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저널초점]
여백만들기와 여백채우기·김은정
김은정
(2004-02-12 16:07:42)
흐르는 강물을 건너 몇발 나가면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곳에서도 50년 가까운 세월을 헤어져 있던 아들과 어머니는 끝내 말한마디 주고받지 못했습니다. 저기 내아들이, 내어머니가 있는데. 그들은 끝내 얼굴조차 가깝게 보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뜨거운 눈물로 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그 아들은 손조차 제대로 흔들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했습니다. 중국 땅, 수만리 길을 돌아 찾아간 두만강변에서 남쪽의 어머니와 북쪽의 아들은 그렇게 다시 서러운 이별을 해야했습니다.
올해 여름의 끝은 유난히 지루합니다. 이러다가는 가을의 시작조차 분별해내지 못하고 말 지경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비단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는 막바지 더위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압니다. 정치 경제 사회 그 어느것 하나 이 지루함을 덜어주지 못하는 막막한 현실을 우리는 계절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거둘 것 없는 사람들의 가을이 그렇듯이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성장 일변도로 달려온 경제 논리는 자연환경 파괴라는 엄청난 폐해를 가져왔고 질시와 반목이 횡행하는 정치 이데올로기나 종교 이념, 영토분쟁은 정작에는 기아와 전쟁이라는 재난을 몰고 왔습니다. 과학의 발전 또한 인간에게 더없는 편리함을 제공해주고 있지만 그 한계를 뛰어 넘어 인간두뇌의 한계성까지 넘보고 있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인간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위기를 느끼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혹자는 그 힘은 바로 ‘생각하는 힘’이라고 단언합니다. 인문학의 부흥만이 곧 위기에 처한 우리 사회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이 정신을 앞서는 시대에서일수록 예술의 힘이 더욱 새롭게 빛나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위안과 사유의 힘입니다. 물론 오늘날과 같은 각박한 현실에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갖추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 21세기를 맞고 있는 지금,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우리 삶 구석구석에 몰려오는 지금에라도 자아와 세계적 인식의 끈을 새롭게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기말의 혼돈스러움을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지리한 여름 끝에서 우리의 이웃 ‘광주’는 다시 화려합니다. 지난95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국제적인 미술축전 <광주비엔날레>의 막이 오른 덕분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지난해만큼 떠들썩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습니다. 1백60만 관람객을 불러모으는 등 큰 성과를 보였던 95광주 비엔날레가 관람객 끌어모으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노출했던 많은 문제점들, 이를테면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평면적 전시나 조직적이지 못한 운영 등 창설대회로서의 미숙함을 보였던 것과는 다소 다른 진지한 모색과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미술의 바깥‘보다는 ’미술의 안‘에 초점을 맞추어 놓은 덕분입니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는 광주비엔날레 전체적 분위기를 관통하는 주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올해 주제는 <지구의 여백>입니다. 현재 지구가 당면해있는 복잡 다양한 문제들 속에서 왕성하게 작용하는 힘들, 무수한 틈새들, 그 특이한 점들을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이 주제가 뜻하는 바입니다. 광주비엔날레는 현대세계의 막다른 상황에서 의미있는 예술이란 여백을 발견하고 여백을 실천하는, 여백 자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나 사상, 국경 등 서양문명이 구획한 경계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틈과 접점들의 중요성을 드러낸 작품들을 모아 그 생생한 힘을 들여다보자는 것이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주제입니다. 새로운 세기를 향한 대안과 세계적 인식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문화담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인간 스스로의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 성찰의 태도로부터 출발하는 예술행위이자 문화 체험인 셈입니다.
<지구의 여백>은 다섯 개의 작은 주제와 동양사상을 상징하는 음양오행으로 다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속도/물> <공간/불> <혼성/나무> <권력/쇠> <생성/흙> 등이 그것입니다. 이 주제들은 물질문명과 과학발전의 현대화과정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핵심적인 단어들입니다. 속도에 대한 해석을 문명 정신 자연 등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 새로운 시간과 속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속도/물전>. 세계 22개 도시에서 벌어지는 지구촌 도시의 양상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세기말 지구촌의 단면과 실상을 드러내는 <공간/불전>. 인종과 문화의 전세계적 혼합양상을 보여주는 <혼성/나무전>. 드러나 있거나 감추어진 채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작용과 반작용, 그리고 그것의 복잡 미묘한 양태를 드러낸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권력/쇠전>. 몸과 마음, 사회와 자연 속에서 쉴새없이 작용하면서 만물을 변화시키는 힘이 생성과 변화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생성/흙전>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점과 문명의 틈새들에 대한 점검입니다. 현대미술을 통해 제공되는 오늘날 지구촌의 문화환경의 이슈는 참으로 다양하고 상징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 좀더 구체적으로는 우리지역의 문화환경은 어떤것일까요? 사실 우리에게 절실한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땅의 삶과 가치에 대한 성찰과 대안 마련입니다. 불행하게도 지역의 문화환경은 천박하다 못해 최악의 상황입니다. 물론 이 상황은 물리적 환경으로서의 기준이 아니라 의식과 인식의 체계에 있어서의 상황을 말합니다. 문화공간의 들어서고 행사들이 아무리 즐비하게 뒤를 잇고 있다해도 우리가 여전히 문화적 자긍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인식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문화적 현실에 대한 진정한 시각의 문제입니다. 지자체시대가 시작된 후로 뒤를 잇고 있는 갖가지 문화적 행태들은 우리에게 사유하는 힘은커녕, 오히려 자기 성찰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영향을 미칩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근시안적인 성과만에 급급한 문화환경 설정은 문화적인 전통의 뿌리마저 흔들리게 하고 있습니다. 단체장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나 의욕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지자체 시대의 어떤 정책도 진정한 공론화 과정을 거치는 일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전히 탁상공론이고 즉흥적입니다. 그런 환경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건강한 비평세력도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다고해서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중국의 사상노인 노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를 건강한 시각으로 견제하고 감시하는 사람들이 보다 많아지는 것,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희망을 세워나가는 일이 지금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