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8 | [문화저널]
운명을 거부한 존재의 환희·문윤걸
문윤걸
(2004-02-12 15:48:46)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베토벤이다. 나는 예술가들에게 흔히 따라 다니는 무수한 신화들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나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베토벤이 음악의 성인(樂聖)으로 불리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회의나 반감도 가지지 않는다. 베토벤은 근대사회를 형성시킨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하여 활동하였다. 이 사실이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베토벤의 모든 작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베토벤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으로 시작하는 근대사회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근대의 이념을 음악적으로 실천하려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서양음악의 틀을 마련한 것은 바흐지만 근대적인 음악 - 음악양식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 을 완성시킨 이는 베토벤이다.
일설에 의하면 <운명>의 유명한 첫 동기 ‘빠빠빠 빰’은 밀린 하숙비를 받으러 온 주인의 화난 노크소리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다. 그렇다면 하숙비도 제때 못 낼만큼 실존의 위기를 겪고 있던 베토벤에게서 운명이란 정말로 두렵고 고단한 것이었을 것이다(실제로 이 작품을 쓰기 전 이미 청각장애에 시달리고 있었다). 확실히 1악장의 서두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더 들어보라. 2악장에 이르면 부드럽고 감미롭게까지 느껴지는 현의 선율을 시작으로 점점 환히 밝아오는 운명이 예견되고, 인간에게 다가 온 거대한 운명의 희롱, 폭풍전야와 같은 초조감을 거치면서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욕구가 팽창할 즈음(3악장), 비로소 운명과 맞서 싸울줄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승리의 환희(4악장)로 음악을 끝맺는다. 베토벤은 확실히 주어진 운명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는 단 하나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고자 했다. 그러한 인간이 갖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이성과 사유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토벤은 음악을 통해서 인간을 말하고 잇고 그의 음악은 감상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성으로써만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의 우리 시대는 이미 역사도, 의미도 망각하고 있다(되살아나는 박정희를 보면서 더 그렇다). 또 모든 사회적인 것들은 이미 개인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사유보다는 보는 것, 보여지는 것에 인간은 더 충실하다. 하지만…고통이 있는 한 인간은 구원을 꿈꾸며 해결을 모색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사유를 통해서.
<운명 교향곡>은 수많은 레코딩이 있다. 그 중에서도 1974년에 녹음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85년에 발매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고 빈필이 연주한 음반을 추천한다. 이 음반을 소개하고 있는 지금, 나는 이 음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이 음반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베토벤의 악보를 충실히 지키지는 않는다. 그대신 지휘자의 해석이 탁월하다. 따라서 어떤 이는 감정의 과잉을 탓할지도 모르나 그것은 귀가 밝은 전문가들의 몫일 뿐 이 음반은 1991년 가을, 한국과 일본의 음악평론가들이 추천한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기도 했으며 그만큼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지금도 이 음반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