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8 | [문화저널]
상상력과 테크놀로지로서의 영화 꿈꾸기·홍성희
홍성희
(2004-02-12 15:47:08)
영화의 담론이 더더욱 무색해지는 지대가 있다. 영화의 꿈, 영화의 미래이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 ‘보는 것’으로 현실을 지각하고, 필름으로 ‘보여주기’를 통하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해체하며 복제하고 재현한다. 영화적 상상력은 이미지의 수사학이라고 할 테크놀로지의 지각과 이미지의 운동으로 재생산된다. 영화사의 초창기부터 현실과 상상이라는 동시 추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실생활에서 극적 요소를 찾아 내 필름에 담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면, 멜리에스는 영화를 트릭의 무대라 여기고, 마술의 테크닉을 통해 상상의 세계를 영화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시각적 실재를 넘어 환상, 꿈, 무의식이라는 상상의 세계를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출생과 함께 한 꿈이었다.
오늘날의 미술은 뉴미디어 시대의 하이테크놀로지이다. 영화적 표현 가능성의 확장이라는 면에서 하이테크는 단순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새로운 표현 매체이다. 장르로서의 영화가 취하는 영상 이미지의 운동은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결합으로 꿈, 상상, 환타지를 가속화시킨다. 테크놀로지의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의 이행 과정에는 일레트로닉스의 매개가 필수적이며, 또한 사이버네틱스 이론이 각종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매개로 점점 더 활용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SF영화는 그런 면에서 이미 현실을 앞지르고 있다. 뉴로 컴퓨터의 개발, 복제 인간(블레이드 러너), 인공 두뇌학과 생체 공학의 실현으로 탄생한 로봇의 출현(로보캅 시리즈), 인간·기계의 이상적 결합인 첨단 사이보그의 등장(터미네이터) 등등. <스타트랙>의 우주는 미국인들의 서부 개척 역사의 경로가 우주에로 무한 확장된 것이다.
실제와 허구의 봉합선은 상상 작용이다. 매체로서의 테크놀로지는 과학의 진화를 쫓기보다는 일종의 예술 형식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꿈의 공장 헐리우드는? 헐리우드의 SF 영화에서 테크놀로지를 통해 만들어내는 SFX 특수효과의 목표는 상상이 아니라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적 재현이다. 5·60년대의 SF 매니아들은 루카스, 스필버그는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 복제와 재현의 능력을 통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꿈을 형상화해 보이고자 한다. 여기에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영상의 새로운 수사학으로 새로운 상상력의 운동을 발견해낸다. 이제 테크놀로지는 단순한 수단으로서가 아닌 매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세상을 묘사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있기조차 하며, 세기말을 향해 치닫는 헐리우드는 80년대 이후 테크놀로지의 히스테리에 빠져있는 그 강박관념의 일단을 보여 준다. 바야흐로 90년대의 헐리우드의 최전선에는 SFX로 무장한 시스템 군단이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고, 극장가의 플랭카드에는 하이퍼, 울트라, 슈퍼 감각이 득실거린다.
급기야 헐리우드에서의 테크놀로지는 테크놀로지를 감추는 테크놀로지로 준무장하게 된다. (제임스 케메론이 합류한 <아폴로 13>의) 60년대의 실사를 바탕으로 한 휴먼 드라마에는 SFX의 봉합선이 드러나지 않는다. 포레스트 검프라는 역사 속의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를 컴퓨터 합성을 통해 가상 공간안에 안전하게 위치시키듯이 말이다.
더 이상 테크노로지의 문제가 아니라면, 상상력에의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테크놀로지에의 경배가 여오하의 본령이 아니라면, 테크놀로지의 미학적 생산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까. 쥬네와 까로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는 내러티브와 영상 미학에 역점을 두고 오랜 몽상의 시학을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반갑다. 프랑스 SFX 영화의 상상려고가 시각적인 유형화에 있어서의 수공업적인 공정이 돋보이며, 내러티브의 공상도 신화적 사상과 겹쳐지면서 일관된 논리를 따르고 있다. 어차피 공상에서의 감동은 다소 유보되는 것으로 이 작품의 미학적 성과를 꼽느다면, <워터월드>는 시대의 논리에 역행하는 재난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ILM과 디지틀 도메인을 능가하는 초호화 액션 스펙터클이었음에 불구하고, SFX가 제공하는 엄청난 경비 절감과 기회요소들을 포기하면서 디지틀 화상이 흉내낼 수 없는 역동적인 카메라워크 스펙터클을 선택한 결과는 잔인하고도 무모한 것이 되고 말았다. 테크놀로지의 귀신들린 속도는 얀드봉의 <트위스트>(1996) 라는 천재지변을 발명(ILM)하여 하이퍼리얼리즘의 실현, 새로운 시뮬라크라 공간으로 창조되었고, 가상 체험과 버추얼 리얼리티의 혁신으로 테크놀로지는 리얼리티를 증대시켜왔다. 오늘날 영화내 기술혁신의 노력이 한편으로 종종 비판받는 것은 환타지 때문이 아니라, 헐리우드가 미디어 스펙터클에 열광한 관객을 상대로 하이퍼 리얼리즘에의 불온한 경도가 그 이유이다. 헐리우드의 테크놀로지는 이제 미장센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되어 영화의 기원을 되묻는 영상 실험으로 다가온다.
한편, SFX테크놀로지의 이종교배(하이브리드)가 보여준 혁혁한 성과는 애니메이션 분야이다. 존 레쓰터 최초의 장편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영화<토이스토리>(1995)의 기본 컨셉은 ‘장난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미래의 애니메이션으로서의 그려진 그림을 디지틀화하고, 컴퓨터가 색채를 넣고 하는 등의 무한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치밀한 미장센과 점토의 예술적 표현에 몰두한 영국 애니메이션 <윌레스 앤 그로밋>(1996) 등과 저패니메이션의 색채의 마술, 북경경극의 미학에 바탕을 둔 중국의 경우 등 여러 각국의 다양한 애니메이션 작업은 그야말로 원형에 가까운 환타지의 영상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무한 상상의 영역으로 열려있다. 이즈음에 귀착되는 화두는 표현의 장애 요인으로서의 상상력일까.
97깐느 영화제 오프닝 대작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 영화가 온다”는 선전용의 과격한 신호탄만큼이나 뤽 베송의 <제 5원소>는 프랑스판 블록버스터로 왕림했다. 디지틀 도메인의 특수효과팀과 프랑스 만화의 그래픽아트적 전통이 이루어낸 시각적 스펙터클이 잔치이다. 날아다니는 자동차들과 가판 음식점들이 떠다니는 뉴욕 거리는 종종 하향 중앙 바닥의 소실점을 향해 집중되면서 심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23세기의 뉴욕의 미당국은 전지구적 과제로 물, 불, 흙, 공기에 이은 미지의 다섯 번째의 요소가 파멸해가는 지구를 구원해낼 우주 연금술의 최종원소를 어렵사리 찾고 있으며, 인간의 우호적인 유대를 보여주는 외계 몬도샤인의 최후의 염색체 복원 장치로 탄생한 완전한 인간, 구원의 천사 리루와 인류 구원의 액션 영웅이 결국 발견해 낸 것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주제 사랑이다. 내러티브 구조와 캐릭터 디자인에서 프랑스의 전설적인 두 만화가 뫼비우스와 메지에르의 영향을 받는 등 뤽베송의 만만찮은 유럽적 감수성으로 토해낸 세기말 비전은 지속적인 꿈꾸기를 한다. 미레에 대한 어떠한 식의 심각한 비전은 없다. 미래도시에 대한 일러스트들과 디자인, 컴퓨터 그래픽과 미니어처 세트의 합성, 장 폴 고티에의 비주얼 의상 등등은 넘쳐나는 시각적 박람회를 이룬다. 사이버스페이스로 열려진 공간의 새로운 지평은 컴퓨터 내부의 상상 속의 공간으로 들어가 경험하게 되는 가상 현실(버추얼 리얼리티)의 공간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가 실재보다 더 강력해 모든 것이 이미지가 되어 버린 시뮬라시옹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하이테크 뉴미디어에 의한 일종의 중독 상태를 뉴미디어라는 신종의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으로 비유하기까지 한다. 이전의 SF와 SFX 영화가 보여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대한 성찰이나 혹은 과학 테크놀로지의 오용에 대한 비판적 안목으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등의 제스츄어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생태계 전체의 안녕을 위한 모험담과 사랑으로의 회귀라는 내러티브만으로 멀티미디어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결국 한 세기를 거쳐 진화한 SFX영화의 방향은 엔터테인먼트의 승리인가? 행복한 느낌의 향유를 위해 뮤지컬 극장을 찾듯이, 사고판단의 정지라는 스릴과 환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영화의 천국일까?
시인 월레스 스티븐스는 일찍이 ‘불완전한 것이 우리의 천국이다’라는 현실의 한계상황과 한편의 위안으로 은근 슬쩍 빗댄 바 있다. 현실의 사회적 경제적 토대에서 문화적 현실을 이루는 키치는 복제 상품과 상품화된 예술이 즐비하는 현대에 문화적 오락을 갈망하는 대중의 취향에 대한 아첨이자 아마도 이 시대의 생존을 위한 사랑학일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는 화법을 달리 한다면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굼뜬 걸음도 이에 기꺼이 공모하여 아이러니한 쾌를 누리고 싶어진다. 상상력과 테크놀로지의 결혼은 각기 저마다의 풍습과 토양에서 그들의 러브스토리를 고백하고 자식을 출산하듯이 버라이어틱한 것이다. 뉴미디어가 진정한 문화적 풍요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는 메이저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닌, 소규모의 변종과 이종이 보다 독립적으로, 경제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나아가 테크놀로지가 몸의 연장으로 가능할 수 있도록, 창의적인 상상력을 내조하는 열려진 가능성에 입맞추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