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문화칼럼]
창자(創者)와 청자(聽者)·이병훈
이병훈
(2004-02-12 15:59:43)
지난 8월8일부터 10일까지 2박3일간 무주에 다녀왔다. 전북작가회의가 마련한 여름시인학교에 참여한 것이다. 곳은 무주군 기곡수련원이었고 명분은 「반딧불을 찾아서」였다.
무주가 손이 덜 타서 조금은 깨끗할 것이라는 인상이었고 반딧불을 찾아간다는데 호기심이 갔다. 또 그런 곳을 찾아드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싶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날씨가 좋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반딧불은 하나도 못만났고 시원하리라고 기대한 개울물도 흐려 개운치가 않았다.
수련원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고쳐서 만든 것이었다. 집 지붕이 시멘트슬라브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더웠다. 밤에도 더워 잠자리가 고단했다. 밤에 추울것이라 지레 생각하고 긴팔옷을 가지고 간 내가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반딧불을 만나는 밤」이라는 주제로 강의한 전북대 교수 김태홍씨 말에 의하면 반디가 없는 것은 개발한다고 수로의 모래를 파냈기 때문이라 했다. 반디의 생활터전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탄스러운 일이고 허망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주변이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들떴던 기대는 일시에 허무러지고 말았다.
세상은 너무나 쉽게 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때서야 굳이 청정지역을 찾아 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침 무주군에서는 반딧불이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작은 벌레가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했던 것을...”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 글을 쓰고자 할 때면 영낙없이 마을 서경 서정이 다가선다 동구밖 우람한 느티나무의 권위로부터 아득하게 들어 선 마을 안에서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뒷산 동산 서산에 에워쌓인 마을 사람들과 바람과 나무, 풀, 그리고 짐승들, 벌떼들이 어우러져 사는 소리일 것이다.
소리는 더 없이 맑았다. 달거리노래, 밭갈이, 논갈이노래 김매기노래, 등짐나르기노래, 견우와 직녀의 노래, 나아가 호남가에 육자배기등 수도 없이 많은 노래가 있었다. 철따라 벌어지는 잔치마당 풍장소리, 들일 풍장소리가 멀리까지 가슴을 흔들었다.
물은 넘쳐 마을 한쪽으로 사철 흘렀다. 어디를 가나 빼놓지 않고 옹달샘이 있었다. 땀흘려 일하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의례 들러 땀을 말끔이 씻어낸 곳이다. 가슴에 답답하리만치 차 있는 더위를 쏟아버린 곳이다. 물고기는 어찌나 많았는지, 멱감는 어릴적 나의 손에 잡힐 정도의 등불을 들고 게를 잡으러다니던 기억이 떠올라 못견디게 한다. 김매면서 메기 붕어 게 따위를 흔히 주워왔다.
비 오는 날에는 미꾸라지가 고삿 도랑 깊숙이 올라와 우굴거렸다. 집안 지시락 물이 떨어지는 마당에까지 붕어가 기어 올라 와 꿈틀거렸다. 이걸보고 나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한 어른들의 말을 곧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철 되면 새들이 찾아들었다. 황새, 뜸북이, 꾀꼬리, 쑥국새, 여기 저기에서 목청 좋은 소리가 평화스러운 서정으로 다가 섰다. 황새는 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농사 일을 한 또 다른 기솔이었다.
산엔 산토끼, 마을엔 고양이, 살쾡이, 쪽제비 등 짐승들 역시 동거자임이 분명 했다. 반딧불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한움큼씩 잡아다 망대에 넣어놓았던 기억이 황홀하다. 귀뚜라미 역시 흔했다. 밭에 채일 정도였고 얼굴을 차고 달아나기도 한 귀뚜라미가 알려주는 가을저녘은 어쩐지 처량했다. 모두 한가닥씩 읊어대는 소리꾼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마을은 놀이터였다. 집안에 있기가 답답하지만 훤히 열린 놀이터 놀이마당이었다. 산으로 들로 개천으로 뛰어 놀던 때가 그립다. 어딜 가나 잡을 것 딸 것이 깔려 있었던 때의 놀이 굳이 게임이 무슨 필요가 있었겠는가, 달리고 뛰고 어우러져 씨름하고 다투며 하루 하루를 살던 때의 활력, 나의 어릴적에 그만한 활력이 저절로 따라 있었다. 어른들은 내 방치하고 나는 나대로 큰 것 같기만한 때였다.
지금은 다 사라졌다. 저절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쫓아냈거나 말살시키고만 것이다. 더 잘살기 위한 수단이 이유였다. 얼마나 미련한 일이었는가 조금씩이나마 깨달은 때는 이미 늦었다.
상황은 여기에 열거하지 않아도 처참한 지경에 이르러있다. 밭일터에서는 “카세트”하나 놓고 노래를 득고 있다 논에서도 마찬가지다. 논두렁에는 의례 ‘카세트’가 놓여져 있다. “카세트”는 눈치볼 것도 없이 가요를 쏟아놓는다. 그것도 큰소리로 이어서 테잎은 한없이 길게 연장되면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밭갈이하는 농사꾼들이 소리를 불렀던 그 곳이다. 예전에는 논일, 들일하던 그 곳이다. 흥겨워 저절로 쏟아지는 그 소리는 그들 농사꾼들이 일하면서 지어 부른 것이다. 그 때는 창자(創者 혹은 唱者)였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짓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스스로 부르지도 않으면서 그저 듣기만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이미 창자가 아닌 청자(聽者)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무대로 말하자면 단상의 연기자와 연주자에서 단하의 방청석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농사야 그렇게 경작하건 말건 뭐 다를게 있겠느냐 하겠지만 예전에는 소리로 지은 산물과 그렇지 않은 곡식이 같을 것인가 곰곰이 따져봐야 할 일이다. 소리로 지어 걷은 곡식은 소리의 씨일테니까. 그만큼 맛이 다른 것은 뻔할테고 그만큼 정서적 양분이 함유돼있을 게 뻔하지 않겠는가.
어찌 같다 하겠는가.
지금은 농촌에도 놀 데가 없다. 개울은 극도로 오염돼 고기가 살지못하고 있고 고삿 도랑이 말라 앙상하게 드러난지 오래다. 옹달샘이 다 뭐냐, 산이고 들이고 강가고 어디 한 곳 성하게 남은 데가 없다. 청정이네 무공해네라고 쓰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올 것이 온 것이다.
어쩌다 마을에 가보지만 고삿 산과 냇가에 사람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모두 떠나버렸다 한다. 어린이들마저 떠나버렸다 한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텔레비젼’앞에 쭈구리고 앉아 있거나 그 놈의 ‘카세트’앞에서 가요를 듣고 있는게 고작이다. 푸접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앞산 뒷산 넓은 뜰 한 쪽으로 넉넉하게 흐르던 강을 들썩 들썩하게 하던 그 흥과 신명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누가 쓸어가버렸는지 안쓰럽기 그지 없다.
이젠 그리움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것도 절실하게 떠올리는 사람에게 한해서... 서로 서먹거리는 풍경들이고 터전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상징적 존재 또는 그러한 상황들인 듯 하다. 세상을 그만둔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못하니까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치려고 아니 회복하려고 서두는 것 같지만 무엇이 어떻게 사는 것이 질 높은 생활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라를 사회를 이끌고 있는한 회복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