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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0 | [세대횡단 문화읽기]
전형적인 고려 감각의 탑 -계룡산 오층석탑(남매탑)-
글·천득염 전남대교수·건축학과 (2004-02-12 16:35:35)
충남공주군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계룡산 오층석탑(남매탑)은 충남도 지방문화재 1호로 지정돼 있다. 원형은 5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맨위 5층부분은 없고 기단부와 4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고 상륜부는 노반석과 보주만 남아있다. 현재의 높이는 4.8m에 이른다. 이탑의 조성시기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간된 책자에 근거해 백제말 혹은 통일신라초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학사 사기에 보면 동학사와 같은해 건립된 사찰에 상원조사가 수도입적한 뒤에 와서 비로봉사지에 남매탑이 조립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원래 사찰의 기록들은 근래의 것들이라 신뢰성이 없으나 이를 근거한다면 남매탑의 건립연대는 동학사가 창건된 신라 성덕왕대(602 - 737)까지도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남매탑이 서 있는 대지의 우측에는 몇 단의 건물터들이 있는데 이곳에서 ‘청량사’, ‘청량’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이곳을 청량사라 부른다. 또한 이곳에서 석조연좌대석편, 우불좌상파편, 연화문파와편이 출토되었는데 이들이 모두 통일신라의 것으로 보여 남매탑의 건립연대를 관련지어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동국여지승람 공주 목조에는 ‘청량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동국여지 승람을 편찬한 이조 성종대 이전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변 유적과 관련지어 남매탑의 건립연대를 정림사지석탑에 가장 근사하다 하여 백제말에서 통일신라까지로 추정하고 있지만 근래에는 양식적인 면을 강조하여 비인석탑의 건립연대와 같은 고려초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림사지석탑에 가장 가까운 형식을 취한 탑이라 하여 서로 건립연대가 비슷한 백제말 혹은 통일신라초로 보는 것은 고려시대의 석조조형수법을 소홀히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남매탑은 전체적인 조형미에서 고려적 감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남매탑은 정림사지석탑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정제된 세련미가 덜하다. 또한 탑의 전체적인 실루엣이 가늘고 우뚝솟아 기단부가 약화되었으며 옥개석의 경쾌함이 부족하다. 게다가 옥개받침의 각형받침과 사릉형(경사형)받침이 일정한 비례감을 갖지 못해 크기의 변화에 규칙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이 건립된 위치가 높은 산 정상 부근이어서 초기 석탑이 건립된 위치로서는 백제말 혹은 통일신라초까지 연대를 올려잡기 어려운 입장이다. 따라서 이 탑은 비인석탑과 더불어 정림사지석탑을 가장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의 조형에 속해있다고 할수 있다. 동학사에서 북쪽으로 2km가량을 올라가는 비로봉 바로 밑 평평한 대지에 2기의 석탑이 있는데 이들 중 5층 석탑이 바로 이 남매탑이다. 흔히 이들 2기의 석탑 중 5층탑을 오라비탑으로 백제계, 7층탑을 누이탑으로 신라계라 하는데 필자는 이들 2기의 석탑모두가 백제계 석탑이라 판단한다. 이 양석탑에는 석탑조성에 관한 전설이 얽혀져 있는데 백제가 멸망한후 어느 의남매가 와서 수도하던 곳이라 하여 탑명역시 남매탑, 행매탑, 혹은 오뉘탑이라 부르게 된것이라 한다. 이탑은 일견하여 정림사지석탑과 같은 백제석탑 양식을 그대로 옮겨서 작은 규모로 건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매탑의 기단부는 여러장의 판석을 넓직하게 방형으로 놓아 지대석을 만들고 그위에 보다 축소된 크기와 모양의 조석이 조성돼 있다. 다시 지석위에는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사각의 모서리기둥이 민흘림형태로 세워져 있으며 결실된 각 면석은 자연석(중수시 판석으로 바꿔끼웠음)으로 채워져 있다. 면석의 상단부에는 두꺼운 한 장의 판석을 갑석으로 눌러 넣어 낮고 평평한 상촉하단(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모양)의 모양으로, 전체적으로는 낮고 좁은 기단부를 마무리했다. 1층 탑신은 민흘림 형태로 된 각기 다른 돌을 사용, 네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일면일간의 면석에 벽판석을 끼워넣었다. 1층 탑신의 밑에는 탑신의 괴임이 없다. 옥개석 하면에는 목조탑을 모방하여 ‘각형받침’과 ‘사릉형받침’등 2단의 옥개받침이 있으며, 옥개석의 윗면은 얇고 평평하다. 낙수면 단부인 처마끝은 일직선을 유지하며 나아가다 네모서리 전각에 이르러 미세한 반전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내림마루가 두툼하다. 2층부터는 탑신고가 급격히 감축되었고 일석으로 된 1단의 탑신괴임위에 놓였다. 네 모서리에 별도의 돌기둥을 세우고 일면일간에 벽판석으로 면석을 끼운 것은 1층 탑신과 같고 다만 1층의 모서리 기둥부분의 민흘림 형태가 2층이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수 있다. 3층 이상의 탑신은 네모서리 기둥을 각출하고 일면일간의 벽을 1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옥개석은 1,2층이 전자형 네 개의 돌로 짜였고 3층이상은 모두가 하나의 돌로 이뤄져 있으며 상륜부는 없어져 노반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탑은 정림사지 석탑 재현에 가장 충실한 것으로 백제양식 계열의 여러 석탑중에서 조형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다만 전체적으로 높고 가는 맛을 줄 정도로 기단과 탑신의 비,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감이 다소 떨어지고있긴하다. 특히 비인오층석탑과 비교하여 이제까지 석탑관련 개설서들에는 비인5층석탑이 앞서고 계룡산탑이 뒤인 것 처럼 표현되었는데, 현재로서는 선후문제를 판가름하기가 어려운 상태고 다만 정림사지석탑과의 관계를 본다면 이탑이 보다 충실히 모방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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