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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1 | [문화저널]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삶의 처연함
글ㆍ윤승희 전주문화방송 PD 윤승희 / 85년 전주 MBC에 입사. 현재 전주MBC R.(2004-02-17 11:45:02)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CD나 음반을 마음껏 골라 듣는 것이 큰 행복이다. 방송국 레코드실은 그런 점에서 행복한 공간이다. 그러나 방송인들에게 레코드실은 그렇게 느긋하고 행복한 공간만은 아니다. 방송시작 몇 분 전까지도 원하는 CD를 찾지 못하고 뱅뱅 돌때가 있다. 그날 방송과 딱 맞아 떨어지는 기막힌 CD를 찾아내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CD장 앞을 서성거릴 때가 있고, 때론 원하는 CD가 이미 대출되고 없는 경우, 그 대출자를 찾아 헤매는 상황도 있다. 최신 유행곡을 방송하는 음악 프로그램 담당자는 곡 찾기에 더 부심하게 된다. 인기곡일수록 찾는 사람들이 많기 마련이다. 한 곡의 희망곡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럴 때, 먼저 대출해간 사람이 우선 사용하라며 문제의 음반을 건네줄 때면 그저 반갑기 기쁘기 한량이 없는 것이다. 요즘은 그 인기곡이라는 게 두세달을 넘기기 어렵다. 한 두주 사이에 인기가 급부상하고 또 한 주가 지나면 다시 새로운 곡이 그 자리를 차고 앉는다. 한참 인기를 끄는 CD는 당장 CD님(?)으로 대우를 받게되고, 어쩌다 우연히 CD장에 꽂혀있는 걸 발견하기라도 하면 뛸 듯이 기쁜 것이다. 무릇, 모든 대중가요는, 그렇듯 방송인들에게 귀히 모셔지는 그 순간을 꿈꾸며 탄생된다. 단 몇주라도 최정상의 인기가 지속되면 돈과 인기가 한꺼번에 얻어진다. 그러나, 한달이면 수백장씩 새로 탄생되는 대중가요 대부분은 그늘 속에 묻혀버리기 쉽다. 어떤 노래가, 어떤 음악이 나왔는지 대중들에게 전혀 인식되지 못한 채 소복히 먼지를 뒤집어 쓰고 세월만 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큰 인기는 끌지 않으면서도 오랜 세월 잊혀지지 않는 노래, 오래도록 사랑받는 가수가 있다. ‘장서방네 노을’(정태준 작사, 작곡)도 바로 그렇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 먼 산에는 단풍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저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이렇게 시작되는 노랫말이 국악리듬이 얹혀져 있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소슬한 늦가을 바람같은 노랫말이 내 가슴을 처연하게 헤집고 들어왔었다. 이 노래를 처음 듣던 때가 내 나이 스물 여섯, 아직 인생의 쓸쓸함이 무엇인지 짐작할 만한 나이가 아님에도, 왠지 모를 서글픔에 젖어들곤 했었다. 그런데 얼마전, 국악단 <소리샘>의 연습장에서 이 노래를 들었다. 연습장이었던 관계로 첫 부분만을 반복해서 들었는데, 국악연주로 다시듣는 이 음악이,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삶의 처연함을 생각나게 했다. 「…솔밭길로 야산넘어 갯바람은 불고, 님의 얼굴 노을빛에 취한 듯이 붉은데, 곱은 허리 곧추 세우고 뒷짐지고 서면, 바람부는 황포 돛대 오늘 다시 보오리다…」 국악연주로 듣는 이 음악은 또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더불어, 해지는 초겨울녘, 시린 손을 부벼넣고 야윈 어깨를 기대고 섰을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샌가 그 사람들 안에 서 있게 된 나 자신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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