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특집]
'문화재'와 '가치'는 누가 만드는가
사라져가는 문화재, 우리 전통과 정신도 묻힌다·이춘구
이춘구
(2004-02-12 16:11:04)
전북인은 늘 패배자이고 역사의 반항아였는가?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아인가? 기자라는 직업 이전에 전북을 탯자리로 한 민초로서 학창시절 이후 가슴속에 품어온 의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풀지 않고는 내 자신이 바로 설 수 없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전북은 한국사 무대에서 변두리에만 서기를 강요받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 내 고향의 유래와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작업은 온고을 문화유산을 정리 보존하는데서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전북의 산하 곳곳에 흩어져 잇는 유형문화재는 선조들의 정신과 생활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전북의 유형문화재는 백제멸망 이후 백제기록이 사라지고 잦은 전쟁 때문에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으며, 최근에는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과 개발논리에 밀려 심하게 훼손되고 재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먼저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부터 현장 중심으로 관리 실태를 살펴보자.
사라지는 유적들
부안군 보안면 부곡리 산성은 서해안고속도로 용지에 포함돼 통째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 백제 최후 항전지 주류산성의 전초기지로서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잇는 부곡리 산성은 백제시대 테머리식(산꼭대기에 테를 두른 듯한 축성양식)토성이다. 바로 옆의 도롱이 산성과 눈앞의 고부성, 고부눌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면 부곡리 산성의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산성은 외성과 내성사이에 회랑이 있으며 건물지와 우물이 남아 있다. 이렇듯 소중한 백제산성이 서해안고속도로 토취장으로 활용되면서 사라질 뻔 한 것이다. 이 부곡리 산성은 원광대하교 나종우 교수와 함께하는 KBS취재진의 집중적인 보도와 비판으로 고속도로 용지에서 극적으로 제척시키게 됐다. 한국도로공사는 지정문화재가 아니어서 저지른 실수였다고 변명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부곡리 산성 옆의 도롱이 산성(일명 사산 산성)도 채석장이 두 군데나 허가돼 경관을 크게 헤치고 있다. 산성 바로 아래까지 골재를 채취해 50미터 가량의 절벽의 맨살을 드러낸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성 동북쪽의 동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일본 지원병이 갯벌에 빠져 참패하는 기록은 주류성이 백제부흥운동 최후의 항전지임을 증명하고 잇다. 부안지역의 백제 성들을 일괄해서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호하는 대책이 서둘러져야 할 것 같다.
부곡리 산성 앞의 송림에는 장군총이라 불리는 백제고분이 놓여 있다. 해방 직후 도굴됐을 때의 목격담을 전하는 허노인에 따르면 높이 2미터에 너비 1.5미터의 큰 규모이고, 갑옷과 금관식 등 귀중한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백제 중방인 고부성 등을 연결시켜 판단컨대 장군총의 주인은 담로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재발굴 조사를 통해 장군총의 주인을 찾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일이다.
부안군 주산면의 나무개(木浦)마을에는 백제때 배를 맨 5개의 큰 바위가 남아 있었다. 배를 매어둔 바위를 통해 백제시대 항구를 재현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경지정리와 직강공사 등으로 바위 일부는 논바닥에 파묻히고, 일부는 마을 이정표로, 우물가 빨랫돌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바위 하나에서도 우리는 백제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련만......
부안군 주산면 사기점 마을의 대규모 도요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 취락 구조 개선사업으로 도요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고려 청자며 조선백자 파편이 마을 안에 나뒹굴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김제시 진봉면의 봉수대도 3년전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그러나 모부대가 봉수대를 군사용 헬기장으로 바꾸면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문화재는 우리 곁에 있다.
농촌 출신이면 누구나 마을 모정의 추억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정도 근대화 물결에 밀려 대부분 원형을 잃은 채 사라지고 있다. 모정은 임진란 이후 호남지방에만 나타나고 조선시대 후기 농민의 민권의식 신장의 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당산과 어우러져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김제 장화동 모정을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제안한다.
또 필자는 일제 때 독립운동과 6.25동란의 현장을 사적지로 지정해 훼손을 방지할 것도 촉구한다. 전북은 최익현과 임병찬 장군이 정읍 칠보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것을 비롯해 진안 마이산의 이석용 장군의 호남의병창의 등 일제침략주의자에 맞서 구국 항전의 기치를 높이 세운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런 점에서 단군성전을 모시고 조선개국의 설화가 어린 마이산의 이산묘 역시 사적지로 지정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6.25의 격전지인 순창 회문산과 남원 지리산 등을 사적지로 보존하는 방안도 하루 빨리 세워져야 할 것이다. 유형문화재의 방치도 문제이지만 더욱 참기 어려운 일은 전북의 문화유산과 관련해 왜곡된 전설이 많다는 점이다.
왜곡된 전설과 방치된 사적
백제때 창건된 고창 선운사는 백제성왕을 속요 전사케 한 신라 진흥왕이 시주해서 창건된 것처럼 왜곡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운사 석굴을 진흥굴이라 버젓이 이름 붙인 것인데 탐방객들도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진흥왕과 관련된 기록이 지워놓고 있다. 무주 구천동의 석굴 이름도 이를 나제통문이라 정하고 신라 김유신 장군이 굴을 뚫은 것처럼 전설을 왜곡하는 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 굴은 1930년대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만든 것이다. 이름도 신라적 사관에서 벗어나 제라통문으로 고쳐야 한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하고 무슨 이유로 왜곡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지정 유형문화재의 훼손만큼이나 지정 유형문화재의 관리도 소홀하기는 마차가지다. 백제 부흥군의 최후 항전지인 부안 주류성(전라북도 기념물 20호)은 정문 문루와 건물터 등이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제외됐다. 가장 중요한 핵이 빠졌으니 상식 밖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화재 위원들은 현장을 답사하고 보호구역을 지정했는가 묻고 싶다. 바로 이 곳에 모 유력인사의 별장과 사슴농장이 들어서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차제에 보호구역 바깥의 정화구역도 문화재지정의 취지를 살리는 환경정비가 시급하다고 하겠다.
왕궁탑의 국보 289호로 승격된 것은 전북의 문화 유산이 뒤늦게나마 재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임실 신평의 중기사 석등도 보물 267호에서 국보로 승격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창 죽림리 고인돌군(사적 391호)과 정읍 은선리 백제고분군(전라북도 기념물 57호)은 거의 방치상태이다. 고인돌과 고분이 비바람에 씻겨 무너지고 담장의 석재로 사용되고 있다.
김제 금구 월전리 산성(전라북도 기념물 85호)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제 때 고을 이름을 본따 구지지 산성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정된 유형문화재라 할지라도 학설이 엇갈리는 게 많다. 그 동안 전북 사학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백제 부흥군의 최후 항전지는 부안 주류성으로 굳어지고 있지만 충남의 한산과 연기설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왕궁탑의 건립 연대도 문화재당국은 고려 초를 받아들이고 있다. 전북 사학계에서는 부여 정림사지탑과 모양이 같고 탑신의 체감법, 옥개석 끝이 하늘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과 고려초기 왕궁지역에 탑을 세울만한 세력이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을 들어 백제 후기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정확한 연대정립은 전북 사학계의 몫이다.
우리의 문화재를 우리의 손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유형문화재의 보존상 문제를 열거했다. 문제 투성이의 유형문화재 보존을 제대로 시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반적인 재조사가 시급하다는 점을 문화재 당국에 고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유형문화재의 올바른 평가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중앙의 문화재관리국에 전북 출신인사를 진출시키고 문화재를 관리하는 모든 당사자가 솔선해서 제 평가를 받도록 헌신적 활동을 벌어야 한다. 완주 소양 송광사의 사천왕상이 보물로 지정된데 이어 대웅전의 삼존불좌상도 국보로 지정될 예정이다. 이는 그냥 굴러들어온 것이 나리라 주지 스님이 문화재 사랑의 열정으로 문화재 위원들을 설득한 데서 얻어진 과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함께 1사 1산운동처럼 1사 1문화재운동을 제창한다. 전북의 모든 기관, 단체 나아가 친목계마저 나서서 1문화재 가꾸기에 동참하는 것도 큰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또 하나, 문화재 안내판을 올바르게 세울 것도 권유하고 싶다. 1사 1문화재운동이 뿌리를 내리면 문화재 안내판도 저절로 세워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다. 마지막으로 전북의 새로운 역사창조를 다짐하는 역사헌장을 제정하고 역사헌장탑을 경기전과 덕진공원 등 주요 장소에 건립할 것을 주장한다.
원광대학교 사학과 나종우 교수는 기록되지 않은 패자의 역사라고 영원히 묻혀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전북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게 더 많다. 오늘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잇는 유형문화재부터 올바르게 해석하고 전북의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저 풍요로운 백제 관음보살상처럼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는 온고을 정신을 곧추 세우자. 태생적으로 드리워진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자. 전북인이 자주적 의지를 가지고 한국사의 중심에 서서 새 역사를 이끌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