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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 | [문화저널]
법 앞에 무너진 완고한 사슬·이송희
이송희 (2004-02-12 16:04:23)
헌법재판소가 동성동본간의 혼인을 금지한 민법 제809조 1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 이유는 모든 국민은 혼인 상대방을 특별한 제한없이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동성동본 금혼규정이 배우자의 선택의 자유와 행복추구권 등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 헌재는 국회가 98년 12월 31일까지 이 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99년 1월 1일부터 이 조항의 법적효력이 자동적으로 상실한다고 하고, 법원 기타 국가기관 및 자치단체는 국회가 이 법을 개정할 때까지 이 조항의 적용을 중지하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헌재의 결정으로 3-6만여쌍의 사실혼관계 동성동본 부부 등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어서 법적인 부부로서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성동본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혼인외의 자에서 혼인중의 자가 될 수 있고 배우자들은 의료보험, 가족수당, 세금공제 등의 혜택을 누리고 상속 등 재산 문제나 각종 행정절차에서의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 성(姓)과 씨(氏)의 발생유래를 보면 논어나 맹자에서는 성(姓)은 모계사회에서 자식이 태어나면 어머니가 속한 부족이 살고 있는 동네로 보내 살게 한데서 유래하여 어머니가 살고 있는 부락의 이름을 성으로 표시했고 씨(氏)는 한 부족이 살고 있는 지명을 의미했다. 그 후 BC 8세기를 전후한 춘추전국시대에 와서 성과 씨의 구별이 없어지고 한 단어로 되었다. 동성동본불혼제도의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명장을 안내한 이덕형이 그 부인과 같은 성씨임을 알고 명의 유림들이 멸시를 보냈던 것에 기인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대에 이르러서는 이 제도를 위반하는 사람을 처벌하기까지에 이르렀으나 송, 원, 명대를 거쳐 청나라 때인 1907년과 8년 사이에 이 제도를 폐지해 현행 중국법은 부계로는 8촌, 모계로는 5촌까지로 한정시켜 근친혼을 금하고 있을 뿐이다. 신라시대의 골품제도와 고려와 조선왕조를 보면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혼인형태는 근친혼이었다. 이조 초기에는 근친혼 관행이 남아 동성동본금혼의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으나 조선중기 명나라 대명률을 통치기반으로 선포하고 주자학을 받아들이면서 정착되어 58년 민법에 이 규정이 생긴이래 40년간 지속되어 오면서 우리 나라의 혼인관습으로 뿌리내려 왔다. 그러나 인구급증으로 동성동본 남녀들이 교제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 이들의 피해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잘못된 제도로 인해 사랑하는 남녀가 헤어지거나 급기야 동반자살을 하는 등의 사회적 문제로 야기되자 정부에서는 78년, 88년, 96년 세차례에 걸쳐 혼인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해 4,577쌍, 12,443쌍, 27,807쌍을 각각 한시적으로 구제를 해 주었다. 이는 법으로서의 실효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리 나라의 성과 본은 모계혈통을 무시하고 부계혈통만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성과 본을 취하는데는 반드시 남계혈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그 예를 들면,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르게 하고(민법 제781조 2항), 부모를 알 수 없는 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성과 본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있으며(민법 제781조 3항), 양자를 얻을 때 양친이 원하면 양친의 성과 본을 따르게 하고 있다(입양에 관한 특례법 제8조 1항), 그리고 고아원생의 경우 임의로 고아원 원장의 성을 따른다든지 입부혼인의 경우 자식은 모의 성과 본을 따르고 모의 가에 입적하게 된 경우(민법 제826조 4항) 등을 볼 때 성과 본으로 혼인성립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고 사실혼 동성동본자라 할지라도 어떠한 형태이든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 출생신고를 하면 그 혼인을 취소할 수 없도록 하여 조문 상호간 일관성이 없고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불합리한 제도를 개정하기 위해 여성계는 그 동안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93년 7월에는 한국가정법률상담소와 한국여성단체협의회가 이 규정의 폐지를 국회에 청원했으나 유림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95년 4월 동성동본금혼법개정을 위한 당사자 모임은 서울가정법원에 관악구청장을 상대로 동성동본혼인신고 불수리 처분에 대한 불복신청과 위헌제청신청을 해 달라고 제기했다. 이 주장을 받아들여 헌재에 위헌심판을 제청해 헌재는 유림측 주장은 물론 유전학자의 의견, 여성계 등의 주장 등을 받아들여서 헌법불일치 결정을 내렸다. 유림측은 그 동안 고유의 미풍양속과 우생학적 이유를 들어 이 규정의 개정을 반대해 왔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이 제도는 중국에서 전래된 제도로서 우리의 미풍양속이 아니며, 우생학적 문제도 한 세대가 지날때마다 반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10대 후에는 10만분의 1, 15대 후에는 10만분의 3으로 희박해져 8촌이 넘으면 문제가 안된다고 한다. 이번 헌재의 결정에 대해서도 유림측은 소수에 불과한 동성동본부부의 행복추구권을 위해 이 조항을 폐지한 것은 반대이며, 민족정기와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라고 비난하고 헌재의 결정이 취소될 때까지 동성동본금혼법 수호서명운동을 전개해 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헌재의 결정은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에 입각한 가족 생활유지와 남녀평등의 원칙을 인정한 것이며, 남계혈통중심의 구습을 타파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결정으로 근친혼이 양산될까봐 우려하고 관습상 정서상 같은 동성끼리의 혼인을 꺼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헌법상 혼인의 자유가 보장되었듯이 당사자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허재도 이 부분에 대하여 근친 사이의 혼인문제는 법적으로 동성동본금혼제를 제외한 여타 민법규정으로 규제하고, 이를 넘는 금지혼의 범위는 변화하는 윤리와 도덕관념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 이상을 법적으로 규제할 사회적 기반은 이미 붕괴되었거나 근본적으로 동요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부계와 모계의 8촌 이내의 혈족이거나 인척인 경우 혼인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민법의 규제만으로도 우생학적 문제가 되는 근친혼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헌재의 결정으로 늦게나마 사실혼 동성동본 부부들에게 신분상의 불이익 해소와 각종 생활상의 혜택을 줄 수 있고 무엇보다 떳떳한 법적인 부부로서의 권리를 찾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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