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문화저널]
민족예술, 마침내 마당에서 무대로
문화저널(2004-02-12 15:56:26)
갑오농민전쟁으로 신분제를 철폐시킨 음악·춤 예술인들은 또다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근대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은 사회경제적 발전과 함께 두가지 점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상설무대의 마련과 민족예술형식의 탄생이 그것이었다. 사설극장을 짓고 상설무대화를 통하여 ‘산조’와 ‘창극’ 그리고 ‘승무’ 등 새로운 민족예술형식을 창출시켜 민족음악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갑오농민전쟁은 19세기 말 이후 음악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상설무대화는 새로운 민족예술의 창출계기
서울의 경우 1899년 초 사설극장으로 실내무대형 연희장이 아현지역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1900년대에는 용산무동연희장, 1902년 협률사, 1907년에는 연흥사와 광무대 그리고 단성사가 1908년은 원각사가 만들어졌고, 그밖에 장안사와 음악사와 단흥사 등 여러 극장이 생겨났다. 서울뿐만아니라 전구그이 상설시장을 비롯한 개항장 등에서도 연희장이 속속 만들어졌다. 경기도 송파에서 상인들이 송파시장을 상설적으로 열고 산대놀이패를 육성하여 공연케 함으로써 구매자들을 끌어들였고, 전국의 조창지역에서도 상업자본의 발달로 온갖 예인집단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이들 지역에는 전문예술가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넘쳐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갑오농민전쟁으로 신청(神廳)조직들이 천민신분에서 해방됨에 따라 전문예술가들로 변신한데다 이들 지역에 상업자본의 집중현상을 낳아 예인적 기질의 농민 출신들조차 몫이 좋은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또 개항지에 상주하는 외국인들의 문화공간에 자극을 받은 까닭이었다.
서울과 개항지의 외국인들이 상설극장 설립과 함께 자국의 문화예술을 소개하고 있었던 현상은 만만찮게 전개되고 있었다. 1903년 외국인들의 수는 이미 3만6천여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들은 자국의 문화예술을 자연스럽게 소통시키고 있었다.
1902년 여름에 일본인들이 서울교동에 연희장을 설치하고 매일밤 왜창(倭唱)으로 무대를 꾸려나갔다. 1880년대부터 일본 현지에서 유행한 소오시(壯士)들의 신파극인 소오시게키(壯士劇)와 엔카(演歌)와 그박의 ‘나니와부시’(浪花節 샤미센 악기반주에 부르는 노래와 이야기)등의 왜창, 그리고 가부키좌(歌舞伎座)가 상설적으로 무대에 올려지고, 1899년부터는 변사(辯士)를 동원한 일본 활동사진(영화)이 유행하는 등 서울과 전국 개항지의 일본인 거류지역에 유입되었다.
청국인들의 거류지역도 마차가지였다. 서울의 청계천 2가 수표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청국인 거주지역에 청국상인들이 1904년 아예 청용관이라는 상설극장을 만들어 청국 연희패와 경극단을 들여와 연행과 패왕별희식 경극을 유행시키고 있었다.
1898년 철도가 부설되고 서울 시내에 전차궤도 부설공사, 1899년 경인선 개통, 1900년 한강철교 준공, 1901년 경부선 기공식 등과 함께 이들 외국인들의 무대예술과 연행, 영화 등이 현지 문화예술인들과 교류되고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면서 한국인들은 엄청난 문화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중국과 국제관계에서 입었던 문화충격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충격이었으며, 한국 음악사에 근대적인 힘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외래문화는 새것이고, 한국문화는 헌것이라는 등식이며, 근대화의 힘은 외래문화에서 나오고 그 걸림돌은 한국의 전통문화라는 사고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충격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문화충격에서 상설극장을 만들고 민족양식을 새롭게 창출하면서 외래문화의 접촉을 통하여 근대화를 모색했던 시기가 바로 19세기말 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은 사랑방이나 관아의 뜰, 궁정과 병영의 공간, 정(산정, 계정, 강정, 모정, 수각 등)과 강이나 도시 근교의 가대(歌臺) 그리고 시장의 공간, 사찰, 기생들의 기방 등에서 음악과 춤이 소통되고 있었다. 이들 공간의 시쳇말로 자연환경공간이었으며, 그 음악들도 환경음악이 대부분이었다. 이 공간에서 상설무대로 그 소통이 바뀌어져가고 있다는 점은 이 시대의 음악적 사회변동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상설무대화는 음악·춤 예술인들이 생각했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더 이상 먹거리를 찾아 떠돌지 않아도 되었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특정 계층의 음악보다 상설무대로 찾아드는 모든 계층을 위한 대중적 공연작품 개발, 특히 여성층을 상대로 부인석을 마련하고 공연작품을 고려하며, 입장권 판매와 공연홍보, 배우관리 등 유통구조의 조직화가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뚜렷한 음악적 사회변동의 흐름이었다.
민족예술형식의 새로운 발전과 수용
이 시대의 음악사는 어느 한쪽의 음악감수성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시대적인 변천과 함께 민악(民俗樂)예술이 더 선호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1900년대에 올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안으로는 서양식 군악대, 공호대 편성과 애국가 제정운동에 따른 감수성 변화와 농민전쟁을 통해 해방된 민족정서의 확인, 그리고 밖으로는 영화나 음반 등의 수용과 청의 경극과 일본의 가부키나 엔카 등의 유입에 따른 문화충격 속에서 다양한 음악적 감수성이 발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그 시대가 무엇보다도 민악의 감수성으로 통일되어져가는 현상은 민악이 민족의 공동체적 정서를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신청출신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었던 판소리와 시나위 합주에서 비롯한 이 시기의 ‘산조출현’은 한국음악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태어난 온갖 악기별로 유파를 형성케한 산조 양식은 이후 지금까지 100년 이상 한국음악의 마음이자 창조적인 샘물로 작용하였다. 전라도의 김창조(金昌袓 1856-1929)와 한숙구(韓淑求 1850년경-?)가 창시한 가야금 산조는 서산의 심상건(沁相健 1889-1965)등 산조 제1세대를 거치면서 산조시대를 열어갔다. 거문고의 명인 백낙준(白樂俊 1884-1933)도 그 산조를 놓칠세라 거문고 산조를 1896년경 같은 구조로 만들었다. 1900년대에 들어와 박종기(朴鐘基 1880-1947) 역시 같은 틀로 젓대산조(대금산조)를 만들었으며, 지용구(池龍九 ?)가 해금산조를 만들었다. (아쟁산조와 피리산조는 1950년을 전후로 만들어질 정도로 최근까지 산조가 악기별로 만들어진 셈이다.)
이처럼 ‘산조’는 민족 최대의 음악형식으로 ‘산조예술시대’를 개화시켰고, 이들 산조 1세대들의 창의력이 역사적 기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당당한 민족음악형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 산조는 17세기부터 풍요로워진 판소리와 이전부터 있어왔던 시나위에서 창출되었다. 자연히 산조는 기악독주곡이면서 판소리 가락처럼 성악적 선율을 기악화했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구음’으로 노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나위처럼 즉흥적 연주가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산조(散調)는 기(氣)바람으로서 자유스럽게 흩어지게 한다는 ‘풍이산지(風以散之)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규정없이 즉흥적 연주로 혈맥(血脈)을 타는 생체 음악이었고, 그런 점에서 한국음악과 춤의 개념을 따르고 있었다. 이들 산조들은 처음에 기본 장단에 각 장단마다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된 장별제 산조로 형식적인 약속 아래서 그 내용들을 즉흥적으로 연주했었다.
김창조의 가야금 산조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한숙구의 가야금 산조는 진양-중모리-주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중중모리-중모리 장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는 진양-중모리-엇모리-잔모리 장단이었다.
이러한 제1세대들의 산조는 제2세대 산조 음악인들에 의하여 장단틀과 가락이 새롭게 짜여지는 적층적 산조가 발전하면서 수많은 ‘유파 산조시대’를 맞이하며 발달되어갔다. 그러나 유파의 형성과 제자들의 관리와 서양음악의 형식 영향이라는 이후의 시대성 때문에 점차 산조연주가 2세대 이후로 일정하게 규정화하고 악보화 함으로써 ‘풍이산지의 원리’의 맥을 끊어놓아 즉흥연주의 전통이 쇠퇴해 버린다.
한편 1900년대 들어와 판소리가 ‘창극’으로 창출되어 산조시대와 더불어 민족가극으로서 창극시대를 열어갔다. 다른 한편으로 전통예술인들이 상설무대화로 명고수이자 명무가인 한성준(韓成俊 1874-1941)에 의한 ‘승무’ 등 근대적인 민족춤도 같은 창작의 원리로 만들어졌으며, 이들 판소리 창극화와 승무의 주역들은 1902년에 설립된 ‘협률사’로 구체화되었다. 협률사 조직 자체도 한국음악사의 최대 사건이랄 수 있는데 그 내용과 창극·승무 등의 내용은 다음호에서 찾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