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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8 | [문화저널]
백제의 태동과 지역토착세력과의 관계·편집부
편집부 (2004-02-12 15:51:16)
문화저널에서 주최하는 시민강좌「백제의 역사와 문화」그 첫 번째 강의를 제게 맞겨준 것에 대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강연은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백제의 건국과정과 마한의 변화에 대한 문제입니다. 백제 건국의 핵심지역은 서울 강동구 강남일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되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건국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집단들이 새로 터전을 잡았다고하며 마한세력과의 갈등, 북쪽에 있는 말갈(동예로 이어지는 예의 세력) 등의 주변세력하고 끊임없이 다투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정복에 의해서 세력을 확장한 후 건국되었을 가능성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럼 왜 백제는 한강유역까지 내려와서 건국하였을까요? 백제의 건국세력은 고구려 주몽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 세력으로 본처와 새 부인의 관계 그리고 내부사정에 의해 화를 피해 그 망명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온 듯 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세력이 확고하게 자리하지 않은 한강유역을 택해서 백제를 건국한 듯 합니다. 그러니 위의 내용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고, 백제의 건국의 과정을 정복왕조서로 풀이하는 분이 적지 않을 만큼 백제의 건국을 정복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여기엔 삼국사기를 보면 거기에 반하는 기록이 적지 않게 나타나 있는데 다음은 마한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내용입니다. “온조왕 10년9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을 잡아 마하네 보냈다.”는 기록과 “13년에 7월 한 산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기었다.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고하고 강력을 확정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24년7월에 왕이 웅천책이라는 방책을 안성쪽에다 세우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나무라기를 왕이 처음 하수(한강으로 추정)를 건너 발디딜 곳이 없자 내가 동북 백여리의 땅을 떼어 안거케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 할 것이다. 마땅히 이에 보답해야 할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거늘 이제 나라가 완전하고 인민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하고 크게 성지를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의리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하고 따지게 된다. 이러한 마한왕의 항의를 받은 백제왕은 이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책을 헐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초기 백제의 건국 당시의 상황을 보면 마한은 커다란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고 백제는 그 마한의 변두리 일부를 얻어서 세력을 키워 나가다가 마한과 몇번의 갈등을 일으켰으며, 나중에는 더 강성해져서 마한을 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백제의 초기 건국과정을 얘기할 때 마한을 정복하는 그런 식으로 얘기되어서는 안됩니다. 백제의 발전과정에서 마한에 대한 정복활동이 활발해진 것이고 초기건국 과정에서는 정복활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3세기 중엽경에 한강유역에서 새로 나타나고 있는 적석총은 그 중심지가 압록강 유역인데 평안도·황해도 지역을 공백지역으로 두고 한강유역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문헌기록에 나오는 백제건국의 핵심세력이 고구려 쪽에서 내려온 이주민이라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분명히 그 세력보다 먼저 토광묘를 쓰고있던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고 적석총의 등장과 함께 기존의 토광묘들이 여러 가지로 분화해 나가는 점에서 백제의 건국과 함께 국가체제에 맞는 새로운 지배질서, 계급의 형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제를 건국한 사람들이 고구려쪽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데에는 한강유역에서는 발견되는 적석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부가 돌이 아닌 흙으로 된 것으로 겉은 돌로 쌓은 적석총인데 그 내부를 잘라보면 흙으로 차있고 그 흙 부분에는 목관이 있습니다. 토광묘의 주 매장시설인 목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분의 피장자로만 볼 때 고구려쪽에서 이주한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의 것이라 보기 힘듭니다. 이것은 기존에 토광묘를 썼던 선주민의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겉만 고구려계통의 적성총으로 포장된 것일 뿐 그 피장자는 기존의 토광묘를 썼던 선주민의 것입니다. 또한 단독의 고분이외에 두 고분이 합쳐져 쌍분을 이루는 것도 있는데 이런 쌍분은 대개 고대국가사회에서는 왕과 왕비만이 쓸 수 있는 무덤입니다. 이 무덤을 두고 백제의 어느 왕과 그 왕비의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북분은 당연히 왕비의 것인데 그 계통이 고구려쪽이 아니라 토착 마한계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결국 백제의 어느 왕이 토착 마한계 왕비를 취했다가 두 사람이 죽을 때 합장을 할 계획 아래 왕비의 무덤을 겉이라도 왕무덤하고 결합할 수 있는 적석총으로 만들어졌다 하는 추리를 해봅니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해 보면 변화의 방향이 적성총에서 토광묘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적석총의 규모가 가장 크다는 사실에서 볼 때 역시 백제건국의 핵심세력은 고구려쪽에서 내려온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백제건국의 과정에서 토착세력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가운데는 왕비도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반드시 고구려 세력에 의한 토광묘 세력, 선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기존의 마한세력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세력을 일방적으로 정복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입니다. 백제의 건국과 더불어 마한의 관계는 필수 불가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한은 기원전 3세기경에 경기 충청 전라지역을 기반으로 한강유역까지 발전하였으나 백제의 발전으로 인해 마한의 영역이 축소되고 영산강유역을 마지막으로 백제에 병합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한을 논하면서 중요한 것이 중심지가 어디냐 하는 문제, 마한의 소멸시기 등 이런 문제를 들 수가 있는데, 중심지에 있어서는 문헌기록에 목지국이 54국 가운데 맹주국으로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한의 총왕이 있는 국가며, 3세기 후반에 가장 큰 중심지인 목지국이 백제의 영역 안으로 들어 간 사실은 백제의 팽창을 말합니다. 시기적으로는 4세기가 됩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 보면 369년 근초고왕 24년에 마한잔여세력을 평정한 것으로 되어 잇는데 고고학적으로 보면 4세기 중엽의 백제 팽창 사실은 마한의 잔여세력, 즉 마지막 세력인 영산강유역까지를 병합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익산지역까지 병합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전북과 전남을 통털어 토광묘를 대신해서 옹관묘가 발달하였는데 전북지역이 4세기 중엽으로 옹관묘의 발전이 끝난다는 점입니다. 마한의 소멸시기가 백제의 성장과 관련하여 언제이냐 하는 문제도 여러 견해가 있으나 그와 관련된 문헌 기록들을 보면 문헌에 따라 그 기록이 다릅니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온조왕 27년 기원후 9년,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369년 근초고왕 24년으로 소멸시기를 밝히고 있고,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291년까지 마한과 중국이 교류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전남지역에 석실분이 처음 나오는 시기는 5세기 중엽경으로 석실분이 유행하고 기존의 옹관묘는 점점 쇠퇴의 길을 걷습니다. 옹관묘가 끝이 나고 석실분이 시작되는 이런 상황을 고고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대형옹관묘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금동관과 같은 부장품들이 매장되는 시기까지는 영산강유역을 기반으로 했던 마한세력들이 독립된 정치체를 가지고 백제와 병행하고 있다가 5세기 중엽경에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백제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석시분을 남기게 됩니다. 즉, 이 석실분은 백제계통이고 백제계통의 석실분이 기전의 마한토착 옹관묘를 교체하는 배경은 결국 토착세력이 백제에 편입되는 증거이다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는 5세기 중엽을 영산강유역의 마한세력이 소멸되는 시기로 보아왔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 여름 나주 복암리에서 새로운 석실분이 발굴되었는데 석실안에 기존의 옹관이 4개가 들어있었습니다. 이 석실분의 주인공이 누구이겠는가. 만일 이 석실분이 백제계통이라고 해서 피장자들이 백제계사람이겠는가? 석실의 주인공은 바로 옹관에 들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백제 적석총 가운데 서울 쪽에서 조사된 것 가운데 겉은 적석총이지만 내부는 흙이고 토광, 목관이 안치되어 있는 경우 그 피장자를 기존의 토착세력으로 봐야한다는 그 논리와 같은 논리로 봐야 합니다. 이 석실분의 피장자는 기존의 옹관을 썼던 마한 토착세력이었습니다. 6세기 중엽이 되면서 백제 중앙의 석실분과 똑같은 석실분들이 영산강유역에도 축조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이런 석실분들은 없어지고 맙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백제식 석실분이 나타나는 6세기 중엽경부터야 비로소 마한의 마지막 근거지인 영산강유역도 백제에 편입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한의 소멸시기를 4세기 중엽으로 보느냐 6세기 전반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대중국관계, 대일본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할 수 있고 제가 생각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마한의 소멸시기를 6세기 전반경으로 보면 깨끗하게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들어보면 영산강유역에서는 최근에 전방후원 분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데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고분입니다. 기원 3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646년 일본전역에서 이런 형태의 거대한 무덤이 약 5천기 정도 만들어졌으며 350년간 일본전역에서 이런 무덤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큰 것은 오사카 시내에 있는 인덕릉, 486미터로 일본천황을 비롯한 최고 지배세력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무덤이 최근 영산강유역에서 영광, 함평, 해남, 광산, 담양 12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시기는 5세기 중엽에서 후반, 6세기초까지 걸쳐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기존의 영산강 주변지역의 마한토착세력들이 일본의 묘제를 채택해서 새롭게 쓴 걸까? 아니면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일본식 그대로 쓴 걸까? 만일 5세기 중엽부터 세기초에 걸쳐 기존의 토착 마한 세력들이 일본의 묘제를 채택해서 이런 무덤을 썼다면 그런 거대한 무덤을 슬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역량은 그 이전까지 쭉 그 세력들의 거대한 무덤들이 그 지역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증거는 없습니다. 각 지역에서 그 이전 단계에 계속되어 왔던 토착세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전혀 그런 근거가 전혀 없는 곳에 이런 거대한 무덤들이 턱턱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살펴볼 때 이 무덤의 피장자들은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건너와서 이렇게 큰 무덤을 쓸 수 있는 배경은 당시 마한 중심세력인 나주의 마한왕으로부터 주변의 땅을 얻어서 당대에 한해서 생활하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서 끝이 나는 그런 사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건 일본내에서 5세기 중엽부터 전국의 소규모 세력들이 대통합을 해나가면서 대화정권이라는 통일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대화정권에 무릎을 꿇은 세력들은 일정한 지위와 세력을 보장받고 살 수 있었을 것이나 일부세력은 대호정권에 편입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은 결국 일본을 떠나 망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람들이 택한 망명지가 영산강유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한과 일본의 뿌리깊은 교류관계 속에서 서울지역에서부터 백제에 밀려 위축돼 내려왔던 마한세력은 일부는 백제와 같이 고대국가를 발전시켜 나갔을 가능성이 있지만 일부세력은 백제와 전혀 다른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고 일부는 나머지 마한지역으로 내려왔겠지만 또 다른 일부는 제3의 지역인 일본을 택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린 내용은 기존의 마한과 백제에 관련된 내용을 새롭게 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앞으로는 마한의 본질적인 문제들이 더 구체적으로 정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한과 일본은 백제의 건국이후에도 6세기초까지 대단히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헌자료에는 백제와 일본과의 교류 사실만 나타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백제가 주체가 된 것으로 남아 있는 백제문화의 일본 전래배경에는 마한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널리 알려진 백제문화의 실제 주인공은 고구려 쪽에서 남하한 집단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찬란한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켜 왔던 마한 집단이었을 가능서이 높은 것입니다.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마한 사회의 발전은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통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지정학적인 여건에 힘입은바 컸으나 영산강유역마저도 6세기 중엽경 백제에 통합됨으로써 마한의 공식적인 백제문화는 끝이 나게 되지만 수준 높은 마한문화는 백제문화의 모태가 되어 삼국문화의 중심이자 일본문화의 원류가 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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