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1 | [문화시평]
연극 <왕국의 노을>
감정이입구조와 심리반응연기
글ㆍ김길수 연극평론가, 순천대학교 교수·문예창작과
(2004-02-17 10:57:30)
전주시립극단의 <왕국의 노을>(김승규 작, 안상철 연출) 공연은 당대의 춤과 기예를 통해 백제의 에술혼, 백제인의 민족 정기를 상기시켜 주었고 여기에 백제여인과 신라장수 간의 비련의 만남과 사랑, 고난의 유민사를 클로즈업시켜 전라도 관객들에게 뭉클한 동질감을 자아내준바 있다.
이 공연엔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간의 긴장 구도, 스릴과 써스펜스 유발구도가 흡인력을 발휘할 주요 덕목으로 작용한다. 백제유민들의 설움과 애환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으로서 백제 고유의 연희와 무예, 춤이 무대화되고 진양조의 대금선율이 심산유곡 사이를 울려퍼짐으로써 일련의 볼거리와 들을거리를 제공해준다.
어둡고 무거운 전체 색조에 폭소를 불어일으키는 희극 그림이 가미되어 관객은 부담없는 휴식과 오락성을 만끽한다. 가족을 황산벌 전투에서 다잃은 백제여인(서유정 분)과 신라장수연신(김성태 분)의 만남과 사랑은 당대 정서를 감안할 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갈등과 고뇌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백제유민들의 향기가 거세질수록 당군의 횡포 역시 극에 달하고 이 과정에서 백제의 옛장수 무평(홍석찬 분)은 부상당한 채 당군에게 쫓기다 혜명대사(조민철 분)의 사찰에 몸을 숨긴다. 그를 따르는 해인(신상만 분)은 백제의 재건을 독려하지만 역부족이다. 당군의 횡포와 희롱에 시달리는 백제 사람들을 우연히 신라장수 연신이 돕게되고 이 과정에서 연신과 백제 여인 춘녀는 깊은 신뢰와 연정 관계를 맺는다.
옛 백제의 귀족인 필례(전춘근 분)는 손녀 춘녀가 철천지의 원수라 여기던 신라인의 씨를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당혹과 절망을 이기지 못한 채 자결한다.
춘녀가 신라장수와 가까워질수록 딜레마는 증폭될 수 밖에 없다. 갈등구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관객은 깊이 빨려들지 못하는가? 춘녀의 성격 설정이나 행적이 너무 단조롭고 평면적이다. 그녀 행적에 대한 숨은 이야기가 충분히 비축되고 창조되어 극의 전개와 더불어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고서 풀어헤쳐져야 한다. 숨은 이야기가 현재화되는 과정에서 충격 내지 위기감이 고조될 때 정통 연극은 분석드라마로서 더욱 탄탄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작고한 부모, 현재의 할머니, 혜명대사, 스승 설화(정경선 분), 기예를 배우는 동료 내지 친구들과의 과거 만남, 이들 간의 숨은 관계, 숨은 이야기, 그것들이 충분한 분량으로 만들어져 적재적소에 상호 부딪치기도 하고 상호 맞물려 극적 갈등과 위기감 창출에 기여해야한다. 질투심이나 적개심으로 인한 동료란이(홍지예 분)의 밀고행위, 이로인한 쫓김과 “애인이 붙잡혔으면 어쩌나?”하는 불안의식이 고조될 수 있다. 연신의 붙잡힘, 고초 상황의 극대화, ‘사랑하는 신라장수 연신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스승이나 동료들의 요구대로 백제의 예술혼을 지켜낼 것이냐’ 이 두 부분에서의 갈등, 이런 춘녀의 갈등이 관객의 갈등으로 전이되도록 구성되었더라면 이 연극은 보다 강렬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제장수 무평과 그를 따르는 해인(신상만 분)의 설정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 숨은 과거 이야기를 현재화시켜 주면서 주인공들의 갈등 상황을 배면으로나마 암시, 지원해준다.
갈등구조 못지 않게 이 공연에서 중요한 처방으로 스릴, 써스펜스를 통한 긴장 유발작업이다. 백제 장수 무평(홍석찬 분)이 급박하게 쫓기는 상황, 당나라 병사를 살해한 주범이 신라 장수 연신임이 밝혀지면서 벌어지는 추적극 구조, 이 두 흐름이 치열하게 강화되어 상호 긴밀한 연결고리로 이어졌다면 위기의식 유발은 상승작용을 하여 관객을 보다 확실하게 사로잡았을 것이다.
공연 설계는 제2의 창작과정이나 다름없다. 원작에서의 미비한 긴장구조나 갈등구조를 나름대로 재변용시켜 관객을 극적 아우라 속에 끌어들이는 처방이 필요하다. 안상철 연출설계의 장점은 일단 눈에 보이는 무대 설계 과정에서 치밀한 공을 들인다는 점에 있다. 무대그림은 원극법이 살아나 마치 심산유곡의 어느 지점이라는 환상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에 백제 고유의 기예라 할 수 있는 다이나믹한 칼싸움과 고유의 전승춤은 일단의 볼거리로서 관객을 즐겁게 하는데에 한 몫 한다. 아름다우면서도 비장함이 스며있는 춤은 백제인의 예술정신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이런 가시적 무대처방들이 확실한 무대 장악력을 발휘했는지, 춘녀의 갈등과 번민, 그 미묘한 심리변화과정을 담아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필례의 자결 사건은 가장 극적인 사건이면서도 충격, 당혹감을 불러 일으켜줄 수 있다. 이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 특히 할머니를 잃은 춘녀의 몸부림, 그 고뇌와 아픔, 저항의 결과로서 연신에 대한 2차 반응기호, 이런 심리변화에 대한 비유성 연극그림에 대한 치열한 탐색과 천착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
무대후면 높다란 단에서 주연 배우 전춘근(필례 역)의 위치와 동선, 주변 인물들과의 만남 장면은 좁은 공간, 자유롭지 못한 움직임으로 보는 이들에게 불안함과 불편함으로 내비쳐질 공산이 크다. 주변 배우들의 반응연기 역시 확실한 동선으로 연결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사실적 무대그림 만들기에 이 공연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실적 구도로 인해 비유 내지 상징의 묘미가 약화된 아쉬움이 있다.
심리변화, 고뇌에 걸맞는 반응연기, 이를 겨냥한 감정이입구성법, 이에 대한 메타연극적 해법과 그림 설계작업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따라 다니는 최대 숙제임을 이번 공연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