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8 | [사람과사람]
판소리의 예술적 생명력을 이어낸 선각자·김기형
판소리의 예술적 생명력을 이어낸 선각자·김기형
(2004-02-12 15:50:38)
판소리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신재효(1812-1884)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조선 순조 12년에 태어났다. 자(字)가 백원(百源)이며, 호(號)는 동리(棟里)이다. 효심이 지극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재효(在孝)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며, 일찍이 한학에 뜻을 두어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다. 그의 부친은 신광흡인데, 본래 양주출신으로 서울에 살면서 고창현의 경주인(京主人)을 지냈으며, 후에 고창으로 옮겨와서 관약방(官藥房)을 차렸다고 전해진다. 신재효는 철종 때 고창현감이었던 이익상 밑에서 이방 노릇을 하다가 그 후에 방장(房場)에 올랐다.
그의 신분이 중인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판소리에 애착을 가지게 된 동기를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조선조 중인은 행정이나 기술 실무 등을 담당하는 신분으로서, 중세적인 지배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일정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신분상승에 제약을 받았던 계층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인층의 의식이란 다층적일 수밖에 없었다. 상층지향적인 의식을 가지고 지배계층으로의 편입을 시도하려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기존의 지배질서에 대해 부정적인 의식을 지닌 부류가 있었으며, 그 어느 쪽도 아닌 이율배반적인 의식 속에서 괴로워하던 부류도 있었다. 이 가운데 신재효가 중인으로서 지닌 의식이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가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이나 여러편 남긴 단가 등에 나타난 의식지향을 보건대 아마도 그는 단순하지 않는 양면적인 의식의 소유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가 남긴 한 작품에 이런 구절이 있다.
(前略)사나희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將相宅)에 못 생기고
활 잘쏘아 평몽할까
글 잘한다 과거할까(後略)
양반을 지향하면서도 신분상승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느끼게 되는 갈등과 고뇌가 그대로 전하여 오는 듯하다. 이런 현실 인식에서 그는 판소리에 심취하면서 새로운 삶의 보람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는 이방으로 활동하고 잇던 40세 전후에 이미 천석을 추수하고 50가구가 넘는 세대를 거느린 부호로 확고한 기반을 잡게 된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신재효 자신이 모은 재산이 상당했고, 결국 이런 든든한 경제적 자산이 토대가 되어 그의 판소리 지원이 가능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판소리 광대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는 패트론이었다. 명창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친 이날치, 박만순, 김세종, 정창업, 김창록 등이 그의 지침을 받았다고 하는데, 특히 박만순과 김세종은 소리만 잘한 것이 아니라 신재효의 판소리 이론을 계승하여 이론과 비평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최초의 여성 명창인 진채선 역시 그의 문하를 거쳤다. 오늘날에야 여자 명창이 오히려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판소리는 남자소리였지 여자가 부르는 법이 없었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그가 여자 명창을 배출한 것은 일종의 파격이었던 것이다. 여성명창의 출현은 판소리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운 목을 많이 쓰고 계면조가 우세하게 되는 경향이 강해지게 되며, 판소리의 토막소리화가 촉진된 이유가 여성명창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또한 창극 공연에서 극중 여성 배역은 여성 명창이 맡는 것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창극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신재효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춘향가>,<심청가>,<박타령>,<수궁가>,<적벽가>,<변강쇠가> 등 판소리 여섯마당의 사설을 정리하였다는 점이다. 판소리는 구전심수(口傳心授)라는 구비전승의 특수성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 실체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현전(現傳)하는 판소리 창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신재효가 남긴 여섯마당은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마당은 당대까지 불려지던 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고 신재효의 의식이 투영되어 일정하게 개작, 윤색된 사설이다. 신재효는 자신의 의식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사설을 개작한 다음 “좌상처분 어떨런지”라고 하여 좌중의 평가를 기대하는 논평지식 언급을 곁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는 <춘향가>를 남창(男唱)과 동창(童唱)으로 분화시켰는데, 동창 <춘향가>는 오리정 이별대목에서 끝나고 있어, 미완성 작품인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동창이기 때문에 이별대목에서 멈춘 것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남창과 동창이 있다면 당연히 여창도 있을 법한데 아직까지 그가 정리했다는 여창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렇듯 그가 가창능력을 고려하여 창자에 맞게 판의 분화를 시도했다는 사실은 판소리 전승에 기울인 그의 다각적인 노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정리한 사설은 창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세어 적당하지 않다고 하나, 부분적으로 후대 창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개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와 긍정적인 평가가 엇갈려 있다.
판소리의 민중적 발랄성 내지 건강성을 상당부분 소거하고 양반지향적 의식을 반영하여 민중적 활력을 감퇴시켰다는 것이 부정적인 평가의 요체이다. 이에 대해 그가 추구한 개작의 기본방향은 합리성의 추구였으며 근대의식과 맞닿은 지점에까지 나아가 예술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인 의식이 단선적으로 파악될 수 이쓴 성질의 것이 아니고 아정과 비속, 양반지향적 의식과 평민적 의식이 혼재해 있어 이러한 양면성을 통합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편의 단가와 가사체 작품도 남겼다. <하루가> 13편, <성조가>, <어부사>, <호남가>, <광대가>, <명당축원>, <치산가>, <십보가>, <권유가>, <오섬가>, <방아타령>, <도리화가>, <구구가>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신재효의 창작물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대부분 당대까지 전승되고 잇던 작품을 기반으로하여 개작 내지 정리한 것이다. 이 가운데 <도리화가>는 그야말로 신재효의 전적인 창작이다. <도리화가>는 신재효의 나이 59세때인 1870년대에 지은 작품이다. 그는 1867년 대원군의 청으로 그의 여제자 진채선을 경회루 낙성연에 보내여 <성조가>와 <방아타령>을 부르게 하였는데,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채선을 도리화(桃梨花)에 비유하여 그녀에 대한 연정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 24살이었던 진채선을 “스물 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로 묘사하는 등 비유적인 표현과 중국의 여러 전고(典故)들을 다채롭게 이용하여 진채선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극진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제간이었으면서도 막상 총애하던 여제자가 떠나서 돌아오지 않자 마음 한켠에 묻어 두었던 연정을 주체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신재효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신재효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그렇게 많지 않으나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데 비해 가정적으로는 불우한 면이 없지 않았다고 한다. 첫째 부인은 진주(晋州)김씨였는데 1838년에 잃었고, 둘째 부인 함양(咸陽)박씨는 1840년에 잃었으나, 세 번째로 맞이한 부인 당악(棠岳)김씨를 1868년에 잃었다. 그러니까 <도리화가>를 지은 시기는 바로 셋째 부인을 잃고 매우 상심하고 외로워하던 때였으며, 총애하는 제자 채선을 향해 외로움을 달랬던 것이다.
신재효는 판소리 이론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지은 단가 <광대가>에는 판소리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잘 담겨 있다. <광대가>에는 광대라는 명칭이나 가객이라는 명칭, 시김새, 조, 장단론, 연기론 등에 관한 비교적 초기의 이론이 나와 잇고 광대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광대가 갖추어야할 조건으로 인물치레, 사설치레, 득음(得音), 너름새를 들었다. 판소리는 문학과 음악 그리고 연극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데 인물과 너름새가 연극적 요소라면, 사설은 문학적 요소요, 득음은 음악적 요소인 것이다. 결국 그는 판소리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음악적 요소가 중시되는 판소리에서 인물치레를 첫 번째로 꼽은 점이 다소 특이하다.
이상에서 신재효의 생애와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 살펴보았다. 판소리 광대를 후원하고 지도한 점, 최초로 여성명창을 배출한 점, 판소리 여섯마당 사설을 정리한 점, 판소리 이론과 비평에 능하였다는 점 등으로 해서 그가 판소리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중세의 황혼기에 광대의 예술,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에 몰입하였던 신재효가 있었기에 판소리는 한 단계 발전해 성숙하고 세련된 예술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