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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8 | [문화저널]
침묵하는 역사에 대한 항변·편집부
편집부 (2004-02-12 15:52:18)
민족을 새로 느끼다 『아리랑』을 읽으면서 줄곧 느꼈던 감정은 쑥스러움이었다. 제국의 거대한 힘에 핍박받으면서 옳지 못한 일에 항거하여 민족과 스스로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처음 내가 한 일은 작가의 목적의식을 핑계로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심은 이내 내 알량한 지식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바뀌었고 나와 다른 생각들을 의심하려 하는 나의 경직된 사고에 대한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민족적 열등의식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작가가 드러내는 우리 민족의 ‘근면’, ‘성실’, ‘자주성’을 이전의 나는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았고 그것들을 그저 구태의연한 계몽구호의 나열로 평가하려 했다. ‘왜 나는 당시 우리민족의 삶을 투쟁과 항거의 역사로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나는 당시의 삶을 굴욕과 패배의 관점에서만 평가하고 있는가’ 등의 물음이 책을 읽는 순간순간마다 나를 부끄럽게 했고 의식적인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송수익이 의병을 해산시키며 <아리랑>을 부르던 부분이 내 사고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들이 부르는 아리랑은 해산의식의 일부분으로서가 아니라 민족을 잊지 않겠다는 맹세요, 피로 쓰는 다짐이라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민족을 새로 느끼는 시작이었고 ,아리랑>을 그저 민요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전북대 영문과 2학년 신일섭) 아리랑의 노래가락이 되어 내 가슴을 파고든 것은 하와이 농장으로 끌려갔다가 죽음을 맞은 주만상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처음으로 루나들에게 대항했던 방용근의 용기와 단합된 힘으로 뭉친 동료들의 끈끈한 동료애에서 나온 일정의 희열 같은 것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일어섰고 그것을 얻어낸 것이었다. “저승길이 멀고 험해 고향서도 어둔 발길 타국땅 수만리서 어찌 갈거나” 뼈에 사무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은자의 원통함에 나는 가슴 가득히 공감할 수 있었다.…(중략)…마치 잔잔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이 춤을 추듯 햇빛이 반사되어 쑥스러운 빛을 토해내듯 반짝이며 찰랑거리는 고향의 시냇물처럼 하와이의 이글거리는 햇볕 속으로 그렇게 상여는 멀어져 갔고 사람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통했던 그 감정이 마침내 각자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서 하나되는 가락을 뽑아냈다. 바로 그 묘한 서글픔으로 사람을 울리는 아리랑…. 그 하와이의 낯선 땅, 낯선 태양과 맞서 싸우는 그들의 용기가 그대로 아리랑의 노래 가락이 되어 내 가슴에서 끝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전북대 2학년 배수영) 그때 그들의 원통한 한 송수익이 죽은 후 송가원이 옥비에게 진혼곡을 요청하고 옥비가 길게 풀어내리는 ‘소리’에 어느새 진혼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옥비의 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억울하고 한 많은 민족의 설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가사를 읽어내려가면서 또 그 노래가 다 끝날때까지 내 눈물…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왜 왔던고 왜 왔던고 만주벌판에 왜 왔던고/ 낯설고 물설은 만리타국 만주땅에 어인 일로 왔던고/삼천리라 금수강산 왜놈 발에 짓밟혀서/조선해는 간곳없이 암흑천지 되었으니/뜻 굳은 남아로서 할 일이 그 무언고/빼앗긴 나라 되찾는 것 그것밖에 더 있는가…(중략)…혼백으로도 끝끝내 싸워 이길터이니 나를 만주땅에 뿌리거라/고결하신 그 뜻에 산천초목이 떨고/휘영청 밝은 저 달도 낙루하는데/어찌타 뒤따르는 자들이 그 뜻 모르오리까…” 노래가사 만큼이나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옥녀와 송가원과 함께 울면서 그의 장례식 장면을 떠올렸다. 광막한 만주벌판의 찬바람을 타고 뼛가루가 멀리멀리 남쪽으로 하얗게 날리던 장면을. 타국 여기저기에 그렇게 뿌려지고 묻혀진 그때 그들의 원통한 한이 이제는 진정되었을까… (전북대 2학년 방자향) 조선의 소나무가 보고싶다 “조선의 소나무가 보고 싶다. 바위틈에서 꼬불탕 꼬불탕 자라면서 억세고 질긴 늘 푸른 소나무가 보고 싶다.” 내 나라, 내 조국이면서도 갈 수 없는 나라. 하와이로 끌려가 이제 나이 50을 넘긴채 시한부 생명을 살고 잇는 구상배는 조선쪽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고향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도 광복군을 모집한다는 소리에 자신의 외아들을 전쟁터로 보낸다. 배를 떠나 보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수많은 조선인들. 지금 이 시대 우리 부모님들이 전쟁터에 하나뿐인 아들을 보낼 수 있을까? 난 우리 조국을 사랑할 것이다. 이 시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의식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치욕과 분노 속에서 땀을 흘리고 피를 흘려 이 나라를 만든 것이다.… (전북대 건축과 2학년 손정인) 해방은 분단의 시작이었다 “처절한 비명 속에 피가 튀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도 중국 사람들에게 덤벼들고 또 덤벼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의 연장을 뺏어 싸우기도 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광막한 벌판 저쪽으로 기를 쓰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거의 다 쓰러져 갈 즈음 여자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끝없는 광야 저쪽에 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덧붙임 : 그들은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그때를 ‘해방’이라 부르지 않고 ‘그 사변’이나 ‘그때 사변’이라 부르며 살고 있다.” 『아리랑』의 대단원은 이렇듯 비극적으로 결말지워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 해방은 민족적인 감격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작가의 이러한 결말이 나는 마음에 든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해방은 진정한 기쁨이 아닌 남과 북을 가르는 아픔이라는 것을. 그리고 반민족행위자는 지금이라도 처벌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전북대 사회교육과 3학년 조은정) 기회주의자들의 슬픔 기회주의자의 슬픔은 기회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는 데에 잇다. 나는 지난 시대에 호의호식한 매국노들의 죄과를 물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적어도 애국이라는 대의를 저버렸지만 인간본연의 목소리에 충실했던 쾌락주의자들을 두둔하자는 것도 아니다. 편한 시대에 어려움없이 고민없이 살아가는 내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 시대의 어느 젊은이도 그러한 때가 다시 온다면 백종두나 장덕풍같은 이가 되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못한다. 너무나 많이 받기만한 우리 세대들은 이미 철저한 기회주의자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이 문제부터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전북대 건축과 2학년 한충헌) ‘영화 속의 진실’을 넘어 일제시대는 내게 ‘영화속의 진실’같은 것이었다. 잔혹한 왜놈과 고통받는 우리 민족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동정심. 그것들은 참으로 막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사실을 전해준다. 책을 보고 있는 동안 한 친구가 말했다. “정말 너무 이상했어. 우리 바로 옆동네가 죽산인데…” 아마도 내가 서울에서만 학교를 다녔다면『아리랑』은 아직도 ‘영화보기’의 차원을 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근사하다고만 생각했던 전군가도의 벚꽃행렬을 이제 다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침 전주의 쌀을 군산항으로 끌어내기 위해 전군도로를 만들고 있는 장면을 읽고 있을 때가 한창 벚꽃이 만개했을 때였다. 사람들이 연일 벚꽃구경을 다니고 지방 방송국의 뉴스에서는 그 모습을 전해주고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온 이후 아무도 전군가도에 대해서 그 벚꽃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왜 모두들 전군가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지긋지긋한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원광대 한의학과 2학년 맹유숙) 어머니의 힘 아리랑을 읽으면서 작가가 의도하는 민족의 힘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의 든다. 너무나도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모습에서 작가가 주장하는 민족의 저항이나 불굴의 의지는 되색되어 보인다. 아리랑의 전반부에 보이는 대표적 어머리상은 감골댁이다 남편을 잃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국으로 노예생활을 떠나는 큰 아들을 보내는 심정, 아들의 몸값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횡포를 당하고도 체념해 버린채 강간당한 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쫓겨가듯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하기조차 한 어머니, 하지만 그 어머니의 한은 미약한 저항의 씨를 뿌리고 다시 강렬한 저항으로 다시 태어난다. 어린 아들은 장성해 독립군으로, 딸은 남성에 저항적인 약하지만은 않은 강한 여성으로 다시 난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그 고통을 온몸으로 버티며 나라를 지탱했던 것은 소수의 식자(識者)들이 아니었다. 평범한 농꾼들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어머니들의 힘이었다. 어머니는 새로운 힘을 창출해내는 감추어진 주역이었다.… (전북대 미술학과 3학년 채지은) 이 땅의 침묵에 대하여 “반공호 입구에서 무엇인가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시뻘건 피였다.” 지시마 열도 여러 섬에서 이런식으로 죽어간 조선의 노역자들은 4천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해방 이후 정부는 침묵했다. 몰라서일까? 아니면 치욕스러워서일까? 또 하나 자꾸만 잊어버리려 하는 것은 종군위안부, 일명 정신대이다.…(중략)… 12살짜리 어린여자 아이까지 정신대에 끌려갔다는 사실에 전세계가 놀라고 일본의 야만성을 비난했지만 이땅은 침묵하고 있다. 역사는 감추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 후세에 반복되는 불행을 막아야 한다.… (전북대 신방과 2학년 이종진) 우리시대의 ‘세검정’은... 『아리랑』을 읽으면서 나는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기억해냈다. “말조심 하시오. 매춘이라니! 강제로 끌려간 여인들이요” “그래서 그 여자들이 돈을 안받았어요?” “우리는 비록 더럽고 냄새나는 몸을 팔았다지만 당신들은 나라를 팔았잖아요!” ... “죽고 싶었지만 죽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일본이 우리 나라를 강점한 후 저지른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도 인간이 탈을 쓰고 차마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은 여성을 위안부로 부려먹은 여자정신대였다고 생각한다.…(중략)…작가 최인호는 정절을 지키는 여성들에게 ‘여성은 오직 한번 승부한다’고 했다. 나는 엄격한 유교 율법이 지배하던 당시의 풍조가 정신대 여성들의 가슴에 더 깊은 골을 팠다고 생각한다. 병자호란때 우리 나라의 많은 여성들이 청병들에게 능욕당하고 끌려가서 정절을 더럽히고 순결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시에 조정은 이 여인들 모두가 세검정으로 몸을 씻고 장안으로 들어오면 그 이후부터 깨끗하고 순결한 여인으로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법령을 내렸었다. 정신대에 끌려갔던 여인들을 위한 세검정은 왜 다시 없었는지 나는 안타깝다.… (원광대 불문과 2학년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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