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0 | [문화저널]
영화의 길, 영화의 꿈, 그 하나의 가능성
삶을 껴안는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
글·홍성희 영화평론가
(2004-02-12 16:38:28)
사오년전 미국 전역에서 출간과 더불어 찬반논쟁을 일으키며 전염병처럼 퍼진 베스트 셀러는 『최후의 비상구 The Final Exit』였다. 책속에는 각종 자살의 방법론이 상세히 게재되어 있다. 의학적 상식과 불온한 재미를 탐닉하기 위해서 혹은 과도한 편집상태에 처한 자살광의 치밀한 사전 계획을 위해서 책속의 다종다양한 메쏘드는 모종의 선택이며, 각기 범세계적인 하나의 가능성들이다. 이 책에서 자살은 공공연히 또하나의 삶의 형식이 된다. 그것은 삶의 끝이요, 죽음을 지향한다는 것은 순전히 결과적인 부산물이다.
영화를 사유하고, 이야기 하는 방식은 다종다양하다. 영화는 그 탄생이후 백년의 길을 걸었고, 무수한 감독의 무수한 영화가 있었다. 영화의 장수(長壽)는 자칫 당연스러우면서도, 위험 천만한 것이다. 삶을 모방하고, 혹은 영화를 모방하는 그 순환 방식이 가령 엽기적인 살인극이거나 공포 괴기영화의 끔찍스러움을 연출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스너프 영화’(실제로 살인하면서 찍는 포르노영화)가 러시아 마피아의암거래로 불법유통이 이루어지는 현실이라고 한다면?(스릴러 영화<무언의 목격자>, 1995) 가상과 현실의 착시현상이 빚어낸 이 엄청난 패륜과 비극상은 이미 튕겨져 나간 영화적 가능성이다. 삶과 공존이라는 영화적 상식에서 궤도 이탈을 한영화는 이미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삶을 통해 사유하고, 삶을 위해 존재한다. 영화의 불로장생의 근원인 끊임없는 자기 변신은 그근원으로서의 향수를 잃고서는 영화적 생명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영화적 근원과 향수에 충실한, 삶 자체의생명력으로 충만한 영화가 보여주는 가는 떨림은 우주적 자연의 그것으로 옮아가기도 한다.
영화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94년 깐느에 초대된 바 있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국내 최신 개봉작이다. 영화의 미장센은 올리브 나무 숲의 풍경들과 지그재그로 펼쳐진 길이다. 영화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는 이란 코케마을의사람, 사람들이다. 영화속 극중 영화제작을 하는 감독 케샤바르츠가 자신의 역할을 소개하고, 캐스팅을 위해 검은 차도르를 두른 현지 학생들을 모으고 인터뷰하는 과정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케샤바르츠는 영화뒤편의 실제 감독 키아로스타미의 분신이며, 영화속영화에는 케샤바르츠의지시에 따라 감독역을 하고있는 케리만드 감독이 등장한다. 이러한 삼겹의 구도는 일견 영화작업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고, 한편 영화는 영화작업을 중심으로 아마추어 배우로 연기하는 코케 현지 사람들의 삶의 동정, 특히 호세인이라는 문맹의 남성과 테헤레라는 여성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결국 영화라는 허구의 인물로 재창조되지만, 그 허구는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추어 배우인 그들로서 그들의진실된 속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분장없이 날것으로 부딪치는 그들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의 신선함과 감동으로 다가선다. 감독은 그들의 장점을 잘 알고있으며, 그 역할은 그들이 충분히 발휘할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알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길을 소재로한 ‘지그재그 삼부작’에 해당하는 이번 영화는 작년여름 경이로운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내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년작)와 아직 국내에 소개돼지 않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년작)의 완결편에 해당한다. 이영화에서 감독은 <그리고 삶은 계속되고있다>를 직고 있으며, 실제 그영화 작업을 하면서 접하게된 호세인의 테헤레에 대한 사랑을 감독의 입장에서 다시금 영화로 연결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영화에서 주지하다시피 그들이 이란의 작은 마을에 살며 TV와 영화, 기타 인공적인 오락물에 감염되지 않은 정서를 소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그들은 여전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영화는 결코 삶을 대신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다. 마을의 지진으로 고아가 된 여학생 테헤레는 죽은 부모가 유언하다시피 거절한 호세인과의 결혼을 현실에서 상상할 수 없다. 영화 속 영화에서 호세인과 신혼부부관계에서 처한 그녀에게, 영화는 삶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이면서도, 끝끝내 양보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녀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남편인 호세인에게 존칭을 붙여야 할 것을 강요받지만, 결국 다섯 번의 NG를 내도록 현실을 계속 고집하고, 오히려 요즈음의 여성들은 남편에게 그다지 존칭으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호세인의 변명으로 케샤바르츠 감독은 승복하고 만다. 호세인역시 현실과 허구의 혼동을 느낀다. 대사에서 그의 친척들이 지진으로 육십오명이 죽었다고 해야하는 그는 몇 번이고 실제로 스물다섯명이 죽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연거푸 연기실수를 하고만다. 그가 드디어 육십오명이 죽었다고 할때, 그는 역력히 연기하듯 숫자 부분에 힘주어 말을 하게된다. 마치 이건 실은 거짓말인데라는 여지를 주듯이 말이다. 한편, 호세인에게 있어 영화는 하나의 방법이자 도구가 된다. 영화 작업도중 차를 나르고 하면서, 촬영 대기를 하는 잠시의 시간,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설명하고 설득시킬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영화속에서 연기하는 성격은 실제의 내가 아니예요.’ 그도 그녀도 영화를 현실과 아닌 별개로 받아들이는데 혼동을 느끼면서, 호세인은 그녀가 현실의 불가능한 가능성과 닮아있는 영화에 속지 말 것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삶이 영화의 양식이 되는 드문 사람이 있다. 감독 키아로스타미는 그의 삶과 영화의 이중성을 통해 여실히 그러한 상관관계를 드러낸다. 극중 게샤바르츠 감독으로 구현된 키아롯스타미는 삶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영화의 존재 의의를 발견한다. 숙제를 해오지 않아 선생님에게 벌을서고 혼이난 짝꿍 네마자데에게 노트를 돌려주기 위해 친구네 집으로 찾아가는 아마드의 여정을 그린 <내친구의 집은어디인가?>, 이후 그곳의 지진소식을 접하고 그들의 생사가 궁금하여 찾아나선 여정을 담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우리는 이번영화에서 훌쩍 커버린 아마드와 네마자데를 접하는 반가움과 함께, 삶과 영화의 영속성과 진실을 경험하게 된다. 한편, 작벙장 근처 영화 구경을 하러 나온 아이들에게 협동이 무엇인가를 묻고, 음식담당을 하는 노인 바헤리에게 외롭지 않은가를 묻고, 멀리 목욕다녀오는 아낙네들을 차에 태우며 그들에게 관심어린 애정을 쏟고 그들의 얘기를 듣는 감독은 삶이 이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임에 천착한다. 영화의 소도구로서 작은 시골 마을의 동네 구석구석구석에서 모여든 제라늄 화분은 한정된 프라임 안에 담기지 않은 너른 공간의 흔적을 옮견놓기도 한다. 드디어, 영화는 삶에 대한 일종의 대표수단이며 ,꿈꾸게 하는 아름다운 가능성이 된다. 우정과 사랑, 희망등의 오히려 표현하기 어려운 주제가 이처럼 맑은 영상시로 구현되는 데에는 인생에 대한 감독의 수공업적인 정신이 바탕이 된 것이다. 삶을 통해 영화를 사유하고,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 즉, 영화는 더 이상 스토리 전달의 매체이거나 이미지화된 소설이 아니며, 더 나아가 영혼의 심부를 건드리는 시적 영상과 그 체험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열려있다.
이미지로 돌아가자. 올리브 나무 숲 사이로 테헤레는 제라늄 화분을 껴안고 걷기 시작한ㄴ다. 호세인은 그녀의 뒤를 좇으며 그녀에게 혼신을 다한 사랑의 고백으로 그녀의 대답을 간곡히 부탁한다. 영화 촬영이 종료된 시점에서 그녀와는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없이 빠른걸음으로 곧장 앞만보며 걸어간다. 지속적으로 말을 하면서 그녀를 따르는 호세인은 점점 숨이 찬다. 끝끝내 돌아보지 않는 그녀앞에 지그재그길이 나타난다. 이어 익스트림 롱쇼트의 화면크기, 일몰직전 4분여의 롱테이크로 잡힌 피날레는 광활한 푸르름 속에 길을 따라 멀어지는 환점 둘로 표현된다. 저멀리서 앞선 흰점이 잠시 멈춰 지며, 두 점이 아주 가까워 졌다가, 뒷서가던 흰점이 다시 관객을 향해 들뜬 걸음으로 가까워져 오고 자막이 흐르며, 라스트 씬 내내 치마로사의 오보에 협주곡이 백미를 이룬다. 영화의 끝은 결국 꿈으로, 희망으로 스며든다. 이로써 영화는 미완의 인생을 꿈꾸게 하고, 예술로서의 영화는 인생을 다시금 꿈과같은 것으로 추구하게 한다. 영상과 소리의 절묘한 만남, 인생과 영화의 관조적 통찰을 가능케 하는 작품은 작품의 완성으로서 관객의 역할을 비중있게 다룬다. 카아로스타미 감독의 기막힌 휴머니즘에 경의를 표하고, 아직 상륙하지 않은 그의 최신작 <체리향기>에 벌써부터 취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