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1 | [문화칼럼]
문화가 권력의 시녀인가
글ㆍ임헌영 문학평론가
임헌영 / 70년대부터 민족문학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한국의 (2004-02-17 11:10:35)
열 채의 새로운 건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채의 초라한 원형 보존이다. 바로 그것이 문화예술정책의 기본이다.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가까이에다 새로운 전시ㆍ편의 시설을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문화예술의 유산 정책인데 우리는 그간 가시적인 전시물 만들기에 익숙해져서 원형을 부수는 기술에 너무 숙달되어 버린게 아닌가 싶다.
선거철만 되면 각종 공약들이 한여름 녹음처럼 무성하다가 끝나고 나면 당선자 등록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그 철석같았던 약속의 언어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가 싶다가 이내 으스스한 겨울의 대지 속으로 묻혀 버리곤 해왔다. 언제나 그랬다. 선거 때만 되면 곧 우리나라는 민주주의가 정착하여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적인 일대 혁신기를 맞아 새로운 국가와 민족으로 발돋움할 것 같은 기대와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흥미있게 진행되고 있는 이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후보자들의 면면이나 자신감 넘치는 여러 발언에 나타난 우리나라는 지금 국민들이 걱정하는 모든 고민이 순식간에 해결될 뿐만 아니라 남북통일도 이룩될 것 같은 기대로 한껏 가슴 부풀게 하기에 손색이 없다. 사람들은 후보자의 자격 운운하며 따지기도 하지만 언어의 잔칫상으로 평한다면 누가 되든 국민들에게 돌아올 진수성찬은 별 차이 없이 풍성할 것으로 보인다. 거짓말도 일종의 정치행위라고 믿는 필자로서는 속고 안 속는 것은 유권자의 현명성에 달린 게 아닐까 싶다. 여러 번 속은 경험이 너무나 풍부한 우리 국민들이 이번에도 또 속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이번 입후보자들이 아직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는 문제들이 있다는 점은 우리를 서운하게 만든다.
이른바 문화정책이다. 우리나라 역대 정당(사실 엄격히 말하면 정당은 없고 사당만 있었던 셈이지만)들은 예외없이 정강정책에서 ‘민족문화’의 창달을 내세워 왔는데 이 점에서는 여야 가릴 것도 없이 엇비슷한 내용이었다. 이 말은 곧 모든 정당들이 문화정책을 정치경제의 부속물쯤으로 경시하여 정강정책의 구색상 한마디 마지못해 집어넣어둔 맹장같은 구절에 지나지 않았던 반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사실 그랬다. 대부분의 문화예술 단체들은 만년 여당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필요하다면 간접적인 선거 운동도 불사해온 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관성의 법칙이 오늘에도 그대로 전해져 내려와 정치권에서는 문화예술은 으레껏 권력의 만찬장의 시녀쯤으로 치부해 버린대도 표를 얻고 잃는데는 별 지장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대통령 후보자들은 엄청난 양의 공약과 정책들은 공개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토론을 통해서도 하고 싶었던 말은 웬만큼 할 수 있는 기회를 향수했었다. 그런데 유감천만이게도 문화예술 정책에 관한 문제는 아예 의제에 조차 오르지 못하고 있다, 고작 교육문제만 부각시켜 입장아들은 찧고 있지만 그것도 정작 중요한 교육 내용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형식적인 입시 제도만 가지고 의상실에서 새옷 고르듯이 몇 번이고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는 수준이다.
정작 교육의 알맹이인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는 곧 학술과 문화예술 정책으로 이에 대한 정책이 확립되면 청소년 범죄니 입시니 민족정기니 하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쟁점에 대한 해결책도 함께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곧 학술, 문화ㆍ예술을 정권의 척후병으로 어용화시키려는 목적으로만 보는 입장을 탈피하는데서만 가능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문화정책이란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정권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나라 문화정책은 지극히 여당 편향적인 성향으로 일관해 왔는데, 세칭 문민정권이란 ‘개혁’ 정치의 구호가 요란했던 기시에도 정작 문화정책에서는 그 구조가 크게 바꿔지지 않았다.
오히려 문화정책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계기는 지방자치제였다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1995년 지자제 원년 이후 우리나라는 시ㆍ군ㆍ구 단위의 문화예술 창달을 위한 각종 사업과 행사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어느새 전국 어디를 가나 역사ㆍ문화예술 유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을만큼 발굴과 수리와 재건의 모습이 시선을 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선진 외국의 경우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각종 문화예술 유적들이 방치 혹은 아예 실종의 상태로 남아있는 예가 너무나 많다. 한 작가가 머물다 간 여관까지도 밝히는 일본이나, 조그만 간판을 빠짐없이 달아두거나 동상을 건립한 서구 여러 나라와 비교할 때 우리는 역시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전시행정적 성과의 여파로 조성되었거나 지금도 추진 중인 각종 문화예술 유산의 기념사업들이다. 엄청난 자금을 조성하여 큼직한 건물을 짓거나 아예 원형은 허물어 버리고 말끔히 새로운 집을 짓는다거나 초현대적인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의 현상은 이제 낯설지 않다. 웬만한 문화예술 유적지는 거의가 현대적인 건축물로 대체되고 있는데 이게 과연 그 지역적 특성에 맞는 문화정책인가 하는 아쉬움을 자아낸다. 예컨대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의 생가를 찾았을 때 옛 집과 현대식 기념관이 지닌 위화감을 잊을 수 없다. 전봉준 생가의 현대화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은 비단 전북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예외없이 이런 대형화ㆍ현대화ㆍ새것화 문화보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 겉모습에 비하여 변변한 테이프나 연구목록 하나 볼 수 없는 내용의 공허함이란!
열 채의 새로운 건축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채의 초라한 원형 보존이다. 그것이 문화예술정책의 기본이다.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가까이에다 새로운 전시ㆍ편의 시설을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문화 예술의 유산 정책인데 우리는 그간 가시적인 전시물 만들기에 익숙해져서 원형을 부수는 기술에 너무 숙달되어 버린게 아닌가 싶다.
21세기가 문화정책의 세기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음을 감안한다면 이제 우리는 대통령 후보들에게 지방화 시대에 걸맞은 문화정책을 찬찬히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방화 시대라고 지역마다 멋대로 부수고 파헤치는 문화정책이 아닌 민족문화의 보호육성 차원에서의 일관된 중앙부서의 문화정책이 아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