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0 | [저널초점]
고문서, 선인의 문화와 삶을 읽는 방향
전주의 출판·인쇄(印刷) 문화재 보존을 위한 호소
글·김해정 우석대교수·국문과
(2004-02-12 16:42:35)
전주는 조선왕조 창업의 발상지로 풍패(豊沛)의 도읍이다. 또한 조선왕조 시대에는 지금의 전북, 전남, 광주, 제주와 금산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전주 문화권역이었다. 이 문화권역에 유형, 무형의 문화재가 많았기 때문에 전주를 ‘예향’ 또는 ‘문화의 고장’ 이라고 자타가 공히 인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 아주 중요한 부분이 아직 빛을 못보고 있는 바로 ‘출판, 인쇄 문화재’들, 곧 ‘책’이다. 책중에서도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옛책이다. 전주는 조선왕조 시대에 놀랍게도 서울 다음으로 방각본(팔기위해 만든책)을 많이 간행 했던 곳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들을 찾아서 보존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출판 인쇄 문화재인 고서를 발굴 하여 보존하기 위해 책박물관을 설립할 것을 제의하고 고서의 활욜 방법을 찾아 보고자 한다. 먼저 전라도 지역의 문서현황을 살펴보자
첫째 방각이다. 정읍지역 칠실을 중심으로 한 태인에서 방각본이 최초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효경언해』,『명심보감』,『고문진보』,『공자가어』,『신간구황촬요』,『농가집성』등이 17세기로부터 태인의 권이생, 손기조, 전이채, 박치유 등의 이름으로 방각본이 간행되었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태인지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방각본이 간행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풍부하고 살림이 넉넉해지니 머슴을 두고 일을 시켰기 때문에 많은 농토를 가진 사람들은 책을 읽을 만한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책이 팔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차츰 전주 쪽으로 옮겨 와서 18세기 이후부터 1930년대까지 전주 지역에서 실로 많은 방각본이 나왔다. 『열녀춘향수절가』,『홍길동전』,『유충렬전』,『조웅전』들과 같은 많은 한글 방각본 고대소설들이 ‘서계서포’(발행자 양승곤), 완흥사서포(발행자 박경보), 등 출판사 및 인쇄소, 서점을 통하여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발매되었다. 한편 ‘문명서포’ (인쇄겸 발행자 양완득), ‘청남서관’, ‘칠서방’(발행자 장환순)에서 『통감』을 비롯하여 유교의 경전이고 그 시대의 국정 교과서 격인 『사서』,『삼경』과 그 언해본 등 많은 한문 서적들이 인쇄 및 발매되었다. 이 출판사들은 전국 각 지역의 서점들로부터 주문을 받아서 발행겸 발매하였다. 이 책들 중에 『전라부 하경용장판』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경용이라는 개인 이름이 기록된 간기를 가진 『칠서』가 있다. 이『칠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널리 발매되었다.
둘째 관판본의 경우이다. 전라감영(완산감영)이나 다른 고을(읍)에서 간행한 관판본들이 있다. 곧 ‘완영’에서 간행한 『주자전서』(50책), 『동의보감』(25책) 등 부피가 큰 책을 위시하여 각종 서적이 간행되었다. 지방관서인 남원읍에서 간행한 『경민편언해』를 위시하여 각 고을이나 향교, 서원에서도 많은 책들이 간행되었다.
셋째 사찰본이다. 불행히 6·25때 소실된 완주군 고산 안심사판 『진언집』을 위시하여 각 사찰에서 간행했던 많은 사찰판본들이 있었다. 그 일부로 고창 선운사에 『석씨원류』목판이 보존돼 있다. 한편으로 한때 비어 있었던 전주 위봉사에 보존되었던 『불경언해』목본이 동국대학교 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외에도 완주군 운주면 화암사에 있던 『불경언해』목판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보관중인 것으로 기억한다.
넷째 개인문집의 경우이다. 『간제집』,『이제집』등을 위시하여 그 수가 많은 개인문집과 각 문중에서 간행한 족보와 필사본들까지 포함한다면 실로 그 수효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다섯째 금석문 기타 등의 고문서들이다.
왕궁석탑에서 발굴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있는 『금판불경』과 우리가 너무나도 잘아는 경기전에 보관되었다가 전북인이 지킨 『조선왕조실록』등을 현대에 간행한 모든 책들과 함께 잘 정리하면 알찬 내용의 ‘책’문화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탁본과 타 지역에 가 거주하였거나 지금 타지역에 머물고 있으나 전북 출신 인사들이 쓴의저서와 전북을 소재로 하여 쓴 책들이 포함되면 아주 다양하고 훌륭한 문화재로 인정될 수 있겠다.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전주에 책박물관 하나쯤은 훌륭히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모든 문화재가 다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유형문화재로서 책문화재(출판인쇄문화재)가 다른것과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책들을 모아 박물관만 만들어 놓고 활용을 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는 반감 될 것이다. 이 책박물관의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한다. 가능하면 이 지역에서 간행된 책이나 이 지역 출신 작가의 문예 작품을 비롯한 모든 책들의 원전을 잘 갖추어 놓는다면 ‘전주 책박물관’이 아주 귀중한 명소가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문학이나 어학은 물론이고 역사 등 각 분야의 전문적인 내용을 연구하는 분들이 필요로 하는 작가의 초간본이나 원전을 제공할 수 있다. 이와같이만 된다면 전국의 많은 연구자들이 필요로 하는 원전을 찾기 위하여 이 책박물관을 방문할 것이다.
이사업은 가능하다면 전주시가 맡아서 한다면 더욱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전라북도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전주에 설립하는 것이 뜻이 있는 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뜻이 있는 전주시민, 나아가서 전북도민들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애정어린 결단을 내릴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시기를 놓치면 전주 등에서 간행한 귀중한 고서가 자취를 감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래서 전주에서 간행한 고서들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 전주 책박물관을 설립하자고 간곡히 호소하는 것이다.
김해정/1940년 4월 출생. 전북대 대학원 문학석사, 국민대에서 「서사언의 비교연구」라는 주제로 문학박사 국어학 학위를 받았다. 김교수는 81년 우석대 국문과와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전한글학회 전북지회장을 역임, 현재 국어문학회장으로 활동중이다.
고문서의 가치와 활용
글·이해준 공주대 교수·사학과
문화와 예술의 도시 전주에 책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닐수 없다.
사실 필자가 참으로 반갑다고 하는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우선 첫째는 지역은 다르지만 그런 것을 이루어 보고자 조금은 노력했던 경험 때문이고, 둘째는 전주가 그런 움직임이 진작부터 있었어야 할 곳이었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하여 그런 밑바탕이 있었더라면 전북지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보다 폭넓은 접근이 가능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곁들여 진다.
필자는 전주에서 구상하고 있는 책 박물관이 소기의 목적대로 성사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가능하다면 수집·정리될 책들의 성격을 특성화시켜 강점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예컨데 전북지역과 직결된 과거의 읍지류나 전북인물의 문집, 전북 지명, 가문의 족보, 그리고 본고에서 필자가 강조하려는 다양한 고문서 자료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같은 기대를 하여 보는 것은 전주의 책 박물관에서 물론 우리나라 책 문화의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북지역 전주 만의 특성이 부각될 수 있는 자료관이 되어야 특성과 생명력을 가질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모쪼록 한 아름으로 가슴이 차 오를 전주 책박물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본고에서는 ‘잊혀져 가고, 주목하여야 할 고문서(옛문서)’의 수집 필요성과 의미를 간략히 정리하여 보기로 하겠다.
‘고문서’의 자료적 가치
고문서와 전적은 우리의 전통시대에 작성된 문헌 및 문서자료를 총칭한다. 모두가 중요한 자료이지만 이 중에서 고문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적류와 달리 ‘고문서(古文書)’는 그것을 만드는 주체와 반드시 소지하게 되는 특정한 대상이 있게 마련이며, 또 이 수급자와 발급자 사이에 특정된 목적이 개재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발급자(甲)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급자(乙)에게 전달한 문서’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문서류는 문장화되고 수식이 심한 문헌자료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실증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왜냐하면 정부의 편찬물이나 법전, 개인의 문집들은 대게 편찬자의 입장·편찬 목적·이해관계를 반영하면서 취사선택된 것들이다. 따라서 주관과 입장에 따라서 기록의 내용에 편차가 있게 마련이고, 이를 필요한 연구에서는 자료 편찬자나 편찬시기의 성격을 정확히 평가, 점검해야 하는 어려움이 부수된다. 그러나 이에 반해 고문서는 당시대를 살아간 생활인들의 숨김없는 생생한 자취이지 윤색·변조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래도 실제상황을 기록한 문서인 것이다. (이해준 외,『생일문화와 옛문서』 국립민속박물관,1991:이해준「지방사연구에 있어서 고문서자료의 연구」,「정신문화연구」46, 1992)
그런데 이러한 고문서와 고문서와 관련시켜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떠올려 보게 된다. 즉, 과연 우리 역사상에서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과 문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의 일상적인 삶은 과연 당시 제도와 어떤 상관을 가지면서 유지되고 존속되었을까? 과연 그들의 생활방식은 어떠한 틀과 규모를 가지고 운영되었을까? 또 때때로 우리가 시도하여 보는 과거에 대한 추측과 상상은 과연 몇점짜리 타당성과 사실성을 가지는 것일까? 막연하고 궁금한 이들 문제에 대하여 적절한 답을 주는 연구와 안내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한국역사·문화사 연구가 대부분 중앙 중심, 지배권력층 중심, 고급문화 중심으로 이해되고 가르쳐짐에 따라 그 지식이라는 것도 제도나 인물, 사진, 연대의 범주에서 맴돌고 있었고, 문화유산들도 대게는 그러한 문화주체들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것에 국한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서구 역사학에서는 이같은 생활사에 대한 관심이 일찍부터 있어 왔고, 매우 다양한 연구방법과 접근방법론을 개발하여 왔고, 연구량도 매우 많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에서는 이상스럽게도 이들 분야가 거의 주목되지 않았고, 오히려 민속학이나 인류학의 연구가 그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역사학이 대게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연구하는데 반해, 타분야 연구분야들은 상대적으로 ‘기록되지않은 자료’에 대하여도 많은 관심과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 골동화되고 박제화되지 않기 위하여는 그것이 가능했던 당시대의 생활사가 보다 면밀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지리적 조건이나 교통로와 무관하게 전투사가 전과중심으로 기술된다거나, 농법의 변천이나 농민조직의 매카니즘을 도외시한 채 농민운동사가 연구된다면 이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오늘의 신문기사가 그렇듯이 과거의 역사기록들은 이같은 문제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여 생활문화나 그 변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기록하지 않았고,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학은 기록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이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또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도 지배층 중심의 관찬 기록물들에서 보여지는 생활사의 모습은 보편적인 모습이기 보다는 예외적이고 돌연변이적인 것일 경우가 많다. 중앙지배층의 시각에서 왜곡·폄하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편적인 삶을 살았던 대다수 l민중들의 생활상이나, 특히 중앙이 아닌 지역의 역사·문화상은 2류이거나 예외로 폄하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문서’의 종류와 성격의 분류
우리가 지역 단위에서 주로 발견하게 되는 고문서의 유형들은 대체로 ①교지류(敎指類:임명장,사령장,자격증) ②호적 기록 문서 (호구단자 戶口單子 , 호적대장戶籍臺帳 , 준호구準戶口) ③ 청원민원의 처리관련 문서(소지류 所志類, 완문류 完文類, 절목류 節目類) ④ 재산을 상속하는 문서 (분재기分財記) ⑤경제문서 (매매입안 賣買立案 , 명문 明文, 추수기 秋收記) ⑥ 유서 (통문 通文, 첩정품목 堞呈稟目, 감결 甘結, 절목 節目) ⑦ 성책류 成冊類 (호적 戶籍, 양안 量案, 향약 鄕約, 동약 洞約, 사적기 事蹟記, 용하기 用下記, 전여기 傳與記, 서원지書院誌, 사찰지 寺刹誌, 명종개 名種槩) 등등이다.
이러한 문서들은 수집과 정리의 방향에 따라서 가정생활(친족과 혼인/상례와 제례/재산상속/여성생활), 동동체생활(촌락생활/어촌생활/신앙과놀이), 신분별생활상(관료생활/중인생활/향리생활/평민생활/노비생활), 제도와 생활(교육제도/과거제도/법률생활/호적제도), 경제생활(농업경제/서울상업/지방상업)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생업과 경제, 의식주, 평생의례, 신앙의례, 교육, 신분사회제도, 가족과 친족, 촉락, 개인생활, 기타등으로 세분정리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고문서로 풀어가야 할 지역사, 지역문화
우리는 대게 지역의 민속이나 관습문화가 기록자료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들 분야가 다른 분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문자화된 근거자료를 남긴다는 것은 어렵고, 또 실제 기록되지 않은 자료로 전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서로 다른 두 측면에서 새로운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관습이나 생활문화는 특정집단의 이해만으로 관행되는 것이 아닌까닭으로 계층적인 자료 구분의 시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예컨데 지배층이나 식자층의 자료는 ‘역사자료’, 일반기층민의 시각은 보다 폭넓은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문화의 이해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각 시대와 지역의 생활문화는 이들 서로 다른 입장과 기반을 가진 집단들이 타협과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 낸 것일수도 있고, 때문에 모두가 생활문화자료로서 검토와 분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지역에 공통된 현상이지만 기록된 지방자료 중에서 사족(양반)이나 성씨관련 자료가 거의 90%이상을 점유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전제한대로 옛문서자료는 특정인의 의식이 강요되거나 포장된 다른 자료들과 비교하여 1차자료로서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지배·피지배계층을 막론하고 이들 옛문서 자료는 그들이 삶의 과정에서 엮어낸 생생한 생활사의 본 모습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생활문화와 관련하여서도 ‘쓰여진자료’보다는 ‘쓰여지지 않은 자료’가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것에 대한 보완문제이다. 물론 구전이나 관습으로 전승되는 소위 ‘민속(民俗)’을 생활문화로 보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우리가 좀더 철저하게 유념할 부분은 쓰여진 자료가 있을 경우에는 이에 대한 연구접근의 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전해지는 기록 자료가 전혀 없을 경우에는 기존의방법이 당연하겠으나, 자료가 있는데도 시각과 자료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이를 등한시 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본다. 일반화된 많은 자료 중에서 생활사 자료나 민중관련의 자료,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지방문화의 실상이 나타난 자료들을 분석하고 추출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통제와 규제속에서 과연 각 시대와 지역민들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타협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는지, 이에 대한 답을 고답적인 사상이나 정해진 제도·규범으로서만 구하려고 한다면 역사와 현실사이의 문제는 항상 숨겨진 사실로 규명의 기회 없이 남겨질 도리밖에 없다. 옛문서 자료를 통해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을 규명할 자료로서 이는 유형의 자료보다 옛문서가 유용하게 활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고문서 자료의 수집과 정리는,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지방사나 민족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이용해 왔던 자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각 분야별 연구의 함축성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충분히 담당할 것이다.
이해준 / 충북 청주 출생. 공주사대를 졸업했으며 한국 사회사상사 전공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목포대 사학과에 재직중이며 전남지역의 역사문화유적조사와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 학자로 정평이 나있다. 저서로는 『향토사연구의 이론과 실제』, 『조선시대 사회사 연구법』,『다시쓰는 전라도 역사』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