소리는 운봉을 떠난다. 그러나, 현대 명창 박초월이 또 이 동네에 와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 명창으로서의 수업을 쌓았다. 운봉이 왜 음악의 고장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몇 가지 역사적인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이 지역의 음악적 전통이다. 운봉에는 신라말 거문고의 명인이었던 옥보고가 말년을 보내면서, 속명득과 귀금선생을 가르쳤다는 옥계동이 있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는 빛나는 음악적 전통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예부터 훌륭한 음악가가 있었으니, 그 영향으로 뛰어난 음악가를 계속 배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이 지역에 일찍부터 대지주들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이다. 운봉은 지리산 아래 고원 지대이지만, 지리산 산록을 따라 들이 잘 발달된 곳이다. 이 넓은 들을 배경으로, 몇몇 대지주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음악가들의 충실한 후원자가 될 수 있었다. 남원 읍내에는 만석꾼이 없어도, 운봉에는 예부터 만석꾼이 셋이나 있었다고 하니, 자연히 이들의 후원 아래 음악가들이 모였고, 또 음악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길 수가 있었다. 셋째, 지리산을 끼고 있어 음악수업에 좋은 장소라 많았다는 점이다. 예부터 판소리 수련은 경치 좋은 심산유곡을 찾아가 하는 것이 보통이다. 운봉은 지리산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소리를 연마하기에 좋은 곳들이 많았던 것이다. 송흥록은 불세출의 대명창이었던 만큼 일화도 많다. 그 중에서도 대구 감영의 수청 기생 맹렬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송흥록이 처음 소리 공부를 마치고 세상에 나와 명성이 자자하니, 대구 감영에 불려가 소리를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칭찬이 자자한데 오직 일등 명기 맹렬만이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날 송흥록은 맹렬을 만나 연유를 물었다. 맹렬은 송흥록이 명창은 명창이나 아직 미진한 곳이 많다고 하였다. 이에 송흥록은 다시 운봉으로 돌아가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마침내 자신이 생긴 송흥록은 다시 대구 감영을 찾아가 소리를 하였다. 송흥록의 소리에 반한 맹렬은 그날 밤 보따리를 싸서 송흥록을 따라 대구를 탈출해버렸다. 운봉에 와서 살림을 하던 맹렬은, 송흥록이 소리를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겠다던 날짜를 어기자 도망을 해 다시 진주 병사의 수청 기생이 되어 버렸다. 송흥록은 진주로 맹렬을 찾아갔다. 송흥록이 온 것을 안 맹렬은 진주 병사를 시켜, 송흥록이 능히 병사를 울리고 웃기면 큰 상을 주려니와 그러지 못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하되, 소리는 바싹 마른 <수궁가>를 부르도록 하라고 했다. <수궁가>에는 별로 슬픈 대목도, 웃기는 대목도 없기 때문에 ‘바싹 마른 소리’라고 한다. 목숨이 경각간에 달린 송흥록이 아무리 병사를 웃기려고 해도 병사가 웃지않자, 송흥록은 병사에게 달려들며, <아저씨, 왜 아니 웃으시오? 나를 죽이고 싶어서?>라고 하였다. 병사가 어이없어 픽 웃었다. 송흥록은 또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처절하게 불렀다. 수궁에 잡혀온 토끼가 죽게 된 줄을 뒤늦게 알고, 용왕에게 간을 빼놓고 왔다고 거짓말로 우기는 대목이 소위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이다. 주위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는 가운데, 병사도 슬쩍 고개를 돌리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찍었다. 마침내 송흥록은 병사에게 맹렬과의 관계를 말하고, 허락을 얻어 다시 맹렬을 데리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송흥록의 괴팍한 성격을 받들다 못한 맹렬은 또 보따리를 쌌다. 송흥록은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는 비통한 심정을 노래로 불렀다. 그 소리를 들은 맹렬은 미운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맹렬은 다시 돌아와 화해하고 같이 살았다고 한다. 맹렬과 송흥록의 로맨스는 사실이라기보다,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붙인 이야기에 불과할 가능성이 더 크다. 당시 사회적 여건으로 보아, 감사나 병사의 수청 기생을 일개 천민 광대가 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또한 송흥록 설화의 일부인 것이다. 송흥록은 귀곡성을 잘 냈다고 한다. 귀곡성은 귀신이 우는 소리로, <춘향가> 중 춘향이 옥에 갇혀 죽음과의 처절한 대결을 벌이는 대목에 나온다. 송흥록은 이 대목을 특히 잘해서, 진주 촉석루에서 이 대목을 부르니 음산한 바람이 불며, 촛불이 일시에 꺼지고,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송흥록의 판소리사에서의 공헌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진양조의 완성이다. 진양조의 개발에 관해서는 그의 매부였던 명창 김성옥과의 일화가 전해진다. 김성옥은 충남 강경 사람으로 당시 대명창이었으나, 학슬풍(일종의 무릎 관절염)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요절하였다. 그의 소리는 그의 아들 김정근을 통해 이어져 중고제 소리가 되었다. 김성옥은 학슬풍으로 오래 누워 지내는 사이에 진양조를 개발하였는데, 송흥록은 이를 오랜 기간 연마하여 진양조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진양조는 판소리 장단 중 가장 느린 대목들에 많이 쓰인다. 따라서 아주 슬픈 대목에 많다. 또한 양반의 음악인 정악의 특성을 간직한 곳도 많다. 따라서 진양조의 개발을 통해 판소리는 양반들의 음악을 판소리화 하는데 성공할 수 있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산유화조(메나리조)의 개발을 들 수 있다. 메나리조는 <심청가> 중에서 심봉사와 뺑덕어미가 황성길을 가며 부르는 ‘뺑덕어미 길소리’에 남아 있다. 산유화조는 경상도 민요의 선율을 판소리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송흥록이 산유화조를 개발했다는 것은, 판소리 속에 경상도 민요의 선율을 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송흥록은 진양조의 완성을 통해 양반들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하고, 산유화조의 개발을 통해 다른 지역의 음악적 요소를 판소리 속에 도입함으로써, 판소리가 계급적,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민족의 음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송흥록을 ‘가왕’이라 부르는 진정한 이유도 아마 이러한 데 있을 것이다. 『조선창극사』에는 송흥록이 <변강쇠타령>, <춘향가> 중 옥중가, <적벽가>를 잘했다고 하였으며, 그의 더늠으로 후세에 전한 단가 한 수를 소개하고 있는데, 사설은 <수궁가> 중 별주부 자라가 토끼를 잡으려고 세상에 막 나와서 본 세상경치 노래한 ‘고고천변’의 일부와 같으나, 이것이 송흥록의 소리를 이은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김창룔이 송흥록의 더늠이라고 하여 부른 ‘옥중가’의 귀곡성이 음반으로 남아 있어서, 송흥록 소리의 흔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송흥록의 소리는 동생 송광록을 통해 송우룡, 송만갑으로 이어지면서 남원, 구례, 순창, 고창 등으로 퍼져 동편제 소리라는 큰 가닥을 형성하였다. 그래서 송흥록은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도 추앙을 받는다. 송흥록이 태어나 살았던 비전리 동네 어구에는 송흥록의 생가터를 알리는 표석이 놓여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음악가의 고향임을 알리는 이 표석을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몇이나 기억하고 있을까. 서양의 모모한 음악가들에 대해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 음악가를 모르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풍토를 바로잡기엔, 그 표석은 너무 작고 초라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