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1 | [사람과사람]
화가 송칠성
그에게 재탕삼탕은 없다
글ㆍ손희정 문화저널 기자
(2004-02-17 11:12:46)
화가 송칠성, 그는 좀 별난 구석이 있다. 별로 우습지도 않은데 일단 크게 웃고 본다는 식이고, 유창한 언변으로 그와 대화를 하고 있노라면 사기를 당하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게 된다. 거친 운전으로 이리저리 부딪힌 흔적이 많은 그의 자가용이 그 대표적인 별난 구석일 것이고, 말을 좀 함부로 해서 사람들 맘을 아프게 하면서도 ‘그게 다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는 그의 ‘핑계아닌 핑계’가 그가 가진 또다른 별난 구석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그를 ‘벽규(푸른별)’나 ‘돈키호테’ 등으로 이름을 대신해 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꿈을 먹고 사는 아름다운 별종
수많은 별종 가운데서도 그는 “꿈을 먹고 사는 아름다운 별종”이다. 그래서 그의 말들이 부왕부왕하게 느껴지고 그가 사기꾼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 이유는 그렇다. 그는 그 자신을 이기주의자라고 표현하는데 그런 이기주의자들만이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저 자신만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보면 세상은 하나이며 타인과 나의 모습이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작품 하나도 개인의 소유물일 수 없다는 것이 그가 꾸는 꿈이며 모두가 생색내는, 모두가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예술행사를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이상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게 그 이뤄질 수 없는 꿈을 버리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오랜 염원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살고자하는 파라다이스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군산에서 하는 작업들은 그 잊었던 우리들의 꿈과 이상을 깨워주는 작업들인 셈이다.
진포문화예술원은 그의 상상력과 가능성을 받아들여 줬다. 96년 초 진포문화마당이 문화예술원으로 그 위상을 높이면서 그를 기획이사로 앉혔다. 그러나 송칠성씨는 역으로 진포문화원을 문화운동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도시 전체를 문화공간으로 꾸미자’는 계획은 이곳에서 서서히 터를 잡아나가기 시작했고 올해 첫 번째 열린 허수아비 미술제는 그가 터뜨린 ‘선전포고 1탄’으로 성과를 올렸다. 그의 강점은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 재탕삼탕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송칠성의 천재성에 공감한다고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한번쯤 그에게 ‘당한’ 경험들이 있다. 그들은 회고하기를 ‘정말 포악한 사람이었다’라며 입을 모은다. 체면치레라는 게 없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안좋은 점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이 면박을 주면서 혼을 낸다는 것. 말을 험하게 해서 여러사람이 입은 상처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다운 황당함이 또한번 드러나는데,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못된 습관이나 행동, 사고를 그 사람으로부터 떨궈 버리려고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려는 핑계로 들릴 수 있겠지만 당한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는 점으로 미뤄봐서 그는 정말 그 꿈을 먹는 사람,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명상체험으로 문화운동을?
두 번 말하지만 그는 재탕이라는 것은 없다. 한번 한 것은 이미 과거일 뿐이다. 남들은 하나 짜내기도 어려운 아이디어를 그는 한두개도 아니고 머릿속에 가득 채워놓은 다음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쓰는 여유가 있다. 남들은 유명한 학원이다 개인교습이다 해서 그림을 배우고도 가기 어렵다는 홍대 미대를, 그것도 혼자 힘으로 너끈히 입학했다는 그 똑똑함 때문일까? 아니, 그에게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어떤 비법이 있다.
그 비법이라는 것은 그의 생활자체를 먼저 궁핍하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독한 갈증’으로 자기 자신을 최대한 궁지에 몰아넣는다. 작가적 기질은 무언가 절박한 상황에서만 발현된다는 그의 믿음 때문에 그의 육신은 추위나 굶주림과 같은 고통에서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다고해서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마음을 비우고 이색적인 체험을 경험해야만 참신한 아이디어가,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대학을 떠나면서 세가지 기로에 서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아예 예술을 버리고 인도행 비행기를 타는 것, 명상에 눈을 뜬 뒤로부터 익숙한 사이가 된 오쇼 라즈니쉬의 영향을 받아 인도에 가서 도닦는 인생을 향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 기로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서울에 남아서 남들처럼 그림도 그리고 돈도 버는 것이었는데 그는 결국 이런 저런 일들을 때려치우고 문화운동을 하기로 맘먹었다. 대학에서 배웠던 고정화된 틀을 떠나 새로운 환경 속에서 문화운동의 모델들을 제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86년 그가 고향 군산으로 돌아왔을 때 고향은 이미 그 세가지 기로를 그에게 열어주고 있었다. 그는 미술학원을 차려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문화운동을 했다. 그리고 7년만에 모든 것들을 버리고 인도대신 군산 월명공원 뒤 호숫가에서 명상을 시작했다.
90년대 초까지도 미술계를 풍미했던 민족미술운동이 그가 처음 시작할 수 있었던 문화운동이었다. 주로 시민, 사회단체와 손을 잡고 벽화, 걸개그림, 판화를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활동하는 가운데에도 미술학원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시간을 마련했으며 하루에 7시간 정도는 부둣가나 어촌지역에 가서 구상작업을 해왔다. 거기서 어민들의 삶을 캔버스에 옮기곤 했는데 그것만 해도 3백점 가까이 된다고 한다. 월명공원앞에 자리잡은 그의 화실에는 발표를 기다리는 그 그림들이 가득하게 쌓여 있다. 돈만 있으면 발표도 해보련만 있는 것이라곤 갈증에 쪄든 그의 육신과 열정뿐이어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있다.
군산에서의 이같은 생활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산속으로 들어간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91년 학원을 그만두면서 그의 활동은 모두 중단됐다. 예술가로서, 사회운동가로서, 문화일꾼과 선생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던 지난 7년이었지만 그는 그때 너무 치쳐있었고 자신의 활동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시 새로 시작해야 했다. 자신이 배우고 걸어온 그의 발자국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리고 하얀 캔버스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의 곁을 그렇게 떠났다. 호수가 보이는 작은 둔덕에 앉아 비를 맞으면서, 또 해와 달과 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씩 하나씩 버리고 지우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버리는 일이 꼬박 3년 걸렸고 ‘하얀 도화지’만 남았다. 이제 겨우 허수아비 하나 달랑 그려놓은 도화지는 송칠성씨가 버리면서 얻은 새로운 아이디어들로 채색되어 갈 것이다.
도시전체를 문화공간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까 되려 모든 것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으로 그간의 일들을 다시 시작했다. 진포문화원을 시민문화공간으로 활짝 열어두고 지역 전체를 문화공간으로 꾸미기 위해 지역에서 행위, 설치 페스티발을 열기위한 준비들을 시작했고 정체된 지역문화를 흐르게 하기 위해 미술협회활동도 시작했다. 허수아비 미술제를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이제 조금쯤 여유를 부릴 법도 한데 2탄, 3탄을 준비해 나갈 것이라면서 조바심을 떤다.
개인적인 미술활동도 그에게는 문화공동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 못지않게 소중한 일이다. 그는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미적감각, 예술혼을 찾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벽화나 민화, 단청을 보면서 그 속에 흐르는 ‘신명’을 뽑아내고 맥박과 정신을 읽어내는 작업에 몸이 닳고 있다. 거기에 질료에서 오는 대담하고 대륙적인 현대감각을 결합시켜 작품을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송칠성식 그림’이다.
그는 그렇게 계속 흐르는 강이다. 때로는 모난 바위를 깎으면서 때로는 소용돌이치다가도 못으로 흘러들어가 고여버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빠르게 또 어떤 때는 느리게 흐르는 강이다. 그러나 그 강물은 언젠가 ‘바다’에 도착할 것이라는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고야 만다. 이같은 진실은 우리에겐 커다란 위안이다. 송칠성씨의 황당한 꿈들도 언젠가는 도달할 ‘도시 전체가, 사람 전체가 문화공간, 문화인이 된다’는 바다로 흘러들어가기 위해 잠시 대기실에 앉아있는 것 뿐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