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0 | [세대횡단 문화읽기]
‘또하나의 아리랑’
글·김정기 KBS전주총국 PD
(2004-02-12 16:43:41)
赤國不殘悉 一篇成敗甲付
(적국불잔실 일편성패갑부)
淸國基外之義 可成程可相動事
(청국기외지의 가성정가상동사)
1957년 정유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각지방 영주에게 보낸 개전 명령서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적국민을 남김없이 죽여라. 청국과 그외의 곳에서는 알아서 평정하라’는 내용이다.
정유년 당시 일본은 조선팔도를 색깔로 구별했다. 전라도를 적색, 경상도는 백색, 충청도와 경기도는 황색, 함경도는 흑색을 칠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전라도를 적국, 충청도·경기도는 청국이라 불렀다. 여기서 그외는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말한다. 1592년 임진왜란후, 정유년 제침략 목표가 바로 전라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풍신수길이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전라도 공격을 명령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되는데..
바로 이 의문을 풀기 위하여 ‘정유재란’ 그후 4백년이란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정유재란과 임진왜란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4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또 어떻게 이들 역사를 재조명해야 할 것인지가 가장 큰 숙제였다.
어떻게 보면, 평소 지리와 역사에 관심이 있다고 자신해 왔던 터지만, 사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은 그게 그거 아니냐는 지식이 전부였던 나로서는 정유재란이란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게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4백주년을 맞이해서 잊혀진 역사를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고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공감을 형성해 보자는 생각에서 밑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은 한편이 아니라 두편(2부작)이었다. 고민 끝에 1부(편)는 정유재란의 전부를 그릴수 있는 정유재란의 발발에서 종전까지에 초점을 맞추었고, 2부(편)는 우리 전북지역에서 끌려간 도공들의 노래에 무게중심늘 얹어놓고, 습득되는 모든지식을 짜맞추어 갔다. 그래서 제1부의 제목이 ‘오사카성의 비밀’, 제2부는 ‘또하나의 아리랑’이다.
제1부 오사카성의 비밀
관심있게 본 사람이라면 왜 오사카성의 비밀이라고 했는지 의문(?)을 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원래 정하고자 했던 타이틀은 ‘전라도를 공략하라’였다. 조직내부의 열띤 논의 끝에 연출자인 자신으로서는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아직도 전라도는 뜨거운 감자임이 틀림없다는 확인을 한 셈이다.)
제작 뒷얘기부터 한 셈인데 제 1부는 풍신수길, 왜성(矮星), 정유대전쟁,코무덤, 최후의 승리등 크게 다섯부분으로 나눴다.
풍신수길이 그의 출신지인 나고야가 포함돼있는 오사카, 교토등 관서지방에서는 일본의 영웅으로 취급된다는 이야기를 담았고, 도쿄등 관동지방에서는 그리 후한 평가를 주지않는다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시간과 이야기 전개상 삭제했다. 한마디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임을 말하려 거리 인터뷰도 하고일본에서 방송된 자료도 삽입시켰다. 또 그의 명령으로 서로 주고 받았다는 조선인을 죽인 흔적인 코영수중을 보고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정유재란의 참혹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실 나 자신의 무지와 그동안의 무관심을 부끄러워 해야 했던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 남해안 8백리에 쌓은 왜성(矮星)이다.
왜군은 전남순천에서 울산에 이르는 바닷가 전망 좋은 곳에 성을 쌓았는데 작게는 18개에서 32개까지 조사된다. 프로그램에서는 정확한 성의 개수를 확인할 길이없어 대략 20여개로 방송했다.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풍신수길은 왜군의 병력을 다 철수시키지 않고 아직도 조선에서는 전쟁중이라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주려했다.
그리고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에선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나 강원도 등 조선 4도를 달라고 한 것을 보며 조선에 대한 영구지배 야심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던 코무덤부분에선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일본이 귀무덤이라 부른 교토의 이총엔 울타리로 많은 돌기둥이 서있었는데 기둥 하나하나에 새겨진 것은, 메이지 유신 당시 가부끼(일본 전통극) 배우들의 이름이었다. 메이지 유신과 더불어 조선을 다시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풍신수길의 업적인 코무덤(일본측 귀무덤)에 와 그의 정신을 새기고, 다짐했다는 표석이었다.
코무덤은 사실 조선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모신 곳이라기 보다는 그들 일본의 호전적인 전의(戰意)를 다지기 위한 곳이라 할 수 있다. 12만 병력으로 1597년 정유년, 음력 1월 14일 부산 다대포에 상륙했던 왜군은, 이듬해인 1598년 수길의 죽음으로 부랴부랴 일본으로 도망가게 된다. 이때 돈벌이와 빈배를 채우기에 필요한 사람, 문화재등 닥치는 대로 싣고간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조선땅에 산사람 중에서도 코없는 사람들이 난리후 2~30년후까지도 있었다는 기록을 남긴채 말이다.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등 기록)
제2부 또하나의 아리랑
우리에겐 잊혀진 노래가 있었다. 고려 초부터 조선중엽까지 일반서민에서 양반까지 누구나가 즐겨 부르던 걸로 추정된 ‘오늘이 오늘이소서(오나리 오나리쇼셔)’란 노래다. 오늘의 기쁨이 내일 또 모레도 내내 무궁토록 이어지기를 기원한 내용인데, 우리나라에선 시나브로 언제사라진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정유재란 직후 구주지역의 아리따와 가고시마로 끌려간 도공들은 최근까지 그들의 제례의식에서 이 노래를 부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아리랑이란 제목을 붙인것도 약간은 슬프고 어두운 느낌이 드는 아리랑보다는 긍정적이며 밝은 느낌을 주는 오늘이 오늘이소서가 민족의 노래로 더욱 더 많이 불리워 지길 원하는 마음에서다. 지금의 가고시마(美山)에는 메이지 유신 당시까지 나에시로가와라는 조선인 마을이 3백년간 이어져 내려온걸 당시의 조선어 교본이라든가 숙향전등 책자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막부시대의 요구(당시 조선찻잔은 성하나하고 맞바꿀정도로 값을 쳐 주었다)에 의해 3백여년간 지속된 이 마을은 메이지 유신의 정한론과 더불어 해체되어 일본 각지로 조선인들이 흩어지게 되는데, 바로 2차대전 1급전범자이자 당시 외상(外相)이었던 도고시게노리가 바로 이마을 출신 도공 박평의의 후손이다. 또 이프로그램에선 노래의 추적과 더불어 아리따와 사쓰마로 구분되는 일본 양대도자기의 뿌리가 우리 전북지역, 남원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문을 풀어가는데 그 초점을 맞추었다.
남원과 아리따의난가와바라를 비교하고 그 유사성을 문헌과자연, 인터뷰등을 통해 밝혔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내에서도 누가 조선의 어디 출신이라는 명확한 기록은 없었는데 프로그램을 위해 취재하며 느꼈던 것은 우리가 들은것처럼 이들 아리따와 사스마 지역 도공들의 후손역시 여느 일본인들처럼 뿌리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뿌리를 우리가 만들어 주는 것도 괜찮다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삼한시대의 왜구 침략, 1592년 임진왜란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 1910년 한일합병함을 통해서, 오늘날에 한가지 정리할 수 있는 사실은 조선을 정벌하고 영구 지배하겠다는 일본의 야심은 일본의 통치이데올로기로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에게 한맺힌 정유재란 4백년이 일본인들에겐 풍신수길 서거 4백주년으로 전혀 다르게 애도됨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또다른 시각으로 보면 일본관서(오사카, 교토, 나라등) 지방의 백제 유적과 더불어 구주(아리따, 가고시마 등)지역의 전라도 문화등은 역으로 그들의 뿌리가 이곳 우리 전북지역임을 확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이 생각할 때 그들의 조상의 땅이라는 관광문화 차원에서 훌륭한 잇점이 우리 지역엔 유무형의 자산으로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이다.
오늘이 오늘이소서
매일이 오늘이소서
새마나 주야장상에
오늘이 오늘이소서
오늘이 오늘이소서
굳이 오늘이 오늘이소서 노래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결론적으로 우리 전북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가꾸는 작업을 시작해야만 한다.
김정기 / 60년 5월 출생. 79년 전북대 무역학과에 입학 87년 1월 KBS PD로 입사했다. 지역 역사에 관심을 갖고 동학, 정유재란 등 전북역사를 재조명해 다큐멘터라로 제작한 바 있다. 95년에는 6부작 다큐멘터리<동학농민혁명>을 제작하여 방송 PD상 작품상과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