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3 | [사람과사람]
전북의 인물, 전북의 역사 ③ / 증산 강일순의 생애와 사상
인간성 순화를 갈구했던 ‘평화’의 사상가
글·안후상 역사연구가
(2004-02-12 15:02:16)
증산의 사상이 과연 어떻길래, 그 사상적 기반이 무엇이길래, 이처럼 어마어마한 역동성(力動性)을 지난 사상 운동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을까. 증산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유·불·선 및 기독교까지 아우르는 혼합종교(Syncretism)쯤으로 말하여지기도 한다.
증산의 생멸기간은 후천개벽설(後天開闢說)을 바탕으로 한 사상들이 우후죽순격으로 나타난 시기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동학(東學)이다. 동학은 하층민의 정서를 적절히 담아내면서 당대 영향력 있는 사회변혁 운동체로 대두되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증산은 인간성 순화에 역점을 둔 사상을 펼쳤다. 이는 실험성 짙은 동학을 분석, 대비한 것으로서, 민중에게 또 다른 희망을 던져준 종교로 배양될 소지를 갖고 출발하였다.
증산 사상은 현대 한국 사회의 사상적 한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1920년대 증산으로부터 비롯된 ‘보천교운동’은 기성 종교를 포함해 당대 최고의 조직과 운동성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라는 거대한 증산 종단이 엄연 우리 사회에 육중히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증산도와 증산교 각 종파들의 활발한 활동은 이미 증산 사상이 한국 사회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의미하며, 현재 진행형이다. 이는 실패와 거듭된 쇠락의 운을 걷고 있는 동학 종단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동학의 사상은 증산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그 사상은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증산의 사상이 과연 어떻길래, 그 사상적 기반이 무엇이길래, 이처럼 어마어마한 역동성(力動性)을 지닌 사상운동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을까. 증산의 사상은 대체적으로 유·불·선 및 기독교까지 아우르는 혼합종교 쯤으로 말하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한 사상운동은 ‘신도교(新道敎)운동’으로 필자는 파악하고 있다.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서 우리 역사상 도교가 이렇듯 꽃피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도교 종단의 형성은 증산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왜 이렇듯 우리 역사상 초유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도교와 같은 사상이 왜 이 시대에 역동성을 갖고 나타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을 앞으로 밝혀져야 할 것들로, 필자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대목이다. 단지 증산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그의 사상이 갖는 현대적 의미 정도는 논해 볼 수 있으리라.
대순전경(大巡典經)에 의하면, 증산은 1871년(고종8년) 음력 9월 19일, 그의 외가인 지금의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이름은 흥주(興周)요, 모친은 안동 권(權)씨다. 이들의 집은 지금의 정읍시 고부면 우덕면 손바래기다. 그의 모친 권씨는 부근 친정으로 가 있을 때 기이한 꿈을 꾸고 나서 증산을 잉태한지 13개월만에 증산을 낳았다고 한다.
증산(甑山)은 호요, 자가 사옥(士玉)이고, 일순(一淳)은 이름이다.
대(大)종교가나 사상가가 그렇듯이, 증산도 태어날 때 왼손바닥에는 임(壬)자가 오른손 바닥에는 술(戌)자가 새겨있었다고 한다. 점차 성장하면서 얼굴과 성품이 원만해지고 관후(寬厚)하였으며, 지덕을 겸비해 어떤 미물이라도 위기에 처하면 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총명하여 서당에서 들을 익히는데 다른 이들이 따를 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7세 되던 해에 농악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렸으며, 하늘(天)과 땅(地)의 이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9세 때 별채를 짓고 외인의 출입을 금하며 홀로 사색과 명상을 즐겼다.
곤궁한 생활이 계속 되는 가운데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 지금의 김제시 봉남면 초처 내재평 정(鄭)씨와 결혼하여, 한때 처가에서 서당 훈장을 하기도 하였다. 결혼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이때, 그는 유·불·선을 비롯해 제가서(諸家書)와 음양(陰陽), 술수(術數), 의복(醫卜)등에 관한 서적을 주력 탐독하였으니, 주위에서는 그를 도인(道人)이라 불렀다.
증산이 동학에 관심을 가졌던 때가 있었으니, 당시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기독교의 입으로 전통 사상 감정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왔던 때였으며, 동학이 구세제민(救世濟民)을 표방하며 농민 봉기를 일으켜 호남을 위시해 전국이 처참한 살육의 도가니에 빠져 든 때이기도 하였다. 이 때 증산은 농민군 주위를 배회하며 이 전쟁이 가져올 파괴력을 걱정하였다. 그는 이 전쟁이 기본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이 땅에는 피폐함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폐색이 짙어진 농민군 일부를 설득, 싸움을 말리기도 하였다. 농민군의 대패로 증산의 이와 같은 혜안은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가 27세 되던 해에 집을 나와 3년간 유력(遊歷)을 한다. 이 동안에 수많은 술객(術客)과 도인 그리고 비서와 비문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당시 혼란한 세상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공부에 들어간다. 이 때 조우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김일부(金一夫)다. 그는 일부의 정역(正易)을 접하였고, 이어 태을주(太乙呪)를 접하면서 마침내 신술(神術)에 의해 남의 병을 치료하고 예언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1900년 가을에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주송수련(呪頌修鍊)을 통한 도통공부는 계속되었다. 1901년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인 6월에 더 많은 신전권능(神的權能)을 얻기 위해 모악산 대원사(大源寺)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9일째 기도하던 7월 5일, 광명과 혜식(慧識)이 열리면 천지의 대도(大道)가 보이니, 탐음진치(貪淫嗔痴) 사종마(四種魔)를 물리치게 되었다.
이 때 그가 깨달았다고 하는 대도는 주송수련 끝에 나타나는 신화통령(神化通靈)이었다. 이를 통해 신명계(神明界)와 인간계의 모든 일을 알 수 있으며, 천지운도(天地雲度:천지를 운행하는 도수로 우주 자연의 운행과 신명계와 인간계의 변화과정이 신에 의해 예정된 프로그램에 따른다고 보는 것으로서, 이것을 ‘운도’ 또는 ‘운수’ 또는 ‘도수’라 한다.) 의 윤회에 따라서 미래 일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명과 접하여 호풍환우, 둔갑장신 등 모든 도술조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천지운도를 뜯어 고쳐 후천선계(後天仙界)를 개벽할 수 있는 권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대원사에서 내려온 그는 1901년 겨울에 혹심한 추위에도 아랑 곳 하지 않고 신도공사(神道公事)를 본다고 냉방에서 9일 간의 식음을 전폐한 수련에 정진하였다.
1902년 4월, 지금의 김제시 금산면(金山面) 하운동(夏雲洞)에 사는 김형렬(金亨烈)이 그를 찾았다. 이로써 김형렬은 증산의 첫 제자가 되었으며, 그는 자기집에 증산을 모시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상당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얻게 된다.
이 때 제자들에게 고해에 빠진 중생을 구하기 위해 천지공사에 참여케 하였다. 이전에 먼저 남에게 척짓지 말며, 죄를 멀리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라고 주문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태을주(太乙呪)와 시천주(時天主)주문, 칠성주(七星主), 운장주(雲長呪)등과 대학의 서전, 주역의 서문 등을 외게 해, 강신(降神)과 개안(開眼)을 체험케 하였다. 한편으로 의복 술수 및 약물 치료와 주종 수련을 통해 병자를 치료하였고, 생사와 길흉, 연사(年事)와 시사(時事)등을 예언하였다.
그를 따르는 이들은 날로날로 늘어만 갔다.
증산의 독특한 주문 수련과 행위가 조직적으로 사회 저변에 피력된 것은 그의 나이 36세가 되던 1907년 6월, 차경석(車京石)을 만나게 된 뒤부터였다. 지금의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머물면서 신세계조화정부(新世界造化政府)를 계획하는 천지공사를 보게 되었다. 이 천지공사는 새로이 개벽되는 ‘신세계’를 만다는 공사였다. 이 때 차경석은 이종누이로 미망인인 고(高)씨를 수부(首婦)로 정하게 하고 천지공사에 참여토록 하였다. 1907년 12월 25일, 경찰은 증산으로 인해 이루어진 집회를 불온한 세력의 음모로 인정, 급습하였다. 이 때 증산은 40여일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일본 경찰은 혹세무민, 사술이라고 하는 오명까지 덧씌워 증산을 일반 민중들과 유리시켜려 하였다.
그를 따르는 제자와 세인들은 조급했다. 공사한 지가 언젠데 천지 개벽은 안되고 세상은 조금도 변할 기미가 없었으며, 신통묘술을 부린다고 하는 도인이 일본 경찰에게 잡혀들어가질 않나, 의심하게 시작하였다. 이탈하는 자 역시 속속 늘었다.
이 즈음이었다. 1909년 6월 24일, 천지공사를 행한 지 9년째 되던 해에 증산은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의 상례때에는 김형렬과 차경석 등 몇몇 제자들만이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혹자는 그를 불신하였지만, 혹자는 증산을 미륵불이나 구천상제로 그리고 얼마 후에는 그가 짜놓은 운도에 의해 지상선경이 열리며, 때가 되면 교인들이 도통문도 열릴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그가 다시 출세(出世)하리라고도 믿었다.
한편 고씨 부인을 중심으로 한 몇몇 제자들이 증산의 살아 생전에 했던 도통 수련을 계속 했는데, 사후 2년이 지난 탄신기념치성 때였다. 증산의 성령이 고수부에게 부의(附依)됐다고 하는 몇몇 증후들이 나타났고, 증산 생존 당시에 따르던 제자들이 다시 모였다.
당시 고씨 부인이 있던 대흥리에는 차경석(車京石)이 있었다. 차경석은 동학교도였으며, 한 때 일진회 전라남북도 순회관을 지낸 조직의 귀재였다. 그의 집에 사람이 모이니, 그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이들을 일거에 조직했다. 이를 두고 세인들은 ‘태을교’ 또는 ‘선도교’라 했다. 처음으로 조직적인 교단의 기미가 엿보인 때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차경석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마침내 차경석은 ‘주인장’이라는 호칭으로 명실공히 이 집회의 주체가 되었다. 이에 고판례 등 증산의 제자들은 고부 객방리 시댁으로 거처를 옮기는 등 차경석의 주류와는 별로의 행동을 하게 된다. 이들이 다시 김제 백산 조종골로 근거지를 옮기는 이것 역시 태을교라 불렀다.
1922년에 교명을 공식화한 ‘보천교(普天敎)’는 당대 자칭 6백만 교도로 일제하 국권회복을 도모한 핵심 운동체로, 때로는 부일 행적으로 지탄받아온 종교 단체로 지목을 받았다. 교주격인 차경석이 죽자 조직도 쇠하였는데, 이후에 각 파로 갈리면서 ‘증산교’라는 이름이 처음 나왔다.
증산은 수련을 통한 도통(道通), 즉 신화(神化)를 강조했다. 신화의 긍극적인 목적은 혼돈된 세상을 개벽하는데 있으며, 개벽을 위한 작업이 천지공사다. 개벽된 세상은 해원(解寃) 상생(相生)의 세계요, 보은(報恩)과 인의(仁義), 정륜(正倫)과 명덕(明德)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심(一心), 성(誠), 경(敬), 신(信)의 인존 세계요, 이상 세계다. 이러한 지침을 그는 여러 기기묘묘한 글자나 문귀로써 나타내니, 이것이 바로 현무경(玄武經)이다.
당신 증산에게 가장 큰 의문과 과제(문제 해결 의지)는 다름 아닌 인간끼리 같은 민족 성원끼리 살륙하는 처참한 현실 인식이었다. 이것은 자기 인식이기도 하다. 기존의 합리적이고도 도덕적인 틀로써는 이같은 첨예화된 갈등과 폭력을 도저히 해소시킬 수 없다고 그는 단정하였다. 그리고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의 타고난 공격성과 이기성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존의 합리적 도덕주의를 개조시킨 진보적 도덕주의 -동학을 일컫는다-를 인간 스스로가 들고 나왔는데, 이 역시 참담하게 실패할 것이라고도 예견하였다.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 치유 없이는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신명(神明)에 의해서만이 가능타고 했는데 , 이러한 그의 독특한 처방은 혼돈된 세상을 바로잡는 대안의 하나로 등장하였다.
혼란의 근본적 원인은 인간의 마음과 몸이 병에서 기인하며, 의통은 이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기에서 증산은 자기 인식과 함께 공격성을 아예 제거해버리는 ‘승화’를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신화’나 ‘도통’이라는 언어 개념을 도입하였다. 모두들 도통을 하면 끝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은유적이고도 해학적인 그의 언행과 순결한 행위, 즉 천지공사라는 원초적인 의식에 의해 대중에게 급속히 파급되었다.
개벽은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결과를 좇는 가설이다. 따라서 그의 천지공사는 바로 이 가설을 정설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이요, 의식이요, 해법이 되는 것이다.
인산성의 순화(회복)에 역점을 둔 증산사상의 핵은 ‘평화’다. 평화보다 상위의 가치 개념은 없으며, 어떠한 명목도 평화를 해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이 증산 사상이 현재 진행형인 이유이며, 현재적 의의이기도 하다.
끝으로 증산의 사상을 집대성한 이가 이상호, 이정립 형제다. 이들은 1920년대 보천교 운동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보천교 수위 간부였다. 후에 독자적으로 증산의 행적과 사상을 추적, 정리하니 이것이 바로 《대순전경(大巡典經)》이다. 이외, 이중선의 《천지개벽경》과 같은 각 종파에서 내놓은 별도의 경전이 있으나 앞의 대순전경과는 큰 차이가 없다.
안후상(安厚相) / 역사연구가. 1963년 전북정읍생. 원광대학교 사학과 졸업. 한국종교사 전공. 발표된 보천교 관련 논문으로는 〈일제하 보천교 운동〉, 〈무오년 제주 법정사 항일항쟁 연구〉, 〈일제하 민족종교 탄압정책 연구-보천교편-〉등이 있으며, 논픽션《보천교》를 준비하고 있다.