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0 | [사람과사람]
투박함의아름다움과 신명난 북가락
글·최주호 문화저널 기자
(2004-02-12 16:41:16)
“선생님은 언제쯤 오십니까?”
“글씨, 그 양반 요즘은 바뻐서 집에 못들어 오는 경우도 있고 언제올지 모르겠는디요..뭔일이요?”
올해로 67세를 맞는 명고수 주봉신씨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가을이 다가오면서 자연스레 공연행사가 많아지고 이에 따라 집에 못들어 가기는 다반사. 이리저리 행사장을 덜며 소리꾼에게 힘을 불어넣기에도 시간이 빠듯하다. 가을철이 다가오면서여기저기서 펼쳐지는 국악관련 행사로 그의 옛적 황금기가 되찾아진 듯한 인상이다.
근래에 들어 부쩍 그의 북가락을 맛볼수 있는 행사가 많아졌다. 그의 북가락은 화려하거나 기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인물에서 풍기는 투박하고 억센 힘처럼 그의 가락에는 친근감과 우리 향토에서 묻어나는 가락이 들어 있다. 그래서 그의 북가락을 들으면 농악가락이 들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 고수로서 주봉신을 능가할 고수는 없다고 한다. 특히 그는 박동진 명창의 지정고소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 박동진명창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는 그가 오늘에있기까지는 어려운 시련의 연속이었따. 처음 소리공부를 시작해 명고수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의 인생역정은 오로지 우리 문화에대한 깊은 애정과 의지에 바탕해 있다.
그의 스승 이만암과 임방울
처음 우리 음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열여섯살 때다. 그는 열두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그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은 2년 뒤, 아버지 마저 여의어 형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순탄하지 못한 생활을 하던중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시조를 좋아하는 친형과 함께 황등에 살고있는 임종안 선생을 만나는 것이 소리꾼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 임종안 선생은 그가 시조를 읊조리는 소리를 듣더니 대뜸 “너는 목이 좋으니까 소리공부를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그는 소리 공부를 하기로 맘을 먹었다. 그러나 그에게 소리를 가르쳐 줄만한 소리꾼은 주위에 한명도 없었다.
다시 양반출신의 비가비 광대로 알려진 이만암 선생이 군산에 국악원을 열어 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2년 남짓한 세월을 허드렛일을 하면서 이만암 선생으로 부터<흥보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소리에 점차 흥이나고 재미가 붙을 즈음 이만암 선생이 세상을 뜨자 소리공부에 대한 갈등이 밀려왔다 그러나 소리공부에대한 애착을 버릴순 없었다.
고향에 낙향해 익산 함라의 만석꾼 조해영의 집에 임방울 명창이 기거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만석꾼 조해영의 집에는 예술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조해영이 예술에 조예가 깊어 예술인을 사랑해 국악인들이 자주 기거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대의 소리꾼은 물론 예술가라고 부리우는 사람 치고 그 집 사랑방에 기거를 안해본 사람이 없을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만석꾼 조해영은 임방울 명창의 소리를 높이 평가해 임방울을 집안사람처럼 보살펴 주었고 임방울 명창은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일년에 한두달씩 조해영의 집에서 기거를 하곤 했다.
“임방울 명창이 왔다는데 한 번 가보세” 평소 그가 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박병기과 같이 임방울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임방울의 소리에 매료된 그는 그후 임방울 명창의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북과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다.
“명창은 목이 좋아야 하는데, 임방울 선생같은 경우는 전무후무한 명창중의 명창이지”라며 스승에 대해 입담을 늘어 놓는다. 또 “ 명창의 경우 수성, 맹성, 목성의 목이 있는데 임방울 선생는 수성으로 껄껄해서 듣기가 좋지,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장육보가 다 뒤틀어져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만히 앉아 있게 하지를 못하지”라고 회고한다.
임방울 명창으로부터 3년 동안 소리를 배운 그는 32세때 전국 명창대회에서 2등을 수상하는 등 소리꾼으로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박동진 명창과의 인연
“소리를 하고 나서부터 너무나 배가 고프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당시의 사회적 생활상과 여자 소리꾼의 선호로 인해 남자 소리꾼의 생활은 힘겨움의 연속이었고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소리를 미련없이 버릴 수는 없었다. 이리저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온 낭보는 ‘군산 국악원 소리선생 구함’. 계속해서 소리를 공부할 수 있다는 기회와 함께 후진을 양성할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군산 국악원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7년여 동안 적지않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명창을 차지한 김수연씨의 경우, 15살에 되던해에 그에게 처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해 명창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초기의 군산 국악원 생활은 그의 황금기를 맞이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소리꾼으로서 생활, 그 생활의 궁핍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더 이상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즈음 그는 강경에서 농악단을 창설해 연출과 사회를 맡아 공연무대에 섰다가 전주예술제에서 박동진 명창을 만나게 되었다. 궁핍한 자신과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동진 명창이 “그럼 나하고 같이 있자” 하며 손을 잡은후 박동진명창의 소리에 힘을 불어 넣은 고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결국 배고픔의 세월이 고수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에게는 소리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남아 있다. 북장단을 맞추면서도 속으로 흥얼거려 보기도 한다. 그러기에 그의 북에 더욱더 소리꾼에게 힘을 불어 넣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사람들은 박동진 명창하면 주봉신 고수, 주봉신 고수하면 박동진 명창을 연상한다. 박동진 명창의 지정고수로 서로에게 빛과 그림자가 된지 벌써 25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러베 아들론 북은 잘친다”
박동진 명창은 자신이 긴장되거나 소리 자체에 신명이 안날 때 북을 치는 그에게 곧잘 욕설을 퍼붓는다.
“얼씨구!”
쿵-딱. 장내는 이미 흥이 되살아난다. 박동진 명창과 같은 자리에 서면 이렇게 실없는 욕지거리(?) 세례를 받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러면서 웃음으로 북당잔으로 넘기며 흥을 불러 일으킨다.
“아이구 말도 못하죠. 박동진 선생이 얼마나 까다로운 사람인지, 북과 호흡이 조금만 안맞으면 그 자리에서 호통을 치는가 하면 그냥 나가버리니...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북만 치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죠. 조금만 어긋나도 소리가 죽어버리니까....”라면서 박동진 명창과의 힘겨운 생활을 회고 한다.
그러면서도 박동진 명창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 그 양반 아주 연습벌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니깐, 또 공연을 앞두고 있으면 지독하게 연습을 한다니깐” 그때마다 박동진 선생의 옆에서 그가 소리에 힘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북을 치는 고수생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요즈음 경제적인 형편이 예전에 비해 좀 풀렸으나 북을 잡고 몇 시간씩 앉아 있으려면 온 몸이 굳어 꿈쩍도 못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움직임이 거의 없다보니 온몸이 저려오는 경우가 허다하고 소리와 장단이 한호흡을 이루기 위해서 신경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소리꾼의 소리보다 고수의 장단이 제대로 맞지 않으면 판소리 자체가 그 맛을 잃어버리고 귀명창의 추임새도 들리지 않는다.
미래는젊은이의 몫이다
94년 4월 국악의 고장인 전주에서 열린 전국 고수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그는 원래 상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저 박동진 명창과 함께 하면서 고수로서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아 글씨 수상경력이 없다고 알아주지 않는거야, 아 다들 집에 족보가 있듯이 계보가 있는 법인데..그래서 오기로 전국고수대회에 출전해 상을 먹었지” 그후 그의 북은 더욱 더 빛을 발하게 되었다.
11월쯤 남문 인근에 사설학원을 마련 후진양성에 힘을 쏟겠다는 그는 “ 난젊은 사람을 중심으로 가르친다”고 나름대로의 후진양성에 고집을 펼쳐보인다. 중년층은 가르치지 않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특별히 중년층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우리 문화를 짊어지고 나아갈 젊은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더 가르치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우리것을 알아야 우리가 산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제자중에는 나름대로 빛을본 제자도 있다. 전북대 국악과 4학년에 재학중인 최만이 고수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앞으로 대성할 제자들로 이종규(전북대 국악과 졸), 고일(신흥고 재학)등 몇몇을 꼽는다.
요즘같이 행사가 많아 집에 못들어 가는 날이 많은 그는 집안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생활에 대해 가족의 불만은 거의 없다. 단지 본인 스스로 미안해 할 뿐이다. “나이들어서 집에만 있으면 병이 생기지....그나마 이렇게 활동을 하고 있으니 이만큼의 건강이라도 유지하고 다닌 것이 아닌가 생각혀”
그는 지금 엉덩이가 들썩들썩 하다. 행사때문인지 어디엔가 호출을 해 놓았는데, 연락은 감감 무소식이고 시간은 가고 있으니...
그는 내일모레(9월 25일) 박동진 명창과 국립극장에서 3시간 짜리 변강쇠전을 펼친다 한다. 미리부터 올라가 연습을 해야 하고, 공연이 끝나면 다음날 대전으로, 다시 서울예술의 전당으로 30날에는 충주 공연으로, 1일에는 군산, 2일에는...끝도없이 이어지는 행사에서 북을 잡아야 하는 그는 지금 이 시간마저 아까워 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 올 가을이 지나면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말을 잇는다.
“이번에 박동진 선생 전수관을 공주에 짓는데 여기에는 옛명창 기념비가 아주 장대하게 세워질 계획입니다. 그런데 판소리의 본고장인 이곳은 변변한 기념비 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소외받고 있는 전북의 명창이 안타까울뿐이죠. 국악의 발전이 지역문화 발전속에 이루어 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어딘가를 향해 옮겨놓는 발걸음이 이 가을을 재촉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