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8 | [문화저널]
노래하는 항아리·김자연
김자연
(2004-02-12 15:41:41)
순이네 집 옥상에 항아리가 여러개 있습니다.
된장을 담은 항아리, 고추장을 담은 항아리, 간장을 담은 항아리, 소금을 담은 항아리,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은 금이 간 항아리까지 합하면 모두 다섯 개입니다.
순이 할머니는 된장, 간장, 고추장을 집에서 직접 담그십니다. 순이 할머니 솜씨는 대단해서 동네에서도 ‘순이 할머니 장맛’하면 다 알아줍니다. 덕분에 된장, 고추장, 간장이 담겨있는 순이네 집 항아리들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습니다.
“조금 있으면 순이 어머니가 고추장을 퍼가겠지. 순이 어머니는 고추장에 오이를 찍어 먹는 것을 좋아하시니까. 어디 그뿐이야? 고기를 갈아 고추장에 볶은 다음, 밥에 비벼 먹으면 얼마나 좋다고? 그건 순이 할머니와 순이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이지.”
고추장 항아리가 어깨를 으쓱거렸습니다.
“오늘은 된장을 떠갈지도 몰라. 순이와 순이 오빠는 호박과 풋고추를 넣고 끓인 된장국을 얼마나 좋아한다고?”
된장 항아리도 으쓱했습니다.
“순이 어머니가 옥상에 와서 무엇을 퍼간들 그게 뭐 중요하니?”
“그럼 뭐가 중요해?”
간장 항아리가 소금 항아리를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중요한 걸로 치자면 소금을 담고 있는 낮. 김치를 담글 때나 반찬을 만들 때나 항상 필요한 게 소금이야. 난 천연 소금을 담고 있는 몸이라고, 중요한 건 우리가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야.”
소금 항아리가 의젓하게 말했습니다.
“소금 항아리 말이 맞아. 우리가 항아리로 태어난 이상, 우린 무엇인가를 담고 있어야 해. 그것이 중요한거야.”
“그래. 우리 가슴에는 장이 담겨있어. 또 천연 소금이 담겨 있어. 이보다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 어디 또 있니?”
항아리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기 구석진 곳에 있는 금이 간 항아리를 좀 봐. 언제나 비어 있잖아.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으니까 누가 관심을 가져주니?”
“누가 아니래. 난 금이 간 항아리와 같이 산다는 게 창피해 죽겠어.”
“맞아, 우린 모두 윤이 반질반질 나는데 금이 간 항아리는 언제 보아도 지저분한 모습이야. 순이 할머니와 순이 어머니는 왜 금이 간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시는 걸까?”
“지금이라도 금이 간 항아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갔으면 좋겠어.”
“그건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이제 곧 다른 곳으로 옮겨질텐데 뭐.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금이 간 항아리따윈 신경쓰지 말고 우린 호박꽃을 바라보며 노래나 부르자.”
“그래 노래나 부르자.”
항아리들의 노래 소리가 순이네 옥상을 맴돌았습니다.
옥상 한 모퉁이 꽃밭에 사는 대추나무랑 맨드라미. 분꽃, 넝쿨장미도 항아리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 맞추어 잎을 흔들었습니다. 빨래줄에 널린 빨래들도 항아리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아, 나도 항아리들과 같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지만 다른 항아리들은 내가 노래를 따라 부르는 걸 싫어해.’
금이 간 항아리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얼마전의 일입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를 따라 노래를 부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들은 금이 간 항아리가 금이 간 소리를 낸다고 도중에 노래를 뚝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는 금이 간 항아리는 다른 항아리들처럼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따라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루루루 루루루…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의 노래 소리가 옥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즐겁고 힘찬 노래 소리입니다.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 뒤에서 숨을 죽이고 서 있던 금이 간 항아리 눈에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습니다.
‘아,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내 몸!’
금이 간 항아리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습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햇살이 금이 간 항아리 곁으로 다가왔지만 반갑지 않았습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순이네 복실이가 컹컹 짖었습니다.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는 노래부르는 것을 멈추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습니다.
“가만,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오고 있어!”
소금 항아리의 말에 간장 항아리, 고추장 항아리, 된장 항아리들은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쪽을 바라 보았습니다.
얼굴이 둥근 순이 할머니와 이마에 까만 복점이 있는 앞집 정님이 어머니였습니다.
순이네 집 복실이도 쪼르르 올라와 코를 항아리에 대고 킁킁거렸습니다. 그럴 때면 항아리들은 간지러워 금방이라도 터지려는 재채기를 참느라 안간힘을 썼습니다.
“정님이 엄마, 그릇을 여기에 가져다 놓아.”
“네, 순이 할머니.”
순이 할머니가 된장과 고추장 항아리 뚜껑을 차례로 열었습니다. 그리고 항아리 머리를 감싸고 있는 하얀 망을 걷어냈습니다.
“어머나! 어쩜 고추장과 된장 색깔이 이렇게 좋아요? 맛있는 냄새가 풀풀 나네요. 우리 정님이 아버지는 순이네 집 된장, 고추장 맛을 보더니 맛있다고 야단이에요. 장을 맛있게 담그는 무슨 비결이 있어요, 순이 할머니?”
“비결이래 뭐 별 것 있어? 장을 담글 때 우리 콩을 쓴다는 것밖에. 그리고 그릇은 재래식 항아리를 사용해야 좋아.”
순이 할머니는 정님이 어머니에게 된장과 고추장을 인심좋게 가득 담아주었습니다.
“고마워요, 순이 할머니! 그런데 장담글 때 우리 콩을 써야 좋다는 것은 알지만, 굳이 재래식 항아리는 쓸 필요가 있어요? 아무거나 쓰면 안되나요?”
“암, 안되고 말고, 재래식 항아리는 겉모양이 거칠거칠하지만 새로 나온 항아리와 비교할 순 없지. 재래식 항아리는 제 몸에 습기가 있으면 숨을 내쉬어 밖으로 내뿜고 습기가 부족하면 안으로 숨을 들여 마셔서 온도를 조절해 주지. 하지만 새로 나온 항아리는 약품을 바르기 때문에 숨구멍이 막혀있어.”
“어머, 그렇군요!”
정님이 어머니는 순이 할머니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모두 들었지?”
“듣다마다. 우리 순이네 집으로 오길 정말 잘했어!”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들은 어깨가 더욱 으쓱해졌습니다.
‘순이 할머니도 이제 금이 간 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구나!’
금이 간 항아리는 서러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정님이 어머니와 순이 할머니가 내려가고 나자 항아리들은 전보다 더 크게 루루루 루루루 노래를 불렀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자기를 따돌리고 노래를 부르는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가 미웠습니다. 뿌옇게 먼지를 둘러쓰고 있는 자기 모습도 싫었습니다.
“하루를 이렇게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야.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쓸모없이 살아갈 바엔 차라리 벼락이라도 맞아 산산이 부서지는 게 나아! 아, 제발 천둥이라도 쳤으면. 아니지. 폭풍이라도 몰아쳤으면…그래서 아주 멀리 날아가버렸으면…”
금이 간 항아리는 마침내 울먹였습니다.
“하필이면 야구공이 왜 나에게로 날아왔을까? 담 너머로 날아온 야구공 때문에 즐겁던 내 인생은 달라지고 말았어. 난 옥상에 얌전히 있었을 뿐이야.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갑자기 날아온 야구공 때문에 뚜껑이 깨어지고 몸에 금이 간 것도 슬픈 일인데, 항아리들은 왜 나를 상대해주려고도 하지 않지?”
금이 간 항아리는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억울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꾸 심통이 났습니다.
밤이 깊어갔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빈 가슴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한줄기 바람이 금이 간 항아리 앞에서 머뭇거렸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조금 쉬었다 가도 괜찮을까요?”
금이 간 항아리는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 항아리도 눈을 크게 뜨고 바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조금 쉬어가고 싶은데…”
금이 간 항아리는 눈을 반짝였습니다.
“지금 뭐라고 말했나요?”
“당신 가슴에 앉았다 갔으면 해서요. 하루종일 골목을 돌아다니며 감나무랑 오동나무 잎을 흔들고 놀았더니 다리가 아프네요.”
“정말이세요? 내 가슴에 들어와 쉬어 가겠단 말인가요?”
“그래요, 다른 항아린 가슴엔 된장, 고추장, 간장, 소금이 가득 담겨 있어서 들어갈 수 가 없어요. 그러니 허락해주세요. 네?”
“물론이에요. 어서 들어오세요.”
금이 간 항아리는 바람에게 제 가슴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바람이 금이 간 항아리 가슴에 담겼습니다.
“어머나! 당신 가슴은 생각보다 따뜻하고 편안하군요.”
금이 간 항아리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야구공에 머리를 맞고 몸에 금이 간 이후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난 이제 쓸모없는 항아리인걸요.”
“쓸모가 없다니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지금 나를 쉬게 할 수 있잖아요. 당신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당신 가슴에 머물 수 있는 거예요.”
“ 너무 어려운 말이군요.”
“생각을 넓게 해봐요. 그리고 가슴을 열어요. 그러면 마음이 바뀌지요. 당신은 비어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어요.”
“정말인가요?”
“그렇고 말고요. 비어있다는 것은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예요. 희망이 있다는 거예요.”
금이 간 항아리는 바람의 말에 목이 메어왔습니다.
“자, 그럼 난 쉬었으니 이제 앞집 사철나무 이파리를 흔들기 위해 가봐야겠어요. 사철나무 할머니는 빨리 내가 와서 사철나무 이파리를 흔들어주길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조금만 더 쉬었다 가세요.”
“다음에 또 놀러오지요. 금이 간 항아리님.”
바람이 금이 간 항아리 가슴에서 호르륵 빠져나갔습니다.
“잘 가세요, 바람님.”
금이 간 항아리는 바람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갑갑했던 마음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았습니다.
금이 간 항아리는 전보다 더 가슴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자 금이 간 항아리 가슴에 달빛이 가득 담겼습니다.
“아, 달빛!”
금이 간 항아리는 달빛을 꼬옥 껴안았습니다.
“아, 난 달빛을 담을 수 있구나! 바람을 담을 수 있구나! 하늘도 별빛도 담을 수 있구나!”
금이 간 항아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는 달빛같은 노래였습니다. 바람같은 노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