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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7 | [사람과사람]
부정의 정신과 생성의 의지
문화저널(2004-02-12 15:30:18)
채만식(白 1902-1950)은 1924년『세길로』라는 단편소설로 등단하여 타계하기 직전인 1949년에 이르기까지 작품활동을 지속한 작가이다. 2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 그는 120여편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장·단편 소설 외에도 희곡, 촌극(대화소설), 평론,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일제시대부터 해방직후까지 걸쳐있는 그의 문학적 업적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 하나의 우뚝한 봉우리로 남아있다. 채만식은 전북 옥구군 임피면에서 규섭(奎燮)씨와 조(趙)씨의 5남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당대에 재산을 많이 일군 부농이었다. 채만식은 이곳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을 했다. 중앙고보에 재학 중이던 18세 때, 부모가 정해 준 은홍선씨와 결혼을 했다. 결혼 시절을 회고하는 한 글에서 채만식은 이 결혼에 대해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처녀작 “과도기”라는 작품에서도 조혼으로 인해 벌어지는 세대간의 갈등문제를 다루고 있다. 1922년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23년 관동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한다. 잠시 강화에 있는 사립학교 교원으로 있던 시절, 단편『세길로』로 등단하였다. 이후 ‘동아일보’ ‘개벽’ ‘조선일보’ 기자로 있다가 1936년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창작에만 전념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 『탁류』및『태평천하』(발표당시에는 ‘천하태평춘’)를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향리 임피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잠시 서울로 이주했다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생활했다. 생활고로 인해 어려운 생활을 하던 중, 1950년 이리시(현 익산시)마동 자택에서 폐결핵으로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채만식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벌였던 1930년대부터 해방 직후의 시기는 참으로 고난의 시절이었다. 1931년 만주침략을 계기로 일제는 20년대의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온건정책에서 방향 전환하여 침략전쟁을 위한 강경정책으로 선회하였다. 일제는 민족 말살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는 한편, 우리나라를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 병참기지로 삼아 인적 물적 자원을 가차없이 수탈하였다. 노골적인 파시즘의 억압 속에서 문단의 사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회주의 문학예술 단체인 ‘KAPF'가 두차례의 검거선풍을 통해 20년대 중반 이래 지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30년대 이후 작가들은 문학으로부터 모든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관심을 추방해야 하는 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작가적 신념과 현실의 괴리로 갈등해야 했다. 해방직후도 이러한 어려움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소련과 미국 등 새로운 외세의 개입,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 민족 자주국가의 건설의 위한 해결해야 할 수 있는 많은 과제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민족 모순 및 분단 모습의 단초가 되는 혼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지난한 시기에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또는 작가로서 채만식은 어떠한 태도와 의식을 지니고 문자행위를 이어 나갔는가? 먼저 채만식의 문학관을 보자. 문학을 고려자기나 사군자와 같이 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미상불 그러한 문학이 없는 게 아니요. 따라서 그네는 그걸로 자족할 것이지만)문학이 적으나마 인류역사를 밀고 나가는 한 개의 힘일진대, 한인(閑人)의 소장(消長)거리나 아녀자의 완롱물(玩弄物)에 그칠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목이 부러져도 주장을 하는 자....... 이러한 발언에서 우리는 문학을 ‘역사발전의 추진력’으로 여기는 그의 진보적 문학관을 엿볼 수 잇는데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이러한 작가정신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일제 말기 한 때 일시적인 무기력 증세에 빠지긴 했으나 그의 진보적 문학관은 30년대 발표한 작품은 물론 해방 직후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관류하고 있는 작가정신이었다. 이러한 문학관 아래 그가 택한 창작방법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갈라 볼 수 있다. 첫째가 ‘부정’의 방법. 즉 풍자의 방법이다. ‘부정면을 통하여 기실 긍정 면을 주장하기 위한’ 풍자의 방법은 채만식 문학의 본 가지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제 강점기에 발표한 풍자소설은 「레디 메이드 인생」「소망」 「치숙」등 여러작품이 있으나, 풍자의 방법이 탁월하게 발휘된 작품으로는 1938년에 쓴 「태평천하」를 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한말 격변기에 경제적으로 급상승하여 현재는 부재지주로서 고리대금업을 하며 생활하고 있는 ‘윤직원’과 그의 일가적의 삶을 통하여 친일 자본가계급의 반역사적, 반민족적, 반사회적 면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의 필연적 붕괴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풍자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는 윤직원은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라는 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제시대를 ‘태평천하’로 인식하는 반민족적 인물이며, 신분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자녀들을 앙혼(仰婚)을 시키거나 거금을 들여 족보 도금을 하기도 하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다. 또한 손자들을 군수나 경찰서장으로 만들어 재산과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채만식은 이 작품에서 윤직원과 같은 친일 자본가들의 반역사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가능성을 함께 암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그가 택한 풍자의 방법이란 단순히 비판하고 폭로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작가 정신의 발현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서술방식의 특이함이다. 판소리 사설의 표현기법이 바로 그것이다. 채만식의 많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이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 이 기법은 훌륭하게 구현되어 있다. 판소리 특유의 반어 역설 비유 등을 적절히 변형하여 구사하고 있다든지, 오늘날 쉽사리 들을 수 없는 전라도 방언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든지 놀부의 형상을 재창조하여 윤직원이란 성격을 형상화했다든지 하는 점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판소리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소양을 지니고 있었던 채만식과 같은 작가가 아니고서는 쓸 엄두를 낼 수 없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우리 고유의 이야기 방식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이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8.15해방 이후에도 채만식은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포착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론’이었던 풍자정신을 회복함으로써 해방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넘어서서 해방 직후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작품을 발표했다. 「미스터 방」(1946년) 「논이야기」(1948) 「도야지」(1948) 「맹순사」(1949)등은 그 대표적 작품으로 이들 일련의 풍자적 작품을 통해 해방 직후 현실의 혼란과 모순을 폭로, 고발했다. 역사는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느니라고 일러왔다. 그러하건만 세상은 바야흐로 옛 그 “치숙”의 시절을 방불케 함이 없지가 못하다. 저 무력이 강하고 문화가 앞서고 물질이 풍성하려는 한 침략외세를 승인하고 그를 숭배하고 찬미하고 그에 굴복 아부하고, 그에 동화하고 함으로써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하는 것이 당당히 신념화하였고.....생각컨대 역사는 같은 것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면 역사가 아직도 “치숙”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이리라. 그의 창작집 『잘난 사람들』후기로 씌어진 이 글을 통해 채만식의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는데, 새로운 외세의 개입, 식민지 잔재의 온존 등 해방직후의 현실상황을 식민지 시대의 그것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상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채만식문학의 본류 중 또 다른 하나는 정통리얼리즘의 수법으로 부정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탁류」를 들 수 있다. 신구지식을 다 익히고 군정서기로 있다가 지금은 군산 미두장의 하바꾼으로 전락한 ‘정주사’와 그의 가족들이 겪는 우여곡절의 삶을 중심으로 물화되어가는 인간관계와 그것을 극복하여 긍정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식민지 사회의 성격을 ‘탁류’로 인식하면서도 언젠가는 맑은 물로 바뀔 것이라는 긍정적 희망을 버리지 않는 채만식의 생성의지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그의 최후의 작품인 「소년은 자란다」도 이러한 작가의식이 낳은 산물이다. 기성세대에 물들지 않은 소년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맞서 극복해가는 과정을 형상화함으로써 작가의 미래지향적 생성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경제적 궁핍과 시대적인 압박속에서도 문학이 역사발전의 동력이라는 진보적 신념을 견지하고자 한 채만식. 그리고 그가 남긴 문학작품은 한국현대문학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봉우리로 남아있다. 채만식의 삶과 문학세계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떠오르는 생각 하나를 사족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얼마 전 미국에서 일년간 생활했던 적이 있다.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이 많았는데 특히 작가들의 고향을 둘러보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 작가의 고향에는 반드시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그곳에는 그가 생전에 쓰던 필기류, 의상 등 자잘한 일상용품으로부터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의 거의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복원 보존되어 있다. 작가 외에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도 물론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흔히 우리는 미국을 인디언들의 문화나 남북전쟁 시기의 유물 등을 빼놓으면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문화적 유산을 지니고 있는 나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의 작가·예술가들이 남겨 놓은 문화적 유산을 오늘에 되살리는 정성과 노력을 통해, 짧은 역사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는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지니고 있는 만만치 않은 역사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실정을 어떤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에 보존해야 할 문화적 유산이 너무 많아서 엄두를 못내고 있는가. 우리는 이 고장이 낳은 위대한 작가 채만식 선생을 위해서 군산시 월명공원에 문학비 하나만 달랑 세워두고 있을 뿐이다. 잘못된 현실을 부정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지향했던 채만식 선생은 지하에서 이러한 지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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