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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0 | [매체엿보기]
흔들리는 시대 흔들리는 가을, 그리고 박노해와 베토벤 박노해『사람만이 희망이다』 1997, 윤소영『베토벤 ‘윤리적 미’ 또는 ‘승화된 에로스’』1997공감
글·양승호 전북대 강사·철학과 (2004-02-12 16:45:07)
신문에서 광고를 보았다. 박노해의 새 시점이 나왔다는.. 신문광고를 본 후 세 번쯤 서점엘 다녀왔다. 하지만 새로 산 책에 시집은 없었다. 마치 깜박잊은거처럼 ‘아차!’했지만 실은 알고 있다. 반은 의도적으로 잊었다는 것을. 시집 한권사는 일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매번 반은 잊고 반은 그런 자신에 대해 어쩔줄 몰라 하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가 너무 식상하게 느껴지던 자신의 변함에 스스로가 배신감을 느낄 것이고 그의 이야기가 여느 사람들처럼 너무 달라져 있으면 그에 대한 배신감으로 밤잠을 설칠것같고, 이런 자아 분열적인 증세가 이시대 어디 나뿐일까? 하지만 80년대를 살아온 경험은 기어이 그 책을 사게 했고, 읽게했다. 우선 당황한 것은 그의 목소리다. 애타게 『노동의 새벽』(1984)을 기다리던 그의 목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쿵하게 울렸다. 『머리띠를 묶으며』(1991)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옴직한 그만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참된시작』(1993)에서는 아주 단호했고 강직했다. 그런데 한결 더 낮아진 작은목소리로 시작되는 「아직과 이미 사이」(『사람만이 희망이다』21쪽)는 작은 시냇가의 냇물흐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떤 이에게는 그의 『하심』(80쪽)의 소리가 속살거리듯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우선 귀 따갑지 않아 좋았다. 그의 나지막하면서도 장중한 소리를 듣노라니, 무슨 한적한 법당에서 스님의 범인을 듣는 느낌이었다. 종교적인 설교라면 으레 지루해야 할텐데 지루하지 않았다. 전혀 지루한 줄 몰랐다. 그의 바램부터 읽혀졌다. 그의 말대로 ‘천년이 넘도록 불교가 신성한 까닭’은 오로지 ‘청정수행하는 출가스님’(228쪽)들 덕분인것처럼 그는 지금 사회주의를 위해 청정수행하는 출가승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설령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241쪽)는 마음을 지닌 사회주의의 출가승은 먼저 ‘나의 이념과 몸생활과 감성과 도덕과 철학과 영혼과 내 존재 전체를 혁명’(240쪽)애햐 한다. 그래서 「오늘부터 내가 먼저」다. 어찌보면 무슨 방송국 캠페인 같다. 하지만 ‘언 살 터진’「겨울사내」(192쪽)가는 그는 이제 더 이상 「노동의 새벽」이 오는 그 곳만을 애타게 갈구하지 않는다. ‘어둠’이 ‘겨울’인 지금 이 곳을 어떻게 그곳일수 있게, 새벽이 될수 있게 하는지가 화두다. 현실인 이곳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에 ‘예’이고 이것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아니오’이며 아직은 그곳이 아니기 때문에 ‘아니오’이고 언젠가는 꼭 도달해야기 때문에 ‘예’(108쪽)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마치 극락이란 삶의 저 편, 유토피아가 아닌 것처럼 ‘삶의본연’인 자본주의를 긍정해야만 ‘삶의당연’(108쪽)인 사회주의로 진보할 수 있다. ‘현실변화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얻기 위하여’(108쪽) 그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고 자본주의를 ‘삶의 본연’으로 인정한다. 인정하기란 쉬운일이다. 하지만 ‘겨울에도 딸기 맛을 볼수 있는 이좋은 세상에’(52쪽), 곳곳에서 ‘빨갛게 잘 익은 싱싱한 딸기’(53쪽)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느려터졌어도’ ‘아프게 커 오는봄’(54쪽)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품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이처럼 잘 흔들리는 우리에게 그가 하는 말은 회의하면서도 ‘길찾는 그사람이 길이고 희망’(34쪽)이란다. 그래도 망설이기 잘하는 나 또 망설인다. ‘베토벤 CD를 사야되나? 말아야 되나?’ 시인의 내면을 아프게 내리쳤던 그 세월의 변화는 이론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PD진영을 교육한 교시였으며, 탁월한 알튀세르 이론가로 널리 알려진 윤소영은 그의 새책 『베토벤』에서 베토벤이야 말로 인류역사에서 마르크스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라고 극찬한다. 마르크스 주의와 악성 베토벤이 결합될 수 있다는 것, 적어도 친화성을 가진다는 것은 8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시대에는 상상할수 없었던 주제이다. 『현실과 과학』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론에 이르기 까지 그는 지금이나 그때나 엄격한 이론을 전개하는 보기 드문 사람이다. 결코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통찰하면서도 결코 마르크스를 떠날수없었던 윤소영의 다소 뜬금없는 베토벤론은 그래서 여러 사람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1994년의 「PD의 진실」에 이어서 『베토벤』에는 「PD의 진실(2)」이 나온다. 「PD의 진실(2)」에서 스피노자 - 마르크스 주의가 ‘윤리적 미’를 요구하고 그 ‘윤리적 미’에 부합한 희귀한 사례가 베토벤과 그의 후기작품들이라는 사실(『베토벤』255쪽)을 들어 마르크스주의와 베토벤 사이의 연결을 시도한다. 스피노자 - 마르크스주의가 윤리적 미로서 정동의 치료를 시도한다면 문학과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음악이 수단으로서 문제시된다. 문학은 민족적언어와 결합되어 부적합하고, 일체의 언어를 초월하려는 고전음악이 가능한 수단이 된다. 고전음악중에서도 베토벤의 음악이 성공적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볼때에 세계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남한의 운동권 출신 음악가들이 브레히트적인 미학이론 즉 소격이론에 대해(『베토벤』270쪽)하여 어떤 음악가도 이런점을 부각시키지 않고 있다. 아마 그래서 할 수 없이 윤소영은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토벤과 마르크스가 버금가는 세기의 위인이라고! 어떤사람에게는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죽은개만도 못하겠지만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마르크스는 아직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직접적인 비교대상은 베토벤의 음악시계와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가공했지만 미완성이었고, 알튀세르의 과잉결정에 이르기까지 가공은 계속되고 있다. 베토벤의 중기 음악은 소나타 형식인데,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은 두 개의 주제(subject)혹은 두 개의 주체가 등장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두 개의 주체가 등장함으로서 모순이 전개된다. 이점에서 베토벤의 음악은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통한다. 베토벤의 후기 음악은 푸가 형식등이 되는데, 여기서는 여러개의 주체(혹은 주제)가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을 제대로 가공하는데 실패해서 과잉결정을 표현할 수 없었지만 베토벤은 그 음악속에서 변증법의 과잉결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베토벤은 음악에서 마르크스보다도 다 마르크스적인 것이다. 아마 누구나 베토벤의 후기 음악에서 변증법을 포착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베토벤의 후기음악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 단 한명이라도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진수까지 배운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일 것이다.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말에 여전히 귀기울이는 것이 이 시대 처세술일까? 엇갈리는 심정에도 불구하고 박노해의 시집을 읽었고 윤소영의 『베토벤』은 확고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긴가민가 한다. 하지만 워낙 대단한 음악이라고 하니 ‘밑져야 본전’이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베토벤음악도 듣는다. 자본주의적 계산 경제의 시대에서 벗어나서 데리다의 선물의 사회가 오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즉 아무 대가없이 보시하는 마음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 이가을에는 베토벤의 음악 및 『베토벤』과 박노해의 시집이 참 좋습니다. 잘하면, 엄청난 보물을 얻을수도 있습니다.” 양승호 / 전북대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마쳤다. 독일현대철학을 전공했으며, 지금은 전북대, 전주대에 출강하고 있다. 얼마전 『우리들의 세계, 우리들의 철학』이라는 책을 펴낸 전북철학 연구소에서 활동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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